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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2007-05-30

[월간지 관련기사] 일석이,준석이 잘 키울테니 걱정말고 편히 잠드시오/김복만 열사(국민신문, 1988. 6)

본문

김복만 열사 아내의 수기

국민신문.1988년 6월 24일 발행.

일석이,준석이 잘 키울테니

걱정말고 편히 잠드시오,

우리 일석이 아버지가 가신지 8년!.세월 가는 줄 모르고 지냈읍니다. 그만큼 상사가 고달픈 탓이겠지요. 남편이 벌어다 준 돈으로 많든 적든 살아 왔던 제가 결흔 2년딴에 남편과 사별하는 박복한년이 되고 말았윰니다. 우리 준석이는 그 때 겨우 한달이 채 못된 갓난아이 였는데‥‥‥‥

일석이 아버지는 정이 많아 남이 못 쓸 일 당하면 참지 못하고 내 일같이 발벗고 나서는 사람이었옵니다. 우리 일석이를 키울 때도 기저귀까지 갈아주는 자상한 아버지였고 남편이었윰니다. 항상 친구가 많아서 자

주 친구들을 집으로 데려와 호남대 앞 전세 60만원에 세들어사는 저희 형편으로 생활비를 푼푼히 쪼개야 했고 그렇게 해야하는 저에게는 곤욕이었지만 친구간의 우정은 말할 수 없이 좋았읍니다. 일석이 아버지는 고등학교를 졸업한 후 10여년 동안 택시운전만 하시다 일을 당하시기 얼마전 현대교통(버스)기사로 들어 가셨읍니 다.운전을 오래 하시다 보니 요령도 피울 스 있으련만 항상 동료들에게 먼저 양보하고 궂은 일만,-궂은 일만 그리 찾아다니면서 했었읍니다.그렇게 좋은 사람이 전생에 뭔 죄를 그리 많이 졌다고 명이 그것밖에 안되었을까요. 산사람은 산입에 거미줄 안친다구 어떻게 해서라도 살제마는 죽은 사람만 불쌍하제, 하루를 살아도 이승에서 사는 것이 더 났다는데‥‥‥

예말이요 일석아버지, 아장아장 걷던 우리 일석이가 인자 국민학교 5학년, 그리고 막 낳았던 준석이는 국 민학교 2학년이 되었고요. 당신은 이 어린것들하고 나는 어떻게 하라고 그리도 무정하게 먼저 가셨소, 눈이 제대로 감겨집디여 ".

지금도 시아버님 시어머님께서는 장성에 사시고 계십니다. 이제 아흔을 바랍는 연세가 되셨지만 정정하시지요.우리 일석아버지가 4형계 중 딱내였는데 제일 이뻐했지요. 며느리 사랑온 시아버지라고 아버님게서 저를 얼마나 귀여워 하셨는지 모릅니다.

"애들의 모습을 볼때면 가슴이 아파 흔자·눈물지은 적이 한두번이 아닙니다. 그러나 애들도 크면 저희 아버지가 얼마나 좋고 얼마나 흩륭했는가 알게 될 것입니다. "

가끔씩 애들 데리고 찾아뵈면 "아이구 우리 새끼들왔는가"하시며 눈자위가 붉어 지십니다.사람 사는 것이 왜 그리도 허망한지 애기들 아버지가 그렇게 들아가실줄 누가 알았읍니까!. 8년전 그때도 저는 친정어머니 출상이라 시골에 내려와 있었윰니다. 애기들 아버지는 예비군훈련 받으러 갔을때니까. 장모 돌아가신지도 모르고 있었지요 5월 20일 세들어사는 큰방 집으로 전화가 왔다고 하더군요 "광주가 시끄러우니 혹시 애기들 엄마한테 전화오면 당신 걱정하지 말고 장성에 계속 있으라고 말입니다. 그러고는 소식이 없얹다고합니다.저는 이런것도 모르고 친청어머니 '출상으로 정신'없었지요 24일 장성으로 남편 친구분한테서 연락이 왔더군요.애기들 아버지가 돌아가겼다고요 눈앞이 캄캄해졌윰니다. 그리고 세상 앞에 나서기가 두려웠읍니다. 그러나 마지막가는 남편 얼굴은 꼭 봐야했읍니다. 부랴부랴 광주에 와보니 적십자 공원에 근무하는 친구들이 시신을 확인하고 벌써 상무관 앞에 입관까지 시켜놓은 후였읍니다. 저희들이 다 확인했으니 보지 마라는 남편 친구들의 권유를 뿌리치고 두눈 똑바로 뜨고 그이를 쳐다보았읍니다. 얼굴은 퉁퉁부어 제대로 알아볼 수 없을 정도였고 가슴이 뻥뚫려 있업읍니다. 그이 친구분들의 얘기를 들으니 여기저기 다친 사람들을 병원으로 운반하기도 하고 목사님들을 싣고 다니기도 했다는 것임니다. 그 자리에 주저 앉고 말았읍니다. 가슴이 콱콱 막히고 다리에 힘이 없었읍니다. 그러나 세상이 끝난것 같았지만 어린것들 생각해서 마음 독하게 먹으니까 어찌해서 8년이란 세월은 훌적 지나가 버렸읍니다. 그동안 지역개발협회에서 천만원나온 것으로 지금 살고 있는 주공A.P.T전새 얻고 나머지 400만원 이자로 살아가고 있읍니다. 없이 살아도 애비없는 자식이란 말을 안듣게 하려고 얼마나 허리띠를 쫄라맸는지 모릅니다. 남들 해주는 것이라면 내자식도 해주고 싶은 것이 이 세상 부모 맘일 것입니다. 한다고는 해줘도, 없이 살아 맘같이 못해주는 게 가슴이 미여집니다. 얼마전 준석이가 울고 들어오길래 왜 그러냐고 물

어도 대단도 않고 울기만 하더군요. 말을 않고 울기만해서 화를 냈더니 금새. '엄마'하고 젖무덤을 찾더군요 "어린것이 뭔일일까?"하다가도 내새끼 재롱이 귀여워 꼭 안아줬지요. 이래서 "지 새끼는 다 이쁜갑다"했습니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한 아파트에 사는 아이가 " 준석이 너는 왜 아빠가 없냐"고 하니까 아무말 없이 울기만 하더라는 것이었읍니다. 어린 마음에 얼마나 아버지가 그리웠으면 그랬을까 생각하니 억장이 무너기는것만 같았읍니다. 지금은 애돈이 어릴 때 아버지를 잃었기 때문에 얼굴도 제대로 기억을 하지 못합니다.그래서 어렸을때는 큰방집 아저씨가 아빤지 알고 컸읍니다. "누가 저사람이 느그 아빠다"하면 '아빠'하고 달려가 안길 정도 였으니까요. 그런 애들의 모습을 볼때면 가슴이 '아파 혼자 눈물 지은적이 한두번이 아닙니다. 그러나 애들도크면 저희 아버지가 얼마나 좋고 얼마나 훌릉했는가를 알게될겁니다. '일석이 아버지 애들 걱정 마소. 내 죽는 한이 있어도 보란듯이 흘릉하게 키을 것이니게요"

날마다 날마다 하늘 나라에 가신 인석이 아빠께 이렇게 다짐하곤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