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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2007-05-30

[월간지 관련기사] 시숙은 다시 살아나는 풀잎입니다./장하일 열사(국민신문 1988. 7)

본문

장하일 열사 재수의 수기

시숙은 다시 살아나는 풀잎니다.



우리 시숙께서는 평소에 '술보'라는 별명어 블을 정도로 술을 좋아하서서 친구분들도 많았윰니다. 술을 좋아해서 성격이 괴팍할 것 같지만 우리 시숙은 법없이도 살 분이었옵니다. 늘 "없이 사는데 남의 집, 귀한 딸을 데려다 고생 시킬 수 없다"며 결혼도 하지 않으셨율니다. 그래서 저희들 결혼하고 부터는 서동에서 같이 살았율니다. 시숙께서는 17살의 어린 나이에 부모님을 여의고 시누이와, 애기들 아버지, 두 동생을 건사하는 가장으로 어려운 생활을 꾸리셨다고 남편이 입버룻처럼 얘기했읍니다.

일가부친없는 3남매만이 남게 되었는데 얼마 있다 시누이도 죽고 해서 2형재만 남아 서로 의지하고 살았음니다. 그래서인지 형제간의 우애는 재가 질투할 정도로 좋았율니다. 없이 사는 형편이었지만 서로 따뜻하게 챙겨주는 두터운 정만으로도 이 세상에 부러을게 얼었읍니다. 그러나 지금 생각하면 한스럽기 짝이 없윰니다. 그리도 빨리, 허무하게 갈 인생이라면 아득바득거리며 살 필요가 어디 있겠윰니까.』 좀 나은 생활을 해보려 고 허리 띠를 졸라매며 먹는것, 입는 것 잊어버리고 살았는데 살아 생전에 좀 더 잘해 드릴것을 그랬나 싶어 가슴에 맺히는게 많습니다.

좀더 잘살아보자고 저도 백운동에 있는 제과점에 나가던 8년전 그 날 아침에도 빨리 출근하기 위해 부랴부랴 아침상을 차리고 있었윰니다. 그날이 5훨 21일이었습니다. 아침상을 들고 안방으로 들어가니 시숙과 남편이 오늘은 시내를 나가봐야겠다고 했읍니다. 그래서 제가 만휴했을니다. "사람도 많이 죽었다고 하는데 이럴때 죽으면 개죽음이니 나가지 마라"고 신신당부를 했읍니다. 그러고 나서 저는 출근을 해야 했기 때문에 밥상을 물리고 설겆이를 하는등 마는등하고 출근을 했윰니다. 그런데 그 날 기어코 일이 생기고 말았옵니다. 제 과절일을 마치고 친정집에 갔었윰니다. 그때 살던 집과 친정이 가까웠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친정으로 전화가 왔윰니 다. 제 남편이 총에 맞아 중태에 빠졌다고 했읍니다. 그 소식을 듣는 순간 "썩을 놈의 인간 나가지마라고 그렇게 당부했건만·.·"하고 속이상해 욕을 해댔습니다. 그러나 저도 모르게 신발도 제대로 신지 못하고 남편이 누워 있다는 전대병원으로 발길을 치닫았습니다. 가보니 제 남편이 아니라 시숙께서 누워 계셨음니다.

그매 저는 사람 마음이 간사한줄 비로소 느꼈습니다. 총상을 심하게 입어 누워있는 시숙을 보니 가슴이 미여지면서도 남편이 아니라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 있었으니 말입니다. .피붙이가 단출해 '제수'가 아니라 여

동생처럼 따뜻이 대해됐던 맘 좋은 시숙이 손가락온 떨어져 나가 있고, 뒤에서 총을 맞았는지 배가 뻥 뚫려 있었읍니다. 시속의 그 모습을 보니 하염없이 눈물만 나왔윰니다. 남편과 저의 간호도 아랑곳없이 23일 병원에서 운명하셨음니다.

남한테 눈롭만큼도 폐 끼치지 않고 남한테 싫은 소리 한 번 할줄 모르던 시숙의 짧은 한 평생은 그렇게 끝나고 말았음니다. 나중에 남편한테 들은 얘기로는 남편과 시숙이 같이 있다가 남편은 졸음이 쏟아져 형님보고 같이 집에 들어가자고 했는데 형님은 "너 먼저 들어가거라 열 받쳐 그냥 못들어 가겠다. 난 조금 더 있다 갈테니 먼저 가라"고 했던 것입니다. 남편이 먼저 자리를 뜬 얼마있다 일은 벌어졌읍니다. 당시 도청앞에서 군인들과 대치하고 있을때 광주고속버스 한대가 도청을 향해 진격할때 느닷없이 공수부대들이 시민들이 운집해 있는 곳을 향해 총질을 해댔던 것입니다. 앞에 서있던 사람들이 가을에 낙엽 떨어지듯 우수수 쓰러졌고 그 중에 우리 시숙도 끼어 있었다는 것입니다.

제남편이 몸이 편찮아 서을 병원에 입원해 계셔서 이글을 대신 제가 쓰게 되었지만 8년전 시숙의 처참했던 모습을 생각하면 아직도 억장이 무너지는것만 같습니다. 그 날 시숙이 왜 남편을 먼저 보내고 끝까지 남아 있었는지 이제는 알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