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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2007-05-30

[월간지 관련기사] 오빠의 무덤 앞에 우리 모두 웃을 날은/전영진 열사(국민신문, 1988. 6)

본문

5월 인물사

-전영진 열사 여동생의 수기

오빠의 무덤앞에 우리 모두 웃을 날은‥‥

답답하리 만큼 과묵했던 오빠. 철모르고 어렸던 나는 오빠의 침묵 속에 내재된 무서운 정열을 읽지 못했다. 팝송이나 흥얼거리고 쓸데없는 영화배우 얘기나 주절대던 내 모습이 하도 보기 싫어 몇 번씩 듣기 싫은 소리를 해대던 오빠.나는 그때 오빠가 내 세계를 이해 못하고 파쇼처럼 군림하려든다고 생각했었다. 오빠는 나를 미워한다고 생각했고,나도 얼마쯤은 오빠를 미워했다. 내가 미워한 오빠는 그러나, 우리 집안의 기등이었다. 함부로 범접할 수없는 분위기가 오빠에게서 늘 발간되었고. 잠시 오빠를 미워한 것을 함부로 대할 수 없는 데서 오는 열등감의 일종이었다. 덤벙거리던 내게, 착실하고 대범하던 오빠는 늘 질투의 대상일 수밖에 없었다. 오빠가 우리 곁을 떠난 후 열쇠로 꽉 잠겨진 오빠의 책상서랄을 열었을 때, 그리고 오빠의 '가방 속을 펼쳐보았을 때, 거기서 나온 인쇄 상태가 나쁜 여러종류의 성명서들은, 조용하고 과묵하기만 했던 평소의 오빠 모습만 아는 우리에계 커다란 충격을 주었다. 데모는 대학생들만의 전유물인즐 알았기 때은이었다.

5월 2l일날 아침. 우리 다섯 식구가 함께 했던 마지막 아침밥이 기억난다.그때 오빠는 밥을 먹는등 마는등 하더니 온다간다 말도없이 나가버린다. 그것이 오빠의 마지막 길일 줄 알지 못했다. 점심때쯤 햇볕이 내리비추는 베란다에 나왔다. 난데없이 참새 한마리가 우리 집 주위를 뱅뱅 도는 것이었다. 자주 있는 일이라 그냥 무심히 넘겼다. 그런데 잠시 눈을 판 사이 찹새가 안보였다. 이리 저리 두리번거리다가 나는 그 참새가 현관

문 앞에서 죽어있는 것을 보았다. 아까 까지도 생생하던 참새가 자세히 보니 날개는 퇴색되고 꽁꽁 말라 있는 것이었다.하도 이상한 기분이 들어서 엄마를 부르려 했는데 엄마는 목욕탕에서 빨래를 하고 계셨다. 누가 참새를 싸서 버렸는지는 잘 기억이 안나지만 아좋튼 온 몸이 말라서 죽어있던 그 참채 모습은 아직도 생생.하다.

그로부터 30븐이나 지랄을까,날카롭게 대문벨소리가 울렸다. 아니 날카롭다는 표현은 맞지 않고 요란하고 다

급한 벨소리였다. 내가 나갔을 때, 오빠의 친구라는 사람이 한 손에 쪽지를 들고 "여기가 전영진이 집 맞죠7" 했다.가슴이 덜컥 내려 앉는 느낌이었다 '전대병원"과 '증태"라는 말이 귓가에서 뱅뱅 돌았다. 엄마는 감던 머리를 수건으로 싸매고 흔이 나간 사람이 되어 전대병원으로 뛰어가셨다. 그려나, 그날 저녁 오빠는 전대병원에 없었다. 피가 마르는 것 같은 하룻밤을 보내신 부도님은 날이 새자 곧장 종합병원 순례에 나섰다. 해가 기을무렵 아버지가 오셨다.두 눈은 움푹 꺼지고 안색은 때우 안좋았다. 마루에 앉아 아무 말씀도 안하시고 담배만 피우셨다. 나는 차마 아버지께 물어볼 용기가 나지 않았다. 눈길을 돌리는데 아버지 와이셔츠 자락에 길다란 핏자국이 묻어 있는 것이 보였다. 나는 그것을 보는 순간 모든 상황을 깨달았다. 그것은 채 식지 않은 오빠의 피었고, 아버지는 손수 오빠에게 염을 하고 입관까지 하시고 오시는 길이었던 것이었다. 아들의 시신을 자신의 손으로 염하던 그 절통한 아버지의 심경은 눈물없이는 헤아릴 수가 없었다. 엄마는 생전의 오빠 방에서 통곡하시다 혼절하시고말았다. 우리 집에 있는 방 중에서 유일하게 보일러가 들어가지 않는 곳이 바로 오빠 방이었다. 오빠는 고3이라하여 추운데서 공부해야 한다고 고집을 부렸고.엄마는 오빠가 대학에 가게되면 좋은 집으로 이사해서 따뜻한 방에서 재울 생각을 염두에 두시고 굳이 그 고정을 꺽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나 모들 것은 물거품이 되고. 아들을 추운 방에서 고갱시킨 일이 엄라에게는 두고두고 한이 되었다.

나는 가끔 오빠가 죽는 모습을 생각할 때가 있다. 트럭을 타고 계엄군이 장악한 도청으로 항하고 있을 때 도청 옥상에서 M16 총신이 오빠를 향하는 도습이 마치 사진처럼 뚜켯하게 보인다. 총알이 오빠의 관자놀이를 관통하였을 때 낯익은 아스팔트 위로 피 쏟으며 꺼꾸러지는 오빠의 모습. 그 생각은 슬로비디오 화면처럼 내 머리를 떠나지 않는다. 기독교병원 영안실에서 오빠의 시신을 찾았다는 아버지는 오빠의 얼굴은 으깨어지고 짓뭉개져 도저히 구분할 길이 없는데.양말과 바지가 오빠의 것이어서 찾았다는 것이었다. 아아 몸서리치는 오빠의 주검. 그러나 나는 오빠가 총을 맞는 순간 즉사했으리라는 생각에 죽음에의 고통이 없었다는 것을 차라리 큰 위안으로 삼는다.

나는 오월에 관계된 사진을 볼 때마다 두렵다. 사진전에 걸려 있는 저 참혹한 시신이 혹시 오빠의 모습이 아닌가하는 무서운 상상이 나를 괴롭힌다. 모진 세월은 자꾸 흐르고 맞기지 않였던 오빠의 죽음은 기정사실이 되었다. 망월동 언덕을 오를 패마다 마음은 천근만근 착잡해 온다.묘비를 부등켜 안고 울부짖는 엄마를 보는 일은 살을 에는 아픔이다. 그러나 언제까지 원한과 슬픔을 가지고는 살 수 없다.

오빠의 죽음이 헛되지 않게 부모님의 의지적인 모습만큼 나의 삶 또한 치열해야 한다는 것을 나는 명심하고 있다. 언젠가 오빠의 무덤 앞에서 우리 가족 모두가 활짝 웃을 수 있는 날이 올 것이라고 믿는다.꼭꼭 그날은 오고야 말 것이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