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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2007-05-30

[월간지 관련기사] 5월의 분수대, 그대 다시 살아오는 목소리여/박관현 열사(국민신문, 1988. 5)

본문

5월의 분수대

그대 다시 살아오는 목소리여

국민신문 1988년 5월 2D일 발행



5.18 광주민중항쟁과 박관현 열사

사람들은 5· 18광주민중항쟁을 떠올리는 한 인물이 있다.도청앞 광장, 그리고 거기 원형거리로 연상되는 저 금남로를 바라볼때,사람들은 80년 항쟁을 연상하고 한 인물을 그려낸다.

광주 뿐만 아니라 도시건 농촌이건 할 것 없이 광주항쟁을 말하는 곳에서 분명한 인물이 등장한다.그는 박관현이다. 당시 전남대 총학생회장이었던 청년 박관현이다. '82년10월 12일 체포되어 광주교도소 독거감방에서 민주주의와 민족통일의 염원을 불태우며 군부독재에 대항 50여일 동안 단식항쟁하다 죽어 간 박관현이 다.5.18광주항쟁으로 수많은 광주의 시민 학생들이 5· 17계엄군부에 의해 죽었다.이미 확인된 희생자를 포함 대략 2000여명 정도가 5월18일-27일 사이에 죽어갔다고 한다. 이 많은 희생자,전사자 가운데 박판현의 죽음은 돋보이고 가장 대표적인 죽음으로 사람들에게 알려져 있다.도청앞 광장 그리고 분수대 광주시민의 대동맥 금람로와 함께 박관현이란 이름 석자는 5월의 상직이 되어버렸다.

제가 전남대학교 총학생회장 박관현이올시다.(박수와 함성). 이 우뢰와 같은 박수와 여러분의 함성이 대한민국 방방곳곳에 다 들릴 수 있도록 큰 소리로 외쳐봅시다.(우뢰와 같은 함성).우리가 민족자주화 햇불행진을 하는 것은 아니라 민주주의의 꽃을 피우자는 거시오 이 횃불과 같은 열기를 우리 가슴 속에 간직해. 남북통일을 기원 하는 뜻‥‥‥‥

이것은 80년 5월16일, 도청앞 광장에서 당시로서는 최고를 이룬 5-6만의 청년학생, 시민이 운집한 가운데 진행된 '민족민주화 횃불행진'을 앞두고 횃불행진의 의의를 밝히는 박관현의 연설내용의 일부이다. 이날은 14,15,16일 연3일동안 이어진 시가행진과 도청앞 광장 집회의 마지막을 장식한 야간 횃불행 진이 었다.청년학생 시민들은 열광했다. 박관현이 등장할 때마다, 연설의 한부분의 끝날 때마다 도청이 떠나갈듯한 함성과 박수를 보냈다.

이 연3일동안의 도청앞 광장 집회와 시가지 시위는 위력적이였으며 진압결찰이 열세를 면치못해, 청년학생시민들은 시내를 거의 장악했다. 그러면서도 시가지 시위와 도청앞 집회는 질서정연했다. 평화적잉ㅆ다.

당시의 구호는 '계엄해제, 정치일정공개 전두환 퇴진, 노동3권 보장, 농민권익 보호, 구속자석방' 등이 었다. 10 · 26박정희살해 사건 이후 12 12 군부쿠테타를 통해 전두환·노태우를 중심으로 한 군부가 배후에서 권력을 장악했으며, 민주화를 갈망해온 민중들은 어서 빨리 빠른 시일 내애 공정한 선거가 이루어져 민주정권이 수립되기를바랬다. 민중민주세력들은 10 · 26이후12 · 12쿠테타세력의 음모가 틀림없이 도사리고 있다고 판단 5월에 접어들어 투쟁없이 민주없다며 민주화투쟁을 주장했으며, 노동현장은 폭발하기 시작했다.

5월 중순. 학생들은 경향각지 할 것 없이 거리로 나왔으며 모두 충분한 요구를 했다고 판단했다. 광주 ·전남지역의 학생운동온 그 어느 지역보다 결집된 모습을 보여주었다. 도청 앞 연3일 동안의 대중집회와 시위로 박관현은 일약 '인물'이 되었다.

그는 분수대 연단에 오를 때마다 열번을 토했고 탁월한 연설을 했다. 그는 천성적인 대중연설자였다. 그의 목소리와 주장은 분수대 위의 그 누구와도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뛰어난 것이었다.시민적 요구, 민중적 요구를 그가 외칠 때마다 함성과 박수를 보냈다. 학생들,시민들은 말그대로 열광이었다. 도청앞 광장은 열광의 도가니였다. 박관현이란 이름은 입과 입을 통해 바람을 타고 전 시민들의 귓속에 전달되었다. 바로 민주화의 화신이 된 것이다. 사람들은 박관현이란 인물을 보기 위해, 그 연설을 듣기위해 16일 도청앞 광장에 집결한 것이다.그래서 박관현은은 연설의 서두에서 제가 전남대학생회장 박관현이라고 자신있게 소개한 것이다.

당시 광주지역 운동은 지금과 비교 할 수 없을 만큼 취약했다. 민주민중운 동단체들은 미미했으며, 조직도 거의 없었다. 때문에 전남대학생 박관현의 등장은 다른 모든 부분을 압도하고 시민들의 의식 속에 띤족 민주의 화신으로 각인된 것이다.

'만약 계엄령이 확대되면 학교 정문 앞에서, 도청 앞 광장에서 투쟁할 것'이란 광주 학생 시민의 공동약속을 남긴 채, 정부의 입장표명을 듣기 위한 순서 였다. 5 · 17 조치와 이어 10일간의 항쟁이계속되었다. 민주인사 학생지도부가 대거 연행되었지만 광주의 학생시민들은 거리로 떨쳐나왔다. 항쟁이 시작된 것이다. 전두환 노태우 계엄군부는 민주화의 열광적 요구를 총칼로 받아드렸고, '광주'는 여기에 대항한 것이다.

박관현은 연행을 피해 은신했다. 그리고 가슴 찢어진는 고통을 감내하며 죽음을 넘어선 시민항쟁을 단지 멀리서 지켜보았다.그러나 항쟁 현장에서 박관현은 시민 학생들의 의식 속에 살아 있었다.연행되었다가 죽었다, 연행을 피해 밀항했다, 죽여서 바다에 버렸다'는 등의 유언비어가 광주전역을 휩쓸면서 시민들을 분노케 했고, 항쟁이후에 계엄군부는 5월항쟁 보복의 차원에서 그를 찾았으며, 유언비어는 계속되었다. 유언비어는 정상적 언론으로 민중들의 입과 입을 타고 흘러다니는 것으로 민중의 염원이 담겨져 있는 것이다.

'82년 10훨, 은신처에서 체포당한 박관현은 군부독재의 감옥에서 목숨을 잃었다.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었다. '87년, 5주기를 기해 유해마저 군부독재에 빼앗겼던 그를 비로소 '망월동 5월묘역'으로 장사지냈다.

망월동 5월묘역, 지금 경향각지의 참배객들 앞에 박관현은 그의 묘비명처럼 5월광주의 아들로 누워있다. 바로 그 아래 쪽에는 그가 가장 존경했던 선배로, 항쟁현장을 지키다 전사한 윤상원(묘비명 윤개원)열사의 묘도 있고, 동지 후배였던 박용준열사의 묘도 있다. 또한 그의 가장 사랑했던 후배이며 '82년 그와 함께 단식항거 때의 치명상으로 인해 금련 5휠 9일 숨진 신영일 투사의 묘도 있다.

참으로 아깝고 슬픈 광주의 죽음들이다. 5 18 항쟁, 8주기, 님들이여 편히 쉬소서.

(편 집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