찾고 있는 키워드를 검색해보세요.

DRAG
CLICK
VIEW

아카이브

온라인 자료실

작성일2007-05-30

[월간지 관련기사] 워째 우리 대환이가 폭도라요/백대환 열사(국민신문, 1988. 6)

본문

백대환 열사 어머님의 수기

워째 우리 대환이가 폭도라요



『발가벗겨진 알몸에 코는 잘려져 나가고 눈 알은 튀어 나와 눈뜨고 블 수 없었음니다. 누가 왜 무엇때문에 내 외아들을 이토륵 잔인하게 찢어 놓았는지‥‥ 나는 반드시 내 자식을 죽인 놈들을 그럴게 똑 같이 죽이고 말겠다고 하루에도 몇 번씩 다짐하곤 합니다. 』

착하기만 하고 동네 어른들한테도 인사성이 바르다고 늘 칭찬만 받고 커왔고 누구한테 해꼬지 한번 안하고 그저 순하고 과묵하기 만 했던 우리 대환이가 폭도라요-

벌써 우리 대관이가 죽은지 8년이 지났습니다. 우직하고 정직하기만 했던 대환이는 어려서부터 하고자하는 일을 끝까지 해내고야 만 강직한 성품도 함께 있었읍니다. 그 애는 친구들과의 관계에 있어 서도 사람 차별은 있을 수 없으며 국민학교, 중학교만 졸업하나 대학교 졸업하나 다 똑같은 인간으로서 대접 받아야 한다면서 꽤 폭넓은 인간관계를 가졌던 것 같습니다.

지금도 정정하신 우리 시어머니 (그ㄹ니까 대환이한테는 할머니가 되지요) 는 거의 날마다 대환이를 못잊어

하시면서 눈물로 밤을 지새우고 계신답니다. 젖떼고부터 죽을때까지 할머니를 얼마나 따랐는지 모릅니다.

8년 전 5월 20일 집을 나간 대환이는 집으로 전화를 걸어 유동에 사는 친구집에서 자고 온다고 했읍니다. 그 다음날도 저녁 9시쯤에 전화가 왔었는데 일고 선배랑 친구들하고 있으니 걱정말라는 것이었읍니다. 그리고 일찍 갈 수 없는 상황이기 때문에 지금은 빠져 나갈 수 없고 내일 아침 일찍 간다고 하였습니다.

평소에도 아들이 하나 뿐이어서 어디에서 자고오게되면 꼭 연락을 하라는 주의를 준터라 전화를 했던 것입니다.그런데 그것이 제 아들의 마지막 목소리가 될 줄은 꿈에도 몰랐읍니다.

다음날인 23일부터 아무 소식이 없자 사방팔방으로 수소문하고 찾으러 다니고 있던 중 어떤 학생이 화순방면에서 103번 번호를 단 차에 방직회사 여공 2명과 남자 9명이 탔었는데 모두 총 맞아 죽었다고 하였읍니다. 혹시 그 차를 보면 신고를 해달라고 하더군요. 그래서 마침 병참부에 근무하는 군인이 옆방에 살고 있어 서 31사단에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 었윰니다.

그러나 우리 대환이는 찾을 길이 막막하였읍니다. 모든 사람들을 동원하여 대환이를 찾아 나섰는데 양동 뒷산에 수많은 사람들을 가매장했다는 소리가 떠돌아 양동 파출소로 찾아 갔더니 양동 파출소에서 광주 경찰서로 가보면 알 수 있을 것이라는 말을 듣고 급히 광주경찰서로 향했읍니 다.

광주 경찰서의 한 경장이 피가 범벅이된 농구화 한짝과 대환이 책상 열쇠를 증거물로 갖고 있다고 보여주었읍니다.대환이 아버지와 같이 우리 대환이가 가매장된 장소를 찾아갔읍니다. 그런데 너무도 끔찍한 광경을 보아야 했읍니다. 옷은 하나도 걸쳐지지 않은 상태에서 코는 잘려져 버렸고 눈은 튀어나와 왼쪽 가슴부분에는 총알로 맞은 흔적이 보였윰니다. 그 부위는 너무 심하게 부패되어 있얹읍니다. _

한달정도를 찾아 헤맨 자식이 이렇게 썩은 몸으로 내 괭개쳐져 있는'것을 보고 분노가 치밀었윰니다. 내자식을 저토록 잔인하게 죽인 놈을 기필코 이 두손 으로 쿡이리라는 마음을 다져 먹었윰니다. 그땐 미쳐 생각을 못했는데 죽어있는 내 자식의 모습을 사진에라도 담아놨으면 지금 매우 중요한 자료가 되었을 것입니다. 80년 이후로 81년부터 내아들 대환이를 살리기 위해 발버등을 쳐야 했읍니다. 92년도에는 동사무소에서 쌀가 마니를 갖다주었읍니다. 그것으로 우리 대환이의 죽음을 보상하자는 것이었음니다. 울화가 치미는 분노로 쌀을 몽땅 마당에 내동댕이 쳐버렸읍니다.

또, 그 해에 전두환, 이순자가 광주에 왔었읍니다. 도지사 숙소에 있다는 것을 알고 갔는데 이미 떠나버린 뒤였읍니다.이후 담당형사들에게 감금되었었는데 광천동 부근을 지나간다는 소식을 듣고 집을 빠져나와 박수부대로 동원나온 시민들 사이에 끼어 들었읍니다.

조금 있으니까 전두환, 이순자가 휘황찬란한 차량행렬을 이끌고 머리를 꼿꼿이 쳐들고 오고 있었음니다. 살인마들이 대낮에 고개를 들고 활주하고 있는 모습을 본 순간 역겨움이 치솟았읍니다. 그래서 차를 가로막을려고 그 차앞에 뛰어들어 뒹굴었윰니다. 이 일로 인해 나를 담당했던 형사는 좌천을 당했는데 무척 기가 막힌 일입니다. 악랄한 형사가 좌천을 당한 것을 보면 얼마나 더 악랄한 형사가 그 자리 를 메꾸었겠읍니까?

대환이가 죽은지 8년이 지난 지금도 광주의 진상은 밝혀지고 있지 않습니다.우리 대환이를 보고 폭도라고 할 때가 가장 가슴이 미어집니다. "어찌 생각해 보면 어차피 한번 죽을 목숨 교통사고나,나쁜 것해서 죽은 것보다는 낫다"고 여겨지지만 착한 우리 대환이가 폭도라는 누명을 하루 빨리 벗을 수 있도록, 모진 목숨 이어가는 이 애미는 끝까지 싸워나갈 것입니다.

하루 빨리 진상이 낱낱이 밖혀지고 누가 진짜 폭도이고 살인마인지 판가름 나서, 이 한 맺힌 응어리를 풀어야 할 것입니다. 그 일을 해 낼 사람은 남편 잃고 자식 잃은 박복한 우리 가 앞장서야지요.

국민신문 1988년 6월 10O일 발행

백대환(80년 당시 20세 송원전문대 1학년 )

1961년 광주시 북구 삼각동 118번지에서 태어남

서석국민학교, 숭일중학교, 광주제일고등학교를 거쳐

80년에 송원전문대에 입학

80년 5 · 18당시 5웜 23일 오전9시경 숨을 거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