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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2007-05-30

[월간지 관련기사] 광주희생자자족들의 한맺힌 8년 세월, 낙엽만 떨어져도 문을 열어 본답니다. 안경수(신동아 1988. 7)

본문

현지 취재 광주 희생자 가족들의 한 맺힌 8년 세월

『낙엽만 떨어져도 문을 열어 본답니다』



아직도 통곡하는 사람들

해마다 숨죽이며 5월을 맞이해야 했던「광주」는 이제는 더 이상 「비극의 도시」만은 아니었다. 지난 5월 광주에서는 학생 시민 재야 운동 단체들에 의해 「해방 광주 주간」이 선포되었고, 연일 수 만 명에 이르는 인파들이 모여 추도식을 비롯한 각종 행사 집회 시위 등을 벌여 나갔다. 또한 전국적으로 각 대학 재야 운동 단체에서는「민족 성지 광주 순파단」이 유례없이 결성되어 8만 여명이 망 월동 5·18묘역을 참배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 같은 「승리」의 분위기에도 불구하고, 남몰래 원전에서 가슴을 쥐어뜯으며 통곡하는 사람들이 있다. 바로 5·18 항쟁 당시 행방불명되어 지금까지 그 생시를 확인하지 못하는 행방 불명 자들의 가족들이다.

『왜 쏘았지, 왜 찔렀지, 트럭에 싣고 어딜 갔지 ? / 망 월동에 부릅뜬 눈, 수천의 핏발 서려 있네』

5·18광주 항쟁 이후 유행가가 되다시피 한 노래 「오월」중에 들어 있는 이 가사는 대다수 광주 시민들의 맺힌 한을 잘 나타 내주고 있다.

정부는 이미 85년에 공식적으로 민간인 1백64명을 포함한 1백91명이 「광주 사태」로 인해 사망했다고 발표한 바 있다.

그러나 광주 시민들을 포함한 그 누구도 이 발언을 제대로 믿는 사람은 별로 없는 것 같다. 사망자 수 에 관해 많게는 5천 여명 적게는 수 백 명에 이르기까지 여러 얘기들이 있으나, 보통 비공식적인 정설」로 되어 있는 것이 2천 여명이다. 이는 많은 광주 시민들의 확고부동한 믿음이기도 하다.

이러한 믿음이 사실이라면 2천 여명과 2백 여명의 차이인 1천8백 여명은 광주 시민들의 말처럼 「트럭에 실려 어디론가 갔다」는 이야기가 된다. 사실 정확한 사망자 수를 파악하는 일은, 당시의 군 관계자가 광주 항쟁 직후 수습 과정의 전모를 밝히지 않는 이상 거의 불가능에 가까운 일 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당시 광주 항쟁 관련 사망자가 공식적인 집계인 1백91명은 넘을 것이라는 점이다. 이는 요즘 진행되고 있는 「5·18 당시 실종·사망 ·부상자 신고」 상황을 보더라도 확실해 진다. 광주 시청 ·전남 도청에서는 5·18-6-18까지 한 달 예정으로 신고를 받고 있는데, 6월1일 현재 사망 3명, 행방불명 37명, 부상 1백5명 등 총 1백45명의 가족이 신고했다. 이와는 별도로, 「5·18광주 의거 청년 동지회」 (이하 오청동)에서도 작년 7월이래 「행방 불명자 신고 센터」(광주직할시 북구 임동 소재 YWCA회관 602호)를 설립 공개적으로 신고를 받아 오고 있다. 특히 올해 5월 들어서 매일 3-4건의 신고가 들어오고 있으며 5월말 현재 50여명의 가족들이 신고해 왔다고 한다.

이 같은 신고 양상은, 80년 이후 전후 2 차레에 걸쳐 정부가 설정했던 신고 기간에 단지 8명의 가족들만이 신고했던 것과 비교하면 극히 대조적인 양상이 아닐 수 없다. 이는 그 동안 정부 당국자의 말대로「더 이상의 사망자가 없어서」가 아니라 신고를 꺼리게 하는 「정치 상황」 때문이었던 것으로 풀이된다.

피해의식 강해

「오청동」 산하 『5·18진상 규명 특별 위원회」 정태영위원장(35)은 말한다.

「지금이야 민주화다 뭐다 하며 난리 법석이지만, 불과 1년 전만 해도 그랬습니까? 개헌의 「개」자만 벙긋해도 잡아가던 판인데, 하물며 「불순폭도들의 난동」으로 낙인찍혀 있던 광주 항쟁 관련자들이야 오죽 했겠습니까 ? 저희 같은 혈기왕성한 젊은이들도 목숨걸고 싸워야 했던 형편에, 행방 불명자 가족들은 어디 가서 신고할 엄두도 못냈 지요」

또한 5·18 당시 아버지 박갑용씨(당시

67)를 잃어버린 박명자씨(39·광주시 북구 두암동 186)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80년 5월18일 아버님께서 외출하셨다가 안 돌아오신 이래, 저희 가족들은 「폭도」라는 협의가 두려워 쉬쉬하며 제대로 수소문 해보지도 못했어요. 그러다가 4·26총선거 직전 방송을 듣고 또 주변에서도 이젠 괜찮다고 하기에 시청으로 갔지요」

그러나 시청에 있는 신고 센터는 맨 꼭대기 구석진 곳에 있어 찾기가 힘들었을 뿐 아니라 「아직 준비가 안됐다」는 이유로 돌려보내더라는 것이 박씨의 설명이다. 그 직후 박씨는 주변의 이야기를 듣고 가톨릭 센터의 「정의평화위원회」를 거쳐 「오청동 」에 신고하게 되었다고 한다. 박씨는 아직도 염려가 가시지 않은 듯, 『제 남편 입장도 있으니까 주소는 어머니 집 주소로 써 달라』는 말을 덧붙이기도 했다.

이렇듯 행방 불명 자 가족들의 피해 의식은 생각보다 상당한 것을 알 수 있다. 사실 아직도 6·29이후의 현 상황에 대하여 반신반의하는 사람들이 많은 것을 볼 때, 지금도 신고를 주저하는 행방 불명 자 가족의 수가 적지 않으리라는 것은 쉽게 짐작할 수 있다.

대다수의 광주 시민들은 5·18 당시 계엄군이 많은 시체들을 「어디엔가」 암매장했을 것이라고 굳게 믿고 있다. 이 점은 천주교 광주 대교구 정의평화위원회가 펴낸 광주 시민 사회 의식 조사」에서도 극명하게 드러나고 있다. 「암매장 소문에 대한 견해 」라는 설문에서 응답자들은 「사실이다」(38.9%) 「상당 부분 사실일 것」 (48.8%) 「유언비어에 불과」(8.8%)의 반응을 보이고 즉 총 응답 자중 87.7%가 암매장을 사실로 믿고 있는 것이다. 더우기 유가족·부상자들만의 견해를 보면, 「사실이다」(76.1%) . 「상당 부분 사실」 (18.2%) 「유언비어에 불과」(0%)로 나타나고 있어 매장에 대한 확신은 거의 절대적이다.

확인하기 힘든 「암매장」

이 암매장 문제는 「행방 불명 자 문제」 및 「5·18진상 규명 문제」와 직결되기 때문에 「오청동」을 비롯한 여러 민주 운동 단체들은 암매장의 증거를 확보하기 위해 부단한 노력을 기울여 왔다. 80년 직후부터 암매장에 관한 흉흉한 소문은 끊이지를 않았다. 『광주 교도소 여사 옆에다 시민 군 시체들을 파묻었다』 「동신 고등 학교 뒷산에서 시체가 썩은 물이 흘러 내려온다」

『헬리콥터로 지리산 속에 내버렸다」는 등의 소문들이 사람들의 입에서 입으로 번져 나갔다. 소문은 단지 암매장뿐만 아니라, 수장·화장으로까지 번저 나갔다. 「구덩이를 파고 휘발유를 뿌려 태워 버렸다」느니 『헬리콥터 2대가 밤 9시 이후 교대로 도청 앞 에서 함평 앞 바다까지 시체를 실어 날랐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 어느 것도 확인된 바는 없다.

그런데 이런 소문의 와중에서 충격적인 일이 발생했다. 광주 시내 모 아파트 단지 건립 기초공사를 하던 중 한 인부가 시체와 책가방이 쏟아져 나온 것을 보았다는 것. 이 모씨로 알려진 이 인부는 1985년 6월20일 YWCA회관 6층 「오청동」사무실에 직접 찾아와 암매장 현장에 대한 증언을 했다고 한다. 그 증언의 요지는 다음과 같다.

83년 말경부터 84년 상반기까지 이 모씨는 운암동 주공 아파트 착공을 위해 경지정리를 하고 있었다. 당시 이 모씨가 일하던 회사는 「흥0건설」이었다. 이 모씨는 그때 버스 종점 우측 야산에서 일을 했는데, 불도저와 포크레인을 동원하여 야산을 깎아 내리기 시작하자 곧 시체와 책가방이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다. 당시 주변에는 동료 노동자와 인근 주민 등 30여명의 목격자가 있었다. 잠시 후 현장 소장이 와서 목격자들을 다른 곳으로 보내 버렸다. 그러고 나서 곧 청소차가 오더니 포크레인으로 퍼내어 3트럭 분이나 싣고 갔다. 이모

씨를 비롯한 동료 노동자들은 발설할 경우 해고 시켜 버리겠다는 협박을 단단히 받았다.

이 모씨는 『해고 협박에 못 이겨 여지껏 숨겨 왔던 자신이 못내 부끄럽다』며 고개 숙여 고백했다고 한다. 그러나 암매장 현장을 실제로 포착한 사례는 아직 없는 실정이다.

「민주 쟁취 국민 운동 전남 본부」 (이하 「전남 국본」)의 정동년 공동 의장(46)은 『암매장 신고가 수없이 들어오고 있지만 현실적으로 확인하기가 힘든 실정』이라고 잘라 말했다. 광주의 천주교 남동 성당 남재희 신부도 『당시 상황으로 볼 때 심증이 가므로 교회로서도 암매장 실태를 파악해 보려고 무척 애를 썼지만 군대 관청 등 정보 원천으로부터 차단되어 있기 때문에 성과는 거의 없다』고 말하고 있다.

「5·18광주 의거 유족회」 (이하 「유족회」)의 전계양 회장(54)은 「그간 지형 지물이 다소 바뀌었기 때문에 조사하기가 쉽지 않다』면서 『조만간 군부대나 작전 구역이 아닌 교도소 주위, 야산, 아파트 단지 등을 직접 포크레인을 동원하여 본격적으로 암매장 실태를 조사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아믛든 「암매장」문제는 5·18진상 문제 중에서도 가장 미묘하고 엄청난 폭발 잠재력을 가진 「핵 중의 핵」이라고 할 것이다.

낙엽만 떨어져도 자식생각

비록 정부 당국이 작년 「6월 민주 대항쟁」이후 입장 변화를 보임 으로써 「폭도 가족」

이라는 혐의를 벗게 됐다고는 하지만, 이들 행방 불명자 가족들이 8년 동안 격었던 정치적 육체적 고통은 쉽게 보상될 수 없을 것이다.

김배현씨(58세, 상업, 광주시 북구 오치동 668-67)는 아들 김종곤군(당시 19세)을 80년 5월22일 마지막으로 본 이후, 여태까지 생사도 모른 채 체념하며 살아오고 있다. 인우 보증(목격자 증언)을 선 친구들의 말에 의하면, 종곤군은 시위대의 선두에 서 있었다는 것. 그리고 죽었다는 소문도 있었다. 그러던 중 작년 말에 누군가가 사진을 들고 와서 확인을 요청했다. 얼굴 모습이 약간 붓기는 했으나, 나갈때 입었던 옷차림과 똑같아서 비로소 아들임을 확인했다는 것. 7년 전 사라진 아들을 80년 당시 외신 기자가 찍었다는 사망자 사진첩에서 찾아낸 것이다. 김씨는 하도 기가 막혀서 말도 안 나왔다고 한다. 그래도 어딘가 살아 있으리라는 일말의 희망을 의지하며 살았었는데 일순간에 물거품이 되버린 것이다.

『내가 어떻게 살아 왔는데, 낙엽만 떨어져도 옆집 개 짓는 소리만 들려도 곧 문열고 들어올 것만 같아 밤잠도 설치며 이렇게 몸까지 버렸는데‥‥그 놈을 사진에서 보다니‥‥기가 막혀 말도 안나 옵디다. 인간이 이리도 처절하게 살아서야 어찌 산다고 하겠습니까 ?』

김배현씨는 생사도 알 수 없었던 아들로 인해 몸도 마음도 쇠약해진 나머지 손발이 차고 하체가 거의 마비되어 지팡이가 없으면 걷지도 못하는 형편이다.

그는 80년 말에 서류를 갖춰 「실종신고」를 했었다고 한다. 그러나 관에서는 『신고 대상은 우연한 희생자이지, 당신 아들 같은 폭도가 아니다』는 말로 거절했다는 것이다. 그 후 갑자기 야밤에 기관원들이 들이닥쳐 가택 수색을 하더니 종곤군의 물품들을 싹 쓸어 가기도 했다고 한다. 이런 탓으로 김씨는 85년 7월의 2차 신고 때는 보복이 두려워 감히 신고할 엄두조차 내지 못했다. 더우기 자신이 6·25전쟁 때의 상이용사라서 더욱 두려웠다는 것이다. 그러다가 금년 5월말에 주변 친지들의 강한 권유에 못 이겨 시청에 신고를 했다 한다. 지금은 심사를 기다리는 중이다. 『하루 빨리 광주 사태를 처리해서 더 이상 속이 안 뒤집혔으면 좋겠습니다. 이제 그만 양심적인 세상에서 좀 조용히 살았으면 합니다. 그리고 유치하게 보상은 바라지도 않습니다. 조그만 암자 라도 하나 지어 종곤이가 저 세상에 가서라도 넋이라도 훨훨 날게 하고 싶을 뿐입니다』

내 딸 정신만 들게 해주오!

한읍비씨(65세, 광주시 북구 풍향동 23-67)는 5·18항쟁 이후 정신 이상 증세를 보이고 있는 딸 김영옥씨(31세)로 인해 지금 까지 고통을 받고 있다.

당시 23세로 교회 주일학교 총무를 맡았던 김씨는 이미 결혼 날짜를 잡아 놓은 상태였는데, 언니 집 애들과 함에 공부한다며 5월19일 저녁에 집 근처 언니 집에 갔었다. 그러다가 다음날 새벽에 도청 쪽에서 마구 총소리가 들려 오자, 두려운 생각에 급히 집으로 돌아가기 위해 새벽 4사경 언니의 만류를 무릅쓰고 밖으로 나섰다고 한다. 그리고 나서 약 1시간만에 착검한 2명의 공수부대 원과 함께 인근의 평소 잘 알던 식당 집 할머니에 차로 찾아 왔다는 것인데, 그 동안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모른다고 했다. 식당 집 할머니는 그때 마침 소변을 보기 위해 잠에서 깨어났다가, 대문에서 누군가 소리치며 부르는 모습을 보고 놀라서 급히 대문을 열었다. 그랬더니 영옥씨가 전신이 상처투성이가 된 채로 울먹이며 무장한 공수 부대 요원들과 같이 서 있더라는 것이다. 놀란 식당 집 할머니는 「이 애는 내가 잘 아는 집의 딸인데 절대로 데모할 아이가 아니다』며 극구 변명을 해서 간신히 김씨를 집안에 들여놓을 수가 있었다고 한다. 식당 집 할머니는 급한 대로 상처를 치료하고 휴식을 취하게 한 후, 오전 7시경에 김씨를 귀가 시켰다.

그후부터 김씨는 이상한 증세를 보이기 시작하여, 가끔씩 헛소리를 하는가 하면 방에서 문만 열어도 놀라고 잠자다가 이불만 들쳐도 후들후들 떨고 깜짝깜짝 놀라곤 했다. 그러더니 급기야는 말도 없이 집을 나가 도청 앞 광장에서 옷을 모두 벗고 돌아다니는가 하면 미친 듯이 춤을 추어 대기도 했다. 잠깐 동안은 제 정신이 돌아와 멀쩡하다가도, 곧 다시 헛소리를 지껄여 대며 식구들도 알아보지 못했다. 그러면서도 식당 집 할머니는 잘 알아보면

서 꼬박꼬박 예의를 차리곤 했다고 한다.『날 살려준 분이다. 공수 부대 놈들로부터 나를 구해 줬다』는 것이다. 지금 김씨는 광주 「은성원」에서 요양 생활을 하고 있다. 김씨의 약혼은 정신 이상 증세 때문에 이미 파혼이 됐으며, 그녀의 아버지는 3년 전 화병으로 세상을 떴다고 한다. 그리고 김씨의 큰오빠와 그 부인도 사망한 탓으로 현재는 한씨와 손자들 3남매 그리고 김씨 이렇게 4식구가 살고 있으며, 생계는 한씨가 파출부 일을 하며 삭월셋방에서 어렵게 꾸려 가고 있다.

어머니 한읍비씨는 이렇게 말한다.

『차라리 죽기라도 하면 속이나 편하지요. 제 딸이 저렇게 사는 것을 보노라면 가슴이 찢어질 것만 같습니다. 제발 소원이요, 제 딸만 낫게 해주십시오」

내 잘린 다리는 산에 묻어다오

고최강식씨(87년 사망 당시 34세, 건축업)는 80년 5·18항쟁 당시 입은 부상과 고문 후유증으로 7년간 투병 생활 끝에 운명하고 만 경우다. 당시 최씨는 80년 5월21일 전남 고홍에

서 집을 짓다가 광주로 올라온 후 시내로 나섰다가 연락이 끊겼다. 가족들이 놀라서 답답하여 백방으로 찾아보던 중, 당시 전남대학교 간호 학과장으로 재직하던 이모로부터 연락을 받고서야 비로소 최씨가 국군 광주 통합 병원에 입원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고 한다. 당시 최씨는 진압 공수 부대 원의 잔학성에 격분하여 「살인마는 물러가라」고 외치다가 공수 부대 원의 쇠곤 봉에 머리가 깨지고 군화 발과 개머리판에 뼈가 으스러졌으며 심한 화상을 당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그리고 광주 교도소로 끌려가 독방에서 3일간 조사를 받고 상무대로 끌려가 전신 구타를 당한 후 통합 병원에 입원했다고 가족들은 이야기한다.

그후 80년 7월경에 퇴원해서 집으로 와 한방 치료를 계속 했으나 다리는 계속 썩어 가고 있었다. 물론 통합 병원에서 퇴원할 때 「나가서 조금이라도 발설하면 재미없다」는 협박을 받고 나온 까닭에, 일체 외부에는 5·18항쟁 때 다쳤다는 사실을 얘기하지 않았다고 한다. 5·18관련 단체에서 어떻게 사실을 전해 듣고 찾아오기도 했으나 시종일관 입을 다물었으며, 5·18관련 단체에 가입도 하지 않았다. 83년에 중매로 결혼을 하기는 했으나, 생업인 건축 일을 거의 할 수가 없던 관계로 생활은 어려울 수밖에 업었다.

부인 정순옥씨(32새, 광주시 서구· 월산 4동 952-10)도 남편이 입을 다물어 이러한 사실에 대해 전혀 「몰랐다」고 한다. 86년 9월경 남편의 증세가 너무나 악화되어 할 수 없이 5·18부상자 회에 가입하고 다른 회원의 의료 보험증으로 적십자병원에 입원하게 되어서야 비로소 남편이 5- 18항쟁 때 부상당했다는 사실을 알았다는 것이다.

최씨는 적십자병원에서 양성 골수염 판정을 받고·수술을 했으나 도리어 증세가 악화돼 다시 전남대 부속병원으로 옮겼다. 전대 부속 병원에서는 「이미 암으로 발전했으니 3개월밖에 못산다」는 선고가 내려졌다. 너무도 고통이 심해서 마약이 계속 투입되었으며 방사선 치료, 한방, 항암제 투입 등 안 해본 방법이 없었다고 한다. 그러나 증가는 계속 악화돼 마침내 「다리를 잘라야 한다」는 선고가 내려졌다. 최씨는 「내 자른 다리는 산에다 묻어 달라」며 울먹였다고 한다.

다리를 자른 후에는 허전함에 못 이겨 식사도 잘 하지 않고 멍하니 허공만 바라보는 일이 많아졌다. 그러나 다리 수술에도 불구하고 증세는 더욱 악화돼 마침내 폐까지 번져 한쪽 폐가 거의 썩어 들어가게 되었다. 항암제를 너무 많이 맞은 나머지 머리털도 계속 빠져나갔다. 신체의 오른쪽에는 땀이 안 나는데, 왼쪽에는 땀에 젖는 증세가 나타나기도 했다. 마침내 사망 4일전에 중환자 실로 옮겨졌으며, 가족들은 거의 포기 상태에 들어갔다.

당국에서는 병원 측에 『어떻게든 최씨를 살려라』고 윽박질렀다고 한다. 그러나 병원 측의 필사적인 노력에도 불구하고 1987년 7월15일 오후 3시50분 최강식씨는 운명하고 말았다.

최씨와 장례식도 순탄하게 치러진 것은 아니었다. 당국에서는 가족 장으로 조용히 치르라고 온갖 위협과 회유를 다해 왔다. 이에 직접 간접으로 동요된 5·18부상자 회의 일부 회원도 공개적인 장례식을 치르는 데 주저했다.

그러나 가족들은 「1백 만원을 장례비로 지원하겠다」며 회유하는 기관원을 「너 죽고 우리 죽자」며 쫓아 버리고 7월17일에 광주 도청 앞 5·18광장에서 공개 리에 영결식을 치르고 망월동 5·18묘역에 안장하기로 결정을 내렸다. 비록 최근에는 망월동에 안치되는 영령들은 꼭 도청 앞 5·18광장에서 영결식 내지 노제를 치르는 것이 거의 정례화 되어 있지만, 이때만 해도 도청앞 에서 공개적인 장례 행사를 가지는 일은 처음이었다고 한다.

전경 백골단이 4군데나 저지선을 펴고 꽃상여에 마구 최루탄이 난사되는 가운데 영결식은 강행되었다. 앞장선 가족들에게 집중적으로 최루탄이 난사되기도 했고, 5·18부상자 회 회원들이 「7년 전에 못 죽였으니 지금 죽여라』며 각목을 들고 전경들과 난투극을 벌이기도 했다. 마침내 도 경찰국과 협상이 이뤄져 40분간 행사를 갖기로 하고 영결식을 엄수한 후, 망월동5·18묘역에 안장할 수 있었다.

최씨의 막내동생 최방식(29)씨는 울먹이며 다음과 같이 이야기한다.

「생각할수록 한만 맺힙니다. 그렇게 단란했던 집안이 형님이 다치고 비참하게 돌아가신 후로는 툭하면 울음바다가 되곤 하지요. 형님은 너무도 다정하고 과묵 했습니다. 제가 형님께 받은 사랑은 어떻게 갚을 수 있겠습니까 ?

고 최강식씨의 부인 정순옥씨는 지금 외아들 선준군과 함께 단칸 전세방에서 친정의 도움으로 근근히 살고 있다. 취직도 잘 되지 않는 다는 것이다. 정씨는 선준군이 「아빠 어디 갔냐」고 물을 때가 제일 가슴 아프다고 한다. 그래서 「미국에 돈 벌러 갔다」고 하면, 선준군은 『미국에는 죽은 사람만 가느냐」고 뾰루퉁 해진다는 것이다. 이번 5·18 추모제 때도 망월동에 아들을 데리고 갔는데, 「아빠! 저 왔어요』하고 넙죽 절하는 선준군을 보고 정씨는 눈물이 왈칵 솟더라고 한다. 정씨의 호소를 들어보자.

「아빠는 돌아가셨으니 당연히 유가족으로 되어야 하는데, 아직도 부상자 가족으로 당국은 분류하고 있어요. 제게도 취직 시켜 준다고 말만 하고 차일피일 미루기만 합니다. 죽고 싶은 마음이야 굴뚝같지만, 애 때문에 죽지도 못합니다. 하루빨리 5·18진상이 규명되어야 합니다. 원통해서 잠도 못 이를 정도입니다』

자퇴로 기록된 행방블명 학생

김형태씨(42·농업, 광주시 북구 중흥동721-11)는 5·18당시 송원 고등학교 2학년에 재학 중이던 조카 김기운군(당시 18세)을 잃었다. 김 군이 5월20 일께 들어와서

『시민 ·선배들이 고생한다. 그냥 지나칠 수 없다. 내일 또 나가서 싸워야겠다』고

말하고 나간 후로 소식이 끊어졌다는 것이다. 김 군이 돌아오지 않자 김씨는 김 군이 갈 만한 데를 모조리 수소문 해보았으나 찾을 길이 없었다. 그래서 죽은 것이 아닌가 생각하고 사람들이 많이 죽었다는 너릿재 고개(지금의 화순 터널) 근방을 이 잡듯이 뒤져보았으나 역시 헛일이었다. 할 수 없이 상무대로 갔다. 그러나 시체들이 부댓 자루에 덮여 있고 상처와 핏자국이 뒤범벅이 되어 있어 제대로 찾아보지도 못했다. 그래서 급히 김 군의 모친인 형수

를 불러 김 군을 찾아보게 했으나, 역시 살벌한 상무대의 분위기 속에서 제대로 찾아볼 수조차 없었다. 그래서 다음날 또 찾아보기로 하고 형님 댁에 갔다가 다시 상무대로 가보니, 쌓였던 시체가 하나도 없이 말끔히 치워져 있었다는 것이다.

『어찌된 일이냐』고 군인들에게 물어 보아도 『모른다」는 퉁명스러운 대답뿐이었다.

그는 공포 분위기 때문에 질린 나머지 제대로 항의 한번 못하고 힘없이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그후로 막연히 살아서 돌아오겠지 하는 믿음으로 하루하루를 보낸 세월이 어언 8년이 흘렀다고 한다. 「전화 벨소리만 울려도 조카 전화일까, 우편배달부가 들어서기만 해도 조카 편지가 왔을까 하는 생각에 제대로 먹지도 자지도 못했다』는 것. 그동안 이사를 한 번도 못 갔다고 한다. 이사를 가야만 할 사정이 생기더라도 행여나 김 군이 찾아오지 못 할까봐 꾹참고 눌러 있어야만 했다. 김 군의 .할머님은 화병으로 2년 전에 세상을 뜨셨다. 김 군의 모친도 심장병을 얻어 고생하고 있다.

『 시체라도 찾은 사람들은 묘라도 쥐어뜯고 통곡이라도 하겠지요. 부상자 가족들은 그래도 사람이 살아 있으니 볼 수라도 있습니다. 감옥에 간 사람들은 면회라도 갈 수 있어요. 하지만 행방 불명자의 가족들은 무엇입니까? 그저 허공만 멍하니 바라볼 뿐입니다」

김형태씨는 한숨을 쉬며 이야기했다. 김씨는 80년 5월 직후 1차 신고 때는 그래도 살아 있으리라는 기대 때문에 신고를 안 했다고 한다. 그러다가 85년 7월경의 2차 신고 때는 이미 죽은 것으로 단정하고 용기를 내어 신고했다. 당시 총 신고자는 8가족.

김형태씨는 신고 서류에 필요한 김 군의 생활기록부를 발부 받으러 송원 고등학교에 갔을 때 의외의 사실을 발견했다. 발부된 생활기록부를 살펴보니 김 군의 부모의 양해 아래 학교를 스스로 그만둔 것으로 되어 있었던 것이다. 「학업에 관심이 없어 더 이상 학교를 다니고 싶지 않다』는 내용이었다. 김씨는 혹시나 싶어 김 군의 부모에게 그런 사실이 있는가 물어 보았다. 그러나 그런 일은 없었다. 김씨는 분통이 터져 교장실로 뛰어들어가서 항의를 했다.

『교장은 고개를 푹 숙이더니 용서 해 달라고 하더군요. 자기 학교에 유독 행방 불명 자가 김 군 뿐이라서 상무대로 불려가 매운 닥달을 받았다는 겁니다. 그리고 상무대에서 행방불명으로 제적됐다고 하지 말고 스스로 공부에 관심이 없어 자퇴한 것으로 기록하라고 강요 받았 다는 겁니다. 너무 어이가 없더군요. 물러 나왔지요」

「행방 블명자 가족회」 창립

이렇듯 가슴저미는 사연을 품고 한 맺힌 8년을 살아온 행방 불명자 가족들은 4월1일 당국의 「광주 사태 치유방안」 발표를 계기로 공개적인 움직임을 보이기 시작했다. 마침내 지난 5월10일 40여 「행불자」가족들이 주축이 되어 YWCA회관 4층 강당에서 「5·18광주 민중 항쟁 행방 불명 자 가족 회」(이하 「행불회」 )를 창립하기에 이르렀다.

창립총회에서 회장으로 선출된 임준배씨(54세, 인장업, 전남 고흥군 도양읍 녹동리 4) 는 『상당히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자식들이 5·18당시 희생됐다는 것을 알면서, 신고조차 하지 않고 있는 실정』이라 면서『다른 유족이나 부상자와는 또 다른 고통을 겪고 있는 서로의 처지를 위로하며 진상 규명의 차원에서 조직적으로 대응하기 위해 모임을 만들게 됐다』고 결성 취지를 밝혔다.

이전에도 행불자 가족 모임이 없지는 않았다. 몇 번의 모임은 있었지만, 당시의 「폭도 가족」이라는 사회적 분위기와 「어쩔수 없는 운명의 탓」으로 돌리는 가족들의 인식으로 인해 잘 이루어지지 못했다는 것.

이번에 「행불회」가 창립되기까지에는「오청동」의 도움이 상당히 컸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86년 4월5일 무진 교회에서 창립된 「오청동」은 86년 12월경부터 은밀히 행불자 문제를 포함한 5·18진상 조사 작업을 벌여 왔다. 이 과정에서 당국의 탄압도 왜나 컸었다고 한다. 그러다가 6·29선언 직후인 87년 7월부터는 공개적으로 「5·18진상 규명 특별위원회」를 발족시켜 활동하면서 「행 불자 신고 센터」도 설립, 독자적으로 운영 해왔다. 여기에 신고한 행 불자 가족들이 「행불회」 창립의 모태가 된 것이다.

「행불회」는 창립 선언문에서 「지난 8년의 세월은 단 하루도 거르지 않고 밤마다 대문을 열어 놓고 문밖으로 귀를 기울이며 가슴 조이는 처절한 몸부림의 세월이었다」면서, 『이제‥‥하나가 되어 정권 강탈을 위해 자행한 학살 만행의 진상을 철저히 규명하고 학살 자 들을 응징한 후 자식들의 유골이라도 찾아 양지바른 망월동에 묻어 주기 위해 가열찬 투쟁을 전개할 것』을 다짐하고 있다.

「행불회」는 창립 총회 후 「오청동」회원 등과 함께 「왜 쏘았지 왜 찔렀지 트럭에 싣고 어디 갔지」라는 플래카드를 앞세우고 시청 앞까지 가두시위를 벌이기도 했다.

이들은 시청 앞에서 『내 아들을 찾아 달라』「내 자식을 살려내라』고 외치며 「5·18진

상 규명과 책임자 처단 투쟁」을 벌이기도 했다.

일반적으로 행방 불명 자 문제는 5·18의 진상, 특히 5·18당시 사망한 사람들의 암매장 화장 수장 등을 통한 시체 은폐 내지 유기의 여부를 가리기 위한 유일하고 확실한 길이라고 생각되고 있다.

남재 회신부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행 불자 문제는 없던 것이 갑자기 생겨난 것이 아닙니다. 단지 공개되진 못했을 뿐이죠. 행 불자 문제의 진상 규명이야말로 광주 학살의 진상을 적나라하게 드러 내줄 것입니다. 5·18진상 규명과 행 불자 문제는 땔래야 뗄 수 없는 관계에 있습니다」

남신부는 행방 불 명 자 들이 주로 「5·18항쟁 초기의 희생자들과 5월27일 새벽 진압 당시의 희생자들일 것」이라고 추측하고 있다. 왜냐하면 「당시 파악되어 안치된 시신들은 대부분이 시민 군이 확보해 놓은 시신들과 광주 시내에 남겨졌던 시신에 불과하기 때문」이라는 것.

이와 관련하여 「오청동」의 정태영 씨는, 행 불자는 당시 주로 「광주 외곽 에서 돌아 가시 거나 시내로 들어오시던 분들, 19일 에서 21일 사이에 돌아가신 분들, 27일 새벽에 돌아가신 분들』일 것으로 추측하고 있다.

이렇듯 「광주 문제」의 핵심을 이루고 있는 행방 불 명자 문제의 당사자인 「행불회」

는 앞으로 5·18진상 규명을 위한 조직적인 사업 수행에 큰 역할을 하리라고 기대되고 있다.

그러나 실제적으로 부딪치는 어려움 또한 적지 않은 것이 사실이다.

우선 제일 먼저 부딪치는 어려움이 바로 아직도 5·18관련자들이 음으로 양으로 갖고 있는 「피해 의식」이다. 물론 이는 아직도 세상이 「덜」 풀렸다는 생각의 반영이기도 하다. 이로 인해 행 불자 신고도 꾸준히 지속되고는 있으나 그 수가 미미하고, 이미 신고를 마친 가족들도 「행불회」의 활동에 적극 참여하지 못하는 경우도 있다는 것이다.

게다가 회원 개개인에게 음으로 양으로 가해지는 「압력」때문에 더욱 소극적이 되기도 한다는 것이다.

「행불회」 총무 허청씨(51)의 말이다.

『우리는 지금 당사자 스스로 문제 해결에 앞장선다는 자세를 갖고 의욕적으로 일하고 있습니다만, 여러 가지 부닥치는 어려움이 많습니다. 아직도 많은 회원들이 피해 의식에서 소극적 자세를 보이기도 하고 심지어는 압력을 받아 더러는 탈퇴하기도 합니다. 그래서 재정 인력 문제도 심각한 상태이지요」

허 총무는 88올림픽이 끝나고 나면 더욱 어려워질지도 모르겠다고 덧붙이기도 했다.

이러한 「압력」현상은 비단 어제오늘의 이야기만은 아니다. 80년 이후 5·18관련 단체나 유가족 부상자 등이 격었던 「사건」들을 거론하자면 이루 헤아릴 수도 없다. 그 중 대표적인 유형을 들어보면 다음과 같다.

▲ 5·18묘역에 있는 묘지 이장을 둘러싼 회유 매수 협박, ▲ 고위 당국자의 전남 지방 나들이에 따른 불법 연금 감금 납치, ▲추모제 등의 행사 저지에 관련된 불법 연행 구금 등.

두번째로 부딪치는 어려움은 바로 대다수 회원이나 대상자들의 「생계 문제」에서 연유 한다. 설사 「압력」이나 「피해 의식」이 없다 손치더라도, 워낙 생계를 꾸리기에 허덕이다 보니 다른 생각이나 활동을 할 여유가 별로 없다는 것이다. 이 점은 5·18당시의 적극적 참여자나 희생자들 주로 가장의 위치에 있는 남성과 소득 낮은 기층 민중이 보다 많았다는 사실 볼 때, 쉽게 이해될 수 있다.

「의식 조사」 가운데 「부상자 유가족의 월수입」이란 설문을 보면 20만원미만이 55.7%로 대다수를 차지하고 있다. (광주 시민 전체를 대상으로 보면 20만원 미만은17.4%)

세 째로 부딪치는 어려움은 가장 실제적 문제이다. 5·18당시 실제로 행방불명 』였음을 입증 해낼 수 있는 근거를 마련하는데 어려움이 많다는 것이다. 이 근거로서는 주로 「인우인 보증서」(목격자 증언)

「진단서」(아니면 당시의 치료 확인서) 등이 요구된다고 한다. 그런데 ▲ 시간이 많이 흐른 관계로 목격자나 증인을 찾기가 힘들다는 점, ▲ 피해 의식으로 인해 목격자나 증인이 보증을 기피한다는 점, ▲ 정부 당국의 비협조적인 태도나 압력 등으로 필요한 서류들을 제때 제대로 발부 받기가 힘들다는 점등으로 인해 난관에 부닥칠 때가 많다는 것이다.

끝까지 진상규명 투쟁할 터

전남 국민 운동 본부 정동년 공동 의장은 행불자 문제는 「전남 국본」의 역점 사업 중 하

나라면서 이렇게 말한다.

「그 동안 가족들이 신고를 못한 이유는 공포 분위기 속에서 억눌렸기 때문이고, 이제서야 사회적 모순이 적나라하게 드러나는 것입니다. 정부 당국은"이런저런 이유로 회피하거나 방해 하지말고 근거에 관계없이 접수된 모든 사례를 인정함은 물론 하루 빨리 5·18진상을 공개하고 물러가야 합니다』

결국, 「행불회」의 창립 선언문에서도 나타 난대로, 행방 불명 자 가족들은 자신들의 문제는 자신들 스스로가 앞장서서 자주적으로 싸워 해결할 수밖에 없다고 절감하고 있다.

「행불회」의 임준배 회장의 말을 들여 보자.

『정부는 5·18-6·18의 한 달 동안이라는 신고 기간을 설정해 놓고 있지만, 이 문제가 어디 한 달만에 해결될 문제입니까? 정부는 시한을 설정해서는 안됩니다. 일단 기간 연장을 건의 해보고, 안되더라도 법정 투쟁을 포함하여 끝까지 싸워 모두 인정받고야 말 것입니다』

이러한 각오와 의지는 이미 행불자 가족들만의 것이 아니다. 행 불자 문제 또한 이미 행 불자 가족만의 문제도 아니다.

행불자 문제와 행불자 가족들은 이미 5-18민중 항쟁 진상 규명과 그를 위해 투쟁 하는 광주 시민 유가족 부상자 단체 등과 불가분의 관계를 맺고 있다. 「유족회」의 전계량 회장은 이렇게 말한다.

『행불자 가족들과 우리 유족들은 한 식구나 다름없습니다. 결코 남의 일로 생각지 않아요. 지금은 「무서운 개량 국면」이랄 수 있습니다. 이런 때일수록 굳세게 힘을 합쳐 한 치의 틈도 보이지 말고 싸워 나가야 할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