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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2007-05-30

[월간지 관련기사] 봉숭아꽃은 다시 피었는데/정지영 열사(국민신문, 1988. 8)

본문

5월 인물사  봉숭아꽃은 다시 피었는데…



숨이 막히는 듯한 답답함을 느끼며 본지 기자는 정지영 열사의 집으로 발길을 옮기고 있었다. 무더운 날씨 탓도 있겠으나 미리 전화로 방문 제의를 했을 때 흔쾌히 맞이하겠다는 어머님의 목소리에는 웬지 비통함이 깔려 있는 듯한 느낌을 전해 받았기 때문이다.

정열사의 집은 동명 1동 73-38번지, 아담한 한옥이었다. 열려진 대문을 열고 무심코 들어섰을 때 마당에 피빛으로 만발한 봉숭아꽃 주위를 손질하고 계시던 어머니께 기자를 반가이 맞이하였다. 집안 식구 모두가 외출중인 듯 집안은 조용하였다. 마루에선 4살 정도로 보이는 꼬마신사 기자를 반기고 있었다.

열사 어머님과 마루에 자리를 마주했을 때 어머님은 칠순의 연로함도 아랑곳없이 꼿꼿이 정좌를 하시고 손자의 얼굴을 쓰다듬고 계셨다. 마치 정지영 열사의 분신인 듯이…

기자는 어머님의 근엄하고 점챦음에 위축되어 조심히 "정정 하시네요 "라고 말을 건넸다. 어머님은 웃으시며 옛말에 이런 말이 있지, 여자가 한을 품으면 늙지도 않는다는 말이 있어 , 두환이 놈 죽는 꼴 보기 전에는 땅을 기어다니는 한이 있더라도 내가 지놈 보다 먼저 죽을 수는 없지"라고 힘주어 얘기하는 어머님의 이마엔 골이 깊은 주름이 잡히고 있었다. 그것은 아마도 8년의 세월 동안 자식 잃은 부모의 상흔이리라.

정지영 열사는 유복한 집안의 8남매(5남3녀)중 차남으로 광주시 동명동에서 태어났다. 서석 초등학교, 조대 부속 중학교를 다니는 동안 아버지의 사업 실패로 가세는 기울고 엎친데 덮친격으로 아버지까지 화병으로 돌아가시자 중학교를 졸업하고 어린 나이로 목공 기술을 배우기 시작했다. 80년 5월 당시 32살의 나이로 3살 박이 아들까지 둔 정지영 열사는 '성남 가구점'에서 목공으로 일하고 있었다.

"착하디 착한 우리 지영이는 집안의 대들보였습니다. 남에게 싫은 소리 한번 할 줄 몰랐던 내 자식이 왜 죽어가 야만 한답니까? 아직도 그 자식을 땅에 묻었다는 것이 실감이 나지 않아요. 금방이라도 저 대문을 열고 '어머니'하고 부르며 들어 올 것 같은…."

어머니는 잊을래야 잊혀지지 않는 아들의 모습이 눈에 밟히는지 눈시울이 붉어졌다.

정지영 열사가 돌아가신 후 그의 부인과 자식은 소식을 알 수 없었으나 얼마 전 서울에서 잘 살고 있다는 연락이 왔다고 한다. 열사 어머니는 손자가 제대로 컸으면 초등학교 4학년 정도 될 것이라며 못내 손자에 대한 그리움과 아버지 없이 커 나가야 할 것을 생각하면 걱정이 돼 잠을 제대로 잘 수가 없다고 한다.

8년의 세월을 눈물과 한으로 지새웠던 열사의 어머니에게 남은 것은 심장병과 척추 골절로 인한 후유증뿐이다. 어머니는 "골병들었어도 두환이 죽일 힘은 아직 남아 있어"하며 자식을 잊지 못하는 애절함과 자식을 죽인 원수에 대한 분노로 얼굴 표정은 엇갈리고 있었다.

8년 전 5월 19일 열사는 직장 일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학생들과 시민들이 데모하는 것을 보고 저러다 몸이라도 상하면 어떻게 하냐고 걱정이 태산같았다고 한다. 그 다음날인 20일, 열사는 동창들 계모임에 간다고 나간 후 소식이 끊겼다고 하는데, 후에 열사의 친구들에게서 안 사실이지만 오후 7시경 구역 4거리에서 공수부대와 시민과 대치 중일 때 무자비하게 광주 시민이 공수부대에 의해 살육되는 장면을 본 열사는 친구들과 헤어지기 전에 남긴 한마디가 있었다. "이러다가 광주 시민다 죽는다. 광주 시민 다 죽는다 ….

그후 열사의 행방을 사방으로 수소문했으나 알 길이 없었다고 한다. 어머니는 충격으로 전신이 마비되어 꼼작도 하지 못하고 오로지 "지영아 , 지영아, "만을 되 뇌일 뿐이었다고 한다. 그로부터 15일이 지난 뒤 통장이 던져 주고 간 종이 쪽지에 국군 광주 통합 병원에 시신이 있다는 것이었다. 갱신할 수 없는 몸을 이끌고 부축 받아 가며 열사의 형과 함께 종합병원으로 달려간 어머니는 백일 사격장 뒷산에 가보라는 담당자의 냉랭함에 분노하면서도 돌아서야만 했다. 믿기 싫은 일이므로 당신의 아들이 아님을 빨리 확인하고 싶었기 때문이리라.

그러나 결국 지정된 팻말이 새겨진 곳을 파 보니 금새 정지영 열사임을 알 수 있었다고 한다. 어머니는 "얼굴이 으깨어져 오른쪽 눈은 튕겨져 나와 있고 시뻘건, 벌레들이 내 새끼 이쁜 얼굴 위로 기어다닐 때 억장 무너지는 그 심정을 누가 알 수 있겠습니까…." 채 말을 끝맺지 못하고 골골이 패인 주름살을 타고 한맺힌 절규는 한없이한없이 쏟아져 나왔다.

얼마나 시간이 지난 후 어머니는 마당 끝 화단에 피어 있는 봉숭아꽃으로 시선을 돌렸다. "열사가 봉숭아꽃을 좋아하셨나 보죠?"라는 기자의 질문에 어머니는 그저 고개만 끄덕일 뿐이었다.

또 한번의 침묵이 흘렀다. 어머니의 아픈 상처를 헤집어 놓은 것 같아 몸들 바를 몰랐다. 4살 박이 손자가 언제 마루를 내려갔는지 마당 끝 화단에 있는 꽃을 뜯고 있었다. 어머니는 놀라 맨발로 뛰어 내려가 손자를 껴안았다. 손자는 왜 할머니가 놀래 뛰어 왔는지도 모르고 그저 할머니 얼굴에 제 얼굴을 부비고 있었다.

어머니는 한참이나 꼬마 신사가 뜯어 흐트려 놓은 봉숭아 꽃잎을 물끄러미 내려다보고 있었다. 한 참이나 봉숭아꽃에 눈을 붙박은 채 고개를 들 줄 몰랐다. 갑자기 돌아가고 싶었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돌아가는 것뿐이었다. "안녕히 계세요" 목청을 애써 가다듬고 일어설 때도 열사의 어머니는 고개를 들지 않았다. "그래, 잘까요" 여전히 고개를 숙인 채 잠긴 목소리였다.

기자는 어머니의 얼굴을 돌아보지도 않고 대문을 나섰다. 끝내 감추고 싶은 어머니의 눈물을 어떻게 확인할 수 있을 까? 피 빛 봉숭아꽃으로 되살아난 그날의 슬픔을 …아니, 돌아보지 않은 것도, 눈물을 숨기고 싶은 것도 열사의 어머니 뿐만은 아니었다.

대문을 나서면서부터 기자는 땅거미 지는 골목길을 내내 고개를 숙인 채 걸어 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