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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2007-05-30

[월간지 관련기사] 광주항쟁관련 김형영씨 '권련의 방치'속에 끝내 숨져(국민신문, 1988, 5)

본문

광주항쟁 관련 김형영씨

권력의 방치'속예 끝내 숨져



"원수놈의 가난때문에 자식을 죽인 어미의 심정을 누가 알아 주겄소!천갈래 만갈래 찢어지는 이 심정을 ‥라는 말만을 되뇌이며 당신보다 먼저 간 아들의 원통한 주검 앞에 어머니는 아예 넋을 잃고 있었다.

지난 11월 7일 애중원(무안군 삼향면 유교리 수재. 정신요양원 사회복지법인)에서 80년 5월19일 조대앞에서 공수부대 의 폭력에 의한 부상으로 극심한 정신분열을 앓던 김형영 (당시 조대공전1년)씨 가 28세 의 아까운 나이에 세상을 등졌다.

5월 19일 지산동에서 공수부대와 맞서 싸우다 무자비한 곤봉세례와 군화발에 의해 머리(정신이상),허리 (신경통),팔(골절) 등에 부상을 입었다.부상후 형이 (교육)공무원인 관계로 5·18 관련 부상자라는 것을 알리지 못하고 자가 치료를 통해 회복하려 했으나 정신이상과 신체적 통증이 심해지자 85년 3월부터 순천향병원,나주굴깁뇌병원.광주 윤창범 신경정신과 등지를 전전하였고 송광사 등의 암자에서도 수차례 요양을 하였으나 고치지 못했다.결국 엄청난 병원비를 감당할 수 없어서 88년3월 24일 국고에서 보조되는 애증원에 입원한지 9개월 만에 사망했다.

애중원은 270여명의 환자들이 2평반-3평짜리 방에 8명씩 수웅돼 있고(원장은 1방에 2-3 명 수용돼 있다고 하나 실제로는 그렇지 못함) 정부에서 한달에 7백만원씩의 국고가 지급되는데, 위생시설이나 부식의 상태가 양호하지 못한 실정이다. 원칙적으로 환자측은 경제적 부담을 지지 않아도 되는데 애중원측에서는 사회 복지법을 위반하면서 '간식비'란 명목하에 입원비를 받고있다- 김형영씨 가족에게서도 30만원을 받았다고 원장 이원식씨는 시인했다.

김씨의 가족에 따르면 9월중의 두차례 면회시 구타당한 혼적이 역력했고(지금도 귀뒤의 상처가 남아있다). 사망 1주일 전부터 김 씨 가 복통을 호소했음에도 불구하고 애중원측은 규칙을 무시하고 의사의 진료와 처방 없이 소화제와 변비약만을 투여해 왔다고 한다. 사후, 사채 부검 길과 복막염으로 발혀졌는데 이 때 즉시 치료했다면 충분히 살릴 수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이 외에도 김씨의 죽음에는 몇 가지 의문점이 발견된다. 먼저, 사망 하루전인 11월6일 복통을 일으켜 혈압 등을 재어보니 혈압에는 이상이 없었으나 호흡, 맥박에 이상이 있었던 것으로 밝혀졌다. 그러나 애중원측에 서는 즉시 조치를 취하지 않았다.원장은 이에 대해 자신들로서는 최선을 다했으며, 도덕적 경제적 책임을 질 수 있어도 형사상의 책임은 질 수 없다고 주장하고 있다. 둘째,애 중원측이 발표할 사망시간(오건 5시경) 후 3시간이 지나서야 가족들에게 연락을 했다는 점이다. 그 이유에 대해서도 원장은 가족의 연 락처가 바뀌어서 그랬다고 하고, 생활부장은 가족의 연락처가 기록된 서류가 사무실에 있어서 사무실 직원의 출근을 기다리다 늦었다고 서로 엇갈린 진술을 하고 있다. 세째,사체가 12시간이 채 지나지 않았는데도 등, 엉덩이, 손발이 심하게 부패되 었다는 점이다.

경찰쪽에서는 11월 7일 오후에·유가족으로부터 신고를 받고, 여러가지 의혹이 발견됨에도 불구하고 부검후 국립과학수사 연구소의 결과만을 기다리고 있다. 통상적으로 국립 과학수사 연구소의 감정서가 나오러면 연15-20일이 소요되는데 그때까지 손발을 묶고 있겠다는 말밖에 되지 않는다.

현재 고인의 유해는 전대 병원 영안실에 냉동돼 있고 빈소도 마련되어 있다.김씨의 사망이 이러한 여러가지 의흑을 담고 있어 5 · 18광주민중항쟁부상자동지회는 (고인 은88. 5훤 추가접수시 신고, 회원가입) 광주전남 최루탄부상자험의회, 시민자발투쟁위원회 등에서는 제 단체와 공동대처 하여 "5월투사 고 김형영동지 사인규명 및 장례위원회"를 구성, 사인을 반드시 규명해야 한다는 입장을 보이고 있다. 특히 그가 광주민중항쟁의 주역으로서 5. 18당시 공수대원의 폭력에 의해 정신분열증세를 일으키게 되고 결국 죽음까지 이르렀다는데 많은 사람들은 분노하고 있다.

최근 광주민중항쟁의 진상규명 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드높아지면서 학살진상과 항쟁의 주역들이 어떻게 살아가고 있는가에 대한 관심도 증대되고 있다. 사망자는 차지하고서라도 부상자의 경우 과거 8년동안 '폭도'라

는 오명을 뒤집어 쓰고 병든 몸과 생활고에 시달려 왔다. 끝내 김형영씨처럼 정신분열증, 고통의 후유증에 쓰러져 간 사람이 어디 한둘이겠는가 !

결국 김형영 씨의 죽음으로 군부독재권력이 광주민중항쟁 부상자치료를 방치함으로으로씨 진상은폐와 조작을 계속해 왔음이 이제는 확연해진 것이다.

다시는 오빠와 같은 억올한 죽음은 없어야 하고 그러기 위해서는 정확한 사인규명과 애당초 오빠를 고통속으로 몰아넣었던 자들에게 그 고통 그대로 돌려주는 것 뿐이라고 말하는 동생 김형미(22세)씨는 김헝영씨 빈소를 바라보며 "오빠에겐 8년이나 간악한 자들의 살인만행이 계속됐다"며 오열을 터뜨렸다.

5월 가족들의 절규 미국놈들 물러가라"

.18광주민중항쟁 국회청문회를 앞두고 학살의 주범 전두환씨의 증인채택여부에 대해 가타부타 말들이 오가고 있던 지난 6월 5월단체(5.18 유가족회. 5.18 광주민중항쟁 부상자동지회, 5.18 청년동지회, 5.18행방불명자회 )들은 다시 금 5월 학살자들의 양심을 강타하는 투쟁을 전개 하였다.

이날 오후 4시 30분, 카톨릭 센타에서 정기월레회를 마친 5일단체 회원 100여명은 5월영령들의 피맺힌 한들이 8년이 지난 지금까지 진상규명조차 이루어지고 있지 않음을 분노하며 '광주학살 진상규명 학살원홍 처단'이 조속히 이루어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