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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2007-05-30

[월간지 관련기사] 5월항쟁의 주역은 누구인가?(말, 1988. 5)

본문

5월 항쟁의 주역은 누구인가



80 년 5월 광주항쟁은 한국 현대사에 있어서 분수령을 이룬다. 광주를 통해 한반도를 뒤엎고 있는

외세와 이에 예속된 권력은 껍데기를 벗고 본질을 드러냈다.

광주는 한국사의 ㅂㄹ전을 가로막고 있는 세력들을 극복하는 훤동력이 민중으로부터 나올 수 밖

에 없음을 실중해 주었다. 그러나 광주항쟁의 주체에 대한 과학적인 분석은 제대로 이루어 지지 않

았다. 이 글은 이를 위한 하나의 시론이다.

전남 및 광주지역의 특수성

아래 통계표를 읽기 전에 광주항쟁 당시 전남 및 광주지역의 특수성을 간단히 언급할 필요가 있다.박정권에 의해 강력히 추진된 대외의존적 근대화 정책은 국내자본의 매판화를 더욱 가속화시키면서 계층간의 불균형을 더욱 심화시켜 나갔다.특히 전남지역은 박정권의 지역편향개발정책에 의해 식량공급기지로 규정됨에 따라 타지역에 비해 불균형의 모습이 더욱 뚜렸하게 나타났다.

현재 전남지역은 GN를 기준으로 농업 38%,공업 19%의 비중을 나타내고 있는 바, 이는 전국평균 농업18% 고업39%와 비교할 때 심각한 역전현사을 보이고 있다.

또한78년 현재 전체 사업체수 중 서을·경기.부산 등 4개 시도가 75.2% 전체근로자수 76%를 차지하고 있는데 비해 전남지역은 각각 4.6%, 3.3%에 불과해 엄청난 지역적 불균형을 단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임금의경우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이다. 79년 현재 전국평균임금이 7만 4천73원인 데 비해 전남지역 평균임금은 3만5천2백원으로 전국 평균임금의 절반에도 못미치고 있는 실정이다.

이와같이 전남지역은 타지역보다 형편없는 경제여건에 처해 있었을 뿐 아니라, 이 지역 노동자들의 정치의식이나 대중조직화의 정도도 상당히 낮은 수준에 머물고 있었다.

그런나 다른 한편에서는 농촌을 등지고 도시로 홀러들어온 노동력과 도시지역에서 임노동자로 흡수되지 못 한 많은 노동력이 도시빈민으로 존재하면서 취업상태, 혹은 실업자로 넓게 분포되어 있었다.따라서 이들이 사회 · 경제적 불만과 사회개혁에의 강한 욕구를 지니게 된 것은 당연한 이치였다.

반면 그 당시 농촌지역은 계속된 농업희생정책으로 농가경제는 철저히 붕괴되었으며,농업부문의 비중이 타지역에 비해 상대적으로 높은 전남지역에서는 저임금 · 저곡가로 전개되는 수탈체제의 모순이 전역에 걸쳐 집중적으로 나타나게 되었다. 이에 비례하여 전남지역 농민들의 정치의식의 성숙과 농민운동의 활성화는 타지역보다 높은 수준에 이르고 있었다.

바로 이점이 80년 5왈 광주민중항쟁이 광주를 넘어 전남지역으로 확산되는 중요한 계기가되었다.

노동자 농민세력이 주체세력

그러면 위의 통계표에서 화인할 수 있는 중요한 몇가지 부분을 짚어 보기로 한다.먼저 경제적 지위에 있어 최하층이라 할 수 있는 노동자·농민 부분 (①+②+③)이 전체적으로 압도적 다수인 약 60%를 차지 하고 있다.

이중에서도 영세중소기업의 저임노동자, 즉 양화공 보일러공· 미장공 식당종업원 ·노점행상등에 종사하는 노동자 ·빈민이 주류를 이루고 있다. 제조업에 종사하는 노동자가 상대적으로 적게 나타나는 것은 전술한 바와 같이 전남지역의 일반적 특성과 함께 광주지역이 소비중심도시로서의 성격이 강하게 반영된 결과이다.

80년 당시 광주의 제조업 취업인구는 18.9%로 매우 낮게 나타나고 있으며,사업규모도 극히 영세하여 대기업 수준에 있는 것이라곤 아시아자동차와 호남전기 정도에 머물고 있다.

0특히 운전기사가 한 항목으로 당당히 자리잡고 있다. 이것은 직업의 기동성으로 인해 그 당시 공수대원의 잔인한 진압광경을 가장 많이 목격했으며, 부상자들을 병원으로 후송하는 과정에서 투쟁성이 촉발된 데 기인한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운수업종사 노동자들의 열악한 근무조건 · 저임금에 대한 불만등이 다른 요인과 상호 상승작용하면서 그들로 하여금 항쟁의 대열에 앞장서게 하였다.

*부상자 구속자 통계는 「전남사회운동협의회」(198i년)가 확인한 명단중 직업이 확인된 자에 한해 이루어졌다. 단 구속자는 항쟁 지도부. 기동타격대, 일반시위대 그리고 나주 . 영 암.목포·해남 ·화순·무안 지역에서 투쟁하다 구속된 사람으로 이루어졌다.

卄 사망자 통계는 80. 5. 31 계엄사령부가 발표한 사망자 명단 중에서 직업이 명기된 자에 국한시켰음.

*한편 농민이 7.6%에 이르고 있음은 광주항쟁이 광주지역뿐만 아니라 전남 전지역으로 확산되었음을 통계적 으로 증명 해주고 있다.

●대학교수·교사·변호사·언론인·의사. 정당인·신부·목사,즉 지식인 부분(10+11+12+13+14)이 군의 통제하에 있는 방위 병보다도 적은 수치를 나타내고 있다.

이것은 한국사회에 있어 실천적 의미의 인텔리겐차 부재현상을 여실히 보여 주는 대목이다.80년 봄, 민주화의 주역임을 자처하던 소위 '민주인사'들은 광주가 해방되던 5월 22일에사 광주도청에 나타났다. 이들은 제1차시민수습위 (투항파)를 구성하여 투기반납에 앞장서는 등 기껏해야 계엄군의 헙상창구를 담당하는 것으로 그들의 역할을 마감했다.

특히 대학교수,성직자 부분이 통게에 전혀 나타나지 않은 것은 광주항쟁이 작년 6월항쟁과는 달리 무장항쟁으로 전개되는 긴박성을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 2차대전 당시 프랑스의 교수 성직자들이 총을 들고 레지스탕스에 대거 참가한 사실과 좋은 대조를 이룬다.

●학생(7+8)부분이 24.7%나 차지하고 있어 일제하 팡주학생운동의 끊임없는 부활을 보는 듯하다. 이는 당시 광주인구의 39%가 학생임을 감안하더라도 적은 수치는 아니다. 왜냐하면 노동 ·농민부분(60%)을 뺀 모든 계층을 망라하여도 학생부분보다도 적기 때문이다.

*특기할 만한 것은 초중고생(재수생 포함)이 대학생보다 투쟁성에 있어 앞서고 있다는 점이다(14%.10,7%). 구속자수에 있어서는 대학생수가 초중고생수 보다 많으나, 부상자 · 사망자수에 있어서는 초중고생이 대학생을 훨씬 압도하고 있다는 점만 보아도 그렇다. 이것은 근접전이라는 치열성에 있어 초중고생이 단연 뛰어나다는 것을 말해 준다.

그러고 대학생 부상자 55명 중 11명이 의대생이라는 사실은 그들이 헌신적으로 적십자활동에 참여했다는 것을 됫바침하고 있다. -

*통계에 나타나 있지는 않으나 국민학생을 포함한 19세 이하의 사망자수가 31%에 달한다. 이것은 계엄군이 양민을 무차별 학살했음을 증명해 주고 있다.

위에서 간략히 살펴본 바와 같이 광주민중항쟁은 노동·농민·빈민 부분을 주력으로 하여 막강한 국군과 투쟁해나간 무장항쟁이었음을 우리는 분명히 확인하였다. 또한 항쟁 기 간 동안 무정 부상태 속에 서도 고도의 치안질서가 유지되었다는 것은 그들의 높은 도덕성을 단적으로 드러 내주고 있다.

우리는 여기서 계급간의 차별성을 글이 강조할 필요를 느끼지 않는다. 다만 5.18이 '광주민중항쟁'으로 불리어 지기를 갈망하는 이 나라 대다수 민중의 요구가 정당하다는 것을 새사 확인할 뿐이다.광주민중항쟁에 시민군으로 끝까지 싸우다 부상당한 어느 사람은 그것을 이렇게 단적으로 표현했다.

"광주를 소재로 소위 문학을 한다는 사람들, 광주로 인해 민주인사가 되어버린 사람들, 오월가를 부르며 광주를 얘기하는 지식인들에게 묻고 싶다. 그들은 어디에 있었는가? 1980년 5일 27일 죽음의 새벽 에 ‥‥ 우리는 결코 그들을 믿지 않는다. "

살아남기 위해 숨어 있었다는 것만으로 우리는 그 어느 누구도 비난할 수는 없다. 고러나 철저한 자기 반성 속의 겸허한 자세로 오일의 광주와 직면할 때만이 우리는 '내일의 광주'를 정착히 펙뚫어 볼 수 있는 것이다.驟