찾고 있는 키워드를 검색해보세요.

DRAG
CLICK
VIEW

아카이브

온라인 자료실

작성일2007-05-30

[월간지 관련기사] 옥중시인 김남주 누구인가. 손동우(월간경향, 1988. 5)

본문

옥중시인 김남주

월간경향.1988.5.

「南民戰」사건으로 구속, 15년형을 받고 9년째 수감중인 옥중시인 金南柱-. 아직 그의 신체는 복권되지 않아 不自由의 쇠창살 솔에서 바깥을 응시하고 있을 뿐이지만, 그의 諱는 입과 입을 타고 自由의 창공을 훨훨 날아 다닌지 이미 오래다. 88년 국제 펜(PEN)대회를 앞두고 그의 석방이 초미의 文壇 관심사로 되고 있는지금,그의 삶의 궤적을 환전 추적했다.

「南民戰」의 戮中詩入

이 두메는 날라와 더불어

꽃이 되고자 하네 꽃이

피어 눈물로 고여 발등에서 갈라지는

녹두끝이 되자 하네.



이 들판을 날라왁 더불어

불이 되자 하네 불이

타는 들녘 어둠을 사르는

들불이 되고자 하네



되자 하네 되고자 하네

다시 한번 이 고을은

반란이 되자 하네

靑松緣竹 가슴으로 꽃히는

죽창이 되자 하네 죽창이

(「노래_1중에서)

한 獄中詩入의 노래소리가 드높게 을려 퍼지고 있다. 민족 ·민중 해방을 부르짖는 그의 열정적 誇行들은이미 오래전부터 대학가의 大宇報에 자리하기 시작했고 사랑과 희망의 소중함을 일깨우기도 하는 따사로운 운율 또한 많은 독자들 가슴 속에 꽃혀 그의 두번째 시집 『나의 칼 나의피』를 베스트셀러의 반열에 올려 놓았다.

金南柱-. 그 혹독한 維新體制가 허물어지기 직전인 지난 79년 10월초 이른바 南民戰사건의 주범으로 9년째 쇠창살 부여잡고 바깥을 응시하고 있는 저항시인 金南柱. 단순히 뛰어난 시인 이상으로 일반의 폭넓은 관심을 모으고 있는 그는 세상에 몸을 드러내지 못함으로 해서 그 어떤 신비감마저 풍기고 있는 것 같다.

金南柱는 1946년 10월 16일 全南 해남군 三山면 봉학리 535번지에서 아버지 김태수씨(79년 作故)와 어머니 文一任씨(73)의 3남3녀 중 세째로 태어났다.

위로는 형 南植씨(50)와 누나 南禮씨가 있고 아래로는 여동생 脚頓씨(40)와 德鐘씨 (36·海南기독교농민회회장)및 막내 여동생 淑子씨 (36)가 있는데 나머지 형제들은 모두 출가했고, 德鐘씨만이 고향집에서 노모를 모시고 살고 있다.

그가 태어난 곳은 곳은 兄弟峯, 飛山등 빼어난 산들이 병풍처럼 마을을 둘러서 있고 논과 밭이 그 사이에 펼쳐져 있는 전형적인 南道의 농촌이었다.

그의 조상들은 完島에서 살았으나 6대조때 이곳에 이주해와 일가를 이루었다.그의 선친은 원래 머슴이었으나 자신이 일하고 있던 집의 딸과 결혼하게 되었는데 그것이 허락된 까닭은 '하도 노동력이 대단하고 일을 잘했기 때문'이었다고 한다. 살림을 차린 후에도 일을 게을리 하지던 그는 한때 60마지기라는 논을 장만, 일대 에서 제일가는 부농이라는 소리를 듣기도 했는데, 그것으로 金南柱가 대학가지 다닐 수 있었다. 내성적이고 온순한 시골소년이었던 남주는 국민학교 입학전 수강생들이 대부분 성인이었던 서당에서 한문을 배웠는데 항상 首席을 차지한데다, 때로는 배우지 않은 부분에서도 척척 대답을 잘해 혼장의 사랑을 독차지했다.

그의 가족과 친구들은 이때 습득한 한학에의 소양이 훗날 시를 쓰게 되고 6개 국어를 구사할 수 있는 어학적 재능의 기초가 됐을 것이라 말하고 있다.

국민학교 시절 南柱는 6년 내내 우등상및 백일장대회를 쉽쓸어 집안의 희망으로서 부모 친지들의 큰 기대를 한몸에 받았다. 특히 어머니의 그에 대한 사랑은 지극해 때로는 형제들의 시새움을 받기도 했다.



총칼의 숲에 싸여

눈감고 아웅하는 꼭둑각시 놀음

나는 나의 최후를 놈들의

법정에서 장식하고 싶지 않았다.



놈들이 원했다면 나는 놈들의

총칼앞에 무릎이라도 꿇었으리라

그것이 혁명에 도움이 된다면

놈들이 원했다면 나는

허리굽혀 놈들의 발밑에 엎디었을지도 모른다

그것이 동지의 안전에 도움인 된다면

중요한 것은

살아남는 일이 었다 살아남아 대 지와

민중의 가슴에 뿌리를 내리고

다시 한번 사랑을 껴안는 것이었다

보기 흉한 패배

옛 상처의 무기에 입맞춤하고

(「내 제일의 벗 鋼에게」중에서)

역사와 세계에 눈을 뜨고

국민학교를 졸업한 南柱는 읍내의 海南中에 진학했는데, 중학교 입학은 그의 삶에 큰 의미를 갖는 것이기도했다. 일생을 통한 절친한 죽마고우이자 이념적 동지가 된 李鋼과의 만남이 바로 그것이었다. 중학교 이후 두사람은 고교 ·대학시절은 물론 훗날 南民戰사건에도 함께 연루되어 투옥되는 등, 분신처럼 붙어다녔다.

金南柱와 李鋼은 학창시절 및 민주화 투쟁기간을 통해 너무 서로에 열중해 서로 '단1명'의 친구밖에 못 사귀 었을 뿐 아니라 혈육보다 더 강렬한 交感을 주고받았는데, 주위사람들로부터 '동성연애자'라는 부러움과 시새움이 엇갈린 말을 듣기도 했다. 둘은 입학 등록금을 늦게 내는 바람에 키가 작은데도 뒷자리에 앉게 되어 급속도로 가까워졌다.감수성이 예민한 두 중학차생들이 역사와 세계에 대한 눈을 뜬 것은 이들이 2학년이 되어 세계사 담당교사인 하대성선생을 만나면서부터였다.

하선생은 입시위주의 강의에서 벗어나 로마시대의 유명한 연설가들의 연설문전문을 제자들에게 낭독해 주기도 했는데 틈만 나면 '역사공부는 年表를 암기하는 것이 아니라 역사와 인간에 대한 안목을 키우는 것'이라 강조했다.

또 당시 朝鮮大에 재학중이던 金鳶柱의 형 南植씨도 주말이나 방학때 집에 을때마다 동생을 앉혀 놓고 '의식화'를 시켜버린 金南柱의 성숙을 도왔다. 李鋼과 단짝을 이룬 金南柱는 중3 때 입시 공부를 한다는 명목으로 읍내에 그와 같이 하숙을 하게 됨으로써 '완전한 한몸'이 될수 있었다.

하꾹생촬 도중 그들은 '사유재산제'를 완전철폐, 철저한 공동체적 삶을 꾸려나갔다. 참고서도 공동구입 및 공동열람을 하면서 공부했고 빵 하나 사과 하나도 정화하게 반을 쪼개 분배했다.

영어참고서에 나와있는 '아침의 사과 한알, 달걀 1개, 우유 1컵은 평생의사를 멀리하게 한다'는 문장을 생활 속에서 실천하기로 한 두 소년은 매일 아침 이것으로 밥을 대신했으며 한꺼번에 구입 한 '主食'인 사과 1상자가 폭삭 썩어버려 얼마 동안 굶기도 했다.

金南柱의 영어실력은 이미 중3때는 짧은 단편소설을 죽죽 읽어나가는 경지에 이르러 동급생들의 부러움을 사기도 했다. 金南柱는 李鋼과 함께 光州고등학교에 응시했는데 金南柱만 낙방의 고배를 마셨다. 해낭 수재 金南柱로서는 최초의 좌절이었다. 李鋼은 "당시 학교성적은 남주가 훨씬 나았는데 이상하게도 결과는 바뀌어져 버렸다"고 술회했다.

그러나 金南柱는 조금도 실망이나 좌절의 빛을 밖으로 드러내지 않았다. 오히려 약간은 미안해하고 걱정스러워하는 李鋼의 등을 두드려 주며 껄껄 웃어버렸다.

'학교에서 더 배을 것 없다'

이듬해 그는 별로 열심히 공부하지도 않고 호남 제1의 명문인 光州-高에 너끈히 합격, 1년전의 패배를 설욕했다.

一高에 입학한 金南柱는 대학 입시위주의 학교교육에 별다른 흥미를 느끼지 못하고 독서와 李鋼과의 교유에만 열중 했다. 그는 한곳에 진득하게 눌러있지 못하고 길어야 두달만에 하숙집을 옮기곤 하는데, 그것도 하숙집에 머물러 있는 일은 거의 없이 일년중 반이1상을 친구집 (李鋼) 의 하숙방이 대부분이었지만)을 전전하곤했다.

소탈하고 선한 성품의 그였지만 학창시]절의 金南柱는 친구를 사귀는데 있어서는 李鋼 외엑 그 누구도 허용하지 않는 외곬의 일면을 보였다. 따라서 一高 내엔 친한 친구가 거의 없었고 이것이 학계생활을 따2분하고 재미없게 만드는 요인이 됐던 것이다. 등교 하교 ·시험 등의 일체의 규격과 틀은 미래의 시인에게는 생래적으로 맞지 않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중학교 때부터 큰 흥미를 가졌고 두드러진 실력을 보였던 영어만큼은 손을 놓지 쏟아 두꺼운 전기류를 비롯 장편소설에까지 原書를 탐독해 들어갔다.또 李籍에 대해서도 깊은 흥미를 느껴 그의 시 ·산문들을 암송하다시피 읽곤 했다.

64년 韓日협정 반대시위가 전국을 휩쓸 무렴 李鋼이 다니던 光州고교생 2천여명이 도청 앞까지 진출하며 헙정체결을 반대하는 시위를 벌였다. 시위의 주도적 역할을 해냈던 李鋼은 열정에 들떠 김남주에게 이 사실을소상하게 얘기했지만 金南柱는 침울한채 묵묵히 듣고만 있다가 자리이서 벌떡일어나 울분을 터뜨렸다,

"도대체 一高는 뭣들 하는 거야, 책상에 들러 붙어 참고서만 파서 어쩌자는 거야. "

말을 마친 그는 문을 박차고 휑하니 밖으로 나가버렸다. 훗날 말보다는 행동을, 음습한 이론보다는 뜨거운 실천을 통해 현실과 맞부딪쳐 나간 열정의 시인 金南技의 운명을 예고하는 일이었다.

참고서 몇배의 책을 학교 밖에서 읽고 유달리 조숙하며 뜨거운 피를 가졌던 그가 이제 명문학교란 허을 안에서 응크리고 있을 이유는 이제 전혀 없었다.

"이 학교에서 배우는 것은 의미도 없고 더 이상 배울것도 없다"며 입버릇 처럼 말하던 金南柱는 2학년 1학기 때 선뜻 자퇴를 해버리고 말았다. 어느날 담임교사에게 "그만 두겠읍니다"고 말했더니 담임은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쉽게 승락,그의 '창창한' 앞길을 활짝 터주었다.

곧바로 검정고시를 통해 66년 서울대에 응시했으나 보기좋게 떨어지고 말았다. 역시 낙방거사가 된 李鋼과 함께 金南柱는 본격적인 壽修생활을 시작했다.그러나 그는 재수생의 간판만 걸어놓고 대학입시 공부는 뒷전이었다.

李鋼과 함께 光州시내의 古書店을 샅샅이 뒤져 마음에 드는 책을 사서 밤새워 읽는 통, 지식에의 허기를 채우곤 했다.지식에의 허기를 채우곤 했다.고교 때보다 문학에의 흥미를 더욱 강렬히 느낀 그는 특히 러시아 문학에 심취해 고리키,고골리 등의 소설을 즐겨 읽었다.

그러나 그때가지만 해도 창작에는 별뜻이 없었고 문학전반의 이해를 높이려는 지식욕 차원이서의 독서였다. 또 당시 젊은 이들에게 가장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했던 월간 『思想界』도 열심히 읽어 시국전반에 대해 정확하고 심도있게 이해하려 노력하기도 했다,

유달리 감수성이 예민했던 金南注는새로운 책을 한권씩 읽을 메마다 책이 가르치는 인간형으로 바뀌어 '朝變夕改'를 밥먹듯 했다.

사수 끝에 전남대 입학

권위주의를 체질적으로 혐오하고 일체의 틀을 부정하는 그에게 가장 훌륭한 자양분이 되어 준것은 아나키즘이었다. 그쪽의 책은 이미 방대하게 번역이 돼 있었기도 했는데 필요할 경우 그는 日語로 된 아나키즘 서적을 틈틈히 공부한 실력으로 읽어내려가가도 했다.

무정부주의자 중 그가 가장 경도된 인물은 바쿠닌이었다. 바쿠닌에 관한 모든 저서를 빠짐없이 탐독한 그는 때 때로 '바꾸닌的'말투와 행동양식을 李鋼에게 보이곤 했다.

국내문학에도 관심을 느낀 金南柱는 金洙暎과 申東壽의 시를 즐겨 읽곤 했는데, 나중에 그들보다 더 치열한 삶을 살아가리라고는 그 자신도 몰랐다.

金洙談과 申車曄을 통하여 金南柱는 서서히 문학쪽으로 선회했고 李鋼은 실천적 이론 쪽으로 자리를 잡았다. 사실 金南柱와 李鋼은 성격면에서 극히 대조적이었다. 김남주가 열정적이라면 李鋼은 철두철미한 엄숙주의자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둘이 한시도 떨어지지 않은 단단한 사귐을 이룩하였던 것은 대립되는 두개의 인격이 멋무려지는게 조화를 이루며 끊임없이 상호보완을 해나간 탓이었다.

대학입시를 위한 재수는 어느덧 3년으로 접어들었다. 四修生이 된 金南柱는 더욱 학과공부이외의 '課外'에만 열중했는데 워낙 기본실력이 단단해서 인지 69년 全南대학교 영문과에 입학, 3년간의 '입시준비생활'을 종식시켰다. 金南柱가 영문과를 지원한것은 "영어에 자신이 있고 '편히' 학교를 다닐수 있을 것 같아서" 였다. 한편 집안의 장남인 李鋼은 같은해 全南大 法大에 .입학했다.

대학생이 되언서도 金南柱의 생활은 별반 달라진 게 없었다. 무시무시한 독서벽은 오히려 도를 더해갔고 東家食西家宿의 「생활신조」도 계속 '절개'를 지켜 나갔다.

단지 학교에 나갈때 헐렁한 형님 양복을 걸치고 넥타이까지 맨 채 멋을 부리기도 했는데, 한 학기 내내 그 옷만 입어 검은색 양복이 돼버리기도 했다. 또 교수전용 스쿨버스를 자주 이용하기도 해 일부 교수들로부터는 '공부하느라 옷도 제대로 못입는 젊은 강사'로 오인돼기도 했고 교내에서는 많은 학생들로부터 정중한 인사를 받았다.

그러나 金南柱가 대학생활을 통하여 실제로 수강한 과목은 5개 정도에 지나지 않았으나, 일단 수강한 과목은 A학점을 받았다. 등교하면 그는 대학도서관에 틀여박여 해가 저물때까지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사회과학에 開限

영어공부를 즐겨 했고 영문학을 전공으로 택한 그가 미국을 혐오하기 시작한 것은 일견 아이러니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아뭏든 그는 미국인 교수의 수업은 일체 들어가지 않았고 미국의 베트남戰개입을 통렬히 비판했다.

미국인을 한참동안 웃기기도, 심각하게 화를 내게 하기도 할 정도로 막힘 없는 영어를 구사했고, 일본어 독해실력도 수준급이어서 그의 어학실력은 全南大안에서 정평이 나 있었다.

미국유학을 마치고 온 어느 교수의 수업시간에 金南柱는 '外勢'를 등에 업고 이를 과시하려는 얼치기 학자를 혼내주기도 했다. 뉴욕이 어떻고, 스타인벡이 어떻고 미국의 저력은 이러저러하다고 장광설을 늘어놓고 있는 그 교수의 코 앞에서 그는 '후 ·후 ·후'하고 짧게 끊어지는 냉소를 퍼분고 유유히 강의실을 나가버렸

다. 누구에게나 다정다감하고 따뜻한 그에게 숨어 있는 칼날같은 차가움이 밖으로 드러난 순간이 기도 했다.

고민같은 것은 해 본 일이 없는 金南柱에게도 군대문제는 늘 골치덩이 였다. 金南柱는 틈이 있을 때마다 李鋼에게 '군대는 절대 갈수 없다. 차라리 징역에 가겠다'고 말하곤 했다. 제도교육이 라는 굴레도 전혀 인정0하지 않는 그에게 군대는 생각도 할 수 없는 것이었다.

1학년때부터 불기 시작한 3선개헌 반대시위의 바람이 캠퍼스 안을 가득채우자 金南柱는 적극적인 관심을 ,가겼다. 그러나 그때까지 시위의 전면에 나서지는 않았고 '적극적인 심정적 동조'의 차원에 머물렀다.대신 카스트로, 毛澤j訖 체 게바라의 저서 등 '불온서적'에 눈을 돌리는 한편 베트남 민족해방전쟁을 깊이 공부하는

등 사회과학적 인식의 開躁에도 신경을 썼다.

또 황주대단지 사건 전태일 건 등 역사의 격량이 출렁일 때마다 김남주의 나침반은 예민하게 떨리곤 했다.김남주는 이러한 사건들을 하나 하나씩 접함에 따라 인텔리운동의 한계를 느끼고 민중운동의 가능성에 대한 무한한 신뢰와 열정에 빠져들었다.

3선 개헌 반대 시위로 입대한 이강과는 끊임없는 서신교환을 통해 서로의 생각을 주고 받았다.재수시절 그 기본토대를 구축했던 그의 문학에 대한 이해는 대학에 들어와 더욱 심도를 더해갔다.

제임스 조이스,DH 로렌스 ,카프카,사르트르,까뮈의 책 등을 열심히 읽었고 이 천챡,뒷날 그의 시세계에 커다란 그림자를 드리우게 된다.또 판문점 근처 미군부대에 근무하던 이강이 휴가 때마다 부대도서관에서 훔쳐온 좋은 책들도 김남주의 문학세계에 일조를 하게 됐다.

반 유신지하신문 '함성' 제작

또한 김남주에게는 그를 흠모하는 많은 여학생들이 있었다.같은 또래 대학생들보다 훨씬 하는 것이 많고 웬만한 교수들을 능가하는 지식체계를 갖춘 그에게 여학생들은 깊은 호감을 느끼며 그를 따랐다.평소 말이 없다가도 일단 입을 벌리면 톡톡 쏘는 듯한 그의 어투와 모성본능을 유발하는 천진난만함,동서고금을 자유자재로 넘나드는 해박함은 이들을 금방 그의 팬으로 만들기에 족했다. 그러나 단 한 번도 사랑으로 연결된 적은 없었다.금방 속물근성을 들어내는 여학생들에 대해 김남주는 환멸을 느꼈고 너무나 세상을 모르는 지식청년에 대해서 현명한 여학생들은 쉽게 달아나버렸다.

72년 10월은 김남주를 지독한 우울에 빠뜨리게 했다.10월 유신이라는 악령이 그의 젊은 가슴을 짓누른 까닭이었다.김남주는 땅이 꺼져라 한숨을 쉬고 있는 사람들을 보고 큰 충격을 받았으며 "한줌도 안되는 깡패들의 난동에 민족적 자존심이 갈갈이 찢겨졌다"고 분개했다.

김남주는 복학한 이강과 함께 답답한 심사도 달랠겸 동학혁명 전적지 순례에 나섰다.백산, 황토건,동진강 등을 돌고난 뒤 김남주는 이강에게 뭔가 해야한다.결단을 내려야 해 라며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전적지에서 돌아온 김남주는 이강 및 몇몇 친구들과 더불어 반유신지하신문인 '함성'의 제작에 착수했다.이강의 방 전세금을 빼내 등사기와 신문용지를 사고 몇몇 여학생들로부터 반지와 약간의 현금 등 '긴급민주성금'으로 그외의 경비를 충당했다.

제작을 마친 김남주 이강 등은 ㅇ를 전남대,조선대, 및 광주시내 5개 고등학교에 배포했다.유신체제에 대한 최초의 정면도전이었다.전남사는 이듬해 2월 보다 광범위한 반유신투쟁을 펼치기 위해 「함성』을 『고발」로 제호를 바꾸고 이를 전국에 배포하기 직전 경찰에 검거됐다. 이 사건은 결국 모두 15명이 국가 보안법위반으로 구속되는 엄청난 사건으로 확대됐는데, 듣거나 보거나 한 사람도 不告沕罪로 재판을 받았다.

74년 초 집행유예로 석방된 金南控는 이미 대학에서 제적이 된 채 고향으로 내려갔다. 다시 대지로 되돌아온 그는 직접 농사를 지으며, 등이 휘어져라 일만 하는데도 헐벗어가기만 하는 이웃들에 깊은 애정과 관심을 보내는 한편, 본격적인 詩作에착수, 그해 『창작과 비평』여름호에「잿더미」,「진혼가」등 7편의 시로 문단

에 데뷔했다. 金南柱란 이름이 정식으로 세상에 알려진 순간이었다.

그의 시를 읽어본 白嶪晴 ·廉武雄씨 등 당시 「刻批」편집 진들은 '깊은 밤중에 날카로운 비수를 들이대는 시 '라고 평하며 그의 문학적 장래에 대해 큰 기대감을 표명했다

서점 「카프카」와 反체제인사들

75년 다시 光州로 올라온 金南柱는 동구 대의동 광주경찰서 옆에 「카프카」란 서점을 개 설했다. 카프카는 7평 남짓한 면적에 『창작과 비평』 『씨알의 소리』 등 잡지와 각종 사회과학서적 · 대학교재를 취급했는데, 全南에선 최초의 사회과학전문이었다.그러나 서점에는 책의 구입과는 무관한 온갖 민주인사들의 발길로 항상 초만원을 이루었다.

『고발』誌 및 民靑學聯사건과 관련, 투옥됐다가 석방된 이들이 출입객의 주류를 이루었고 민주화운동의 서을·광주간 연락소 및 전남지역의 거점이었다. 이당시 카프카에 죽치며 '金南柱 사장'을 괴롭혔던' 인물들로서는 文國周(정의평화위원회간사), 李榮進(시인), 金銖奬(분산 美文化院방화사건과 관련 수감중), 趙泰一(시인), 박몽구(Fr), 양성우, 鄭東年, 朴錫武, 崔權촐씨 등이 있었고, 『고발』誌사건 때 金南柱와 李鋼 등의 무료변론을 밭았던 洪南淳 · 李基洪변호사가 이들의 스폰서 로서 출입을 했다.

그러나 金南柱자신이 商才가 없는데 다 서점 본래의 기능'을 전혀 하지 못하고 있는 「카프카」가 제대로 될리 만무했다. 서점을 정리한 金南柱는 76년 겨을 다시 海南으로 내려와 농사를 지으면서 농민운동을 시작했다. 농민 정광훈 ·홍영표 ·윤기현 등과 만나면서 피폐한 농촌의 현실을 구체적으로 인식하게 했으며,이들과함께 해남농민회를 결성했다.

金南柱는 또 이 무렵에 海南으로 이주해온 작가 黃晳暎과 만나 곧 의기투합,「사랑방농민학교」를 열어 농민들을 일깨우며 자신도 그들로부터 배웠다. 농민회회원은 80여 명으로 늘어났으며 농한기에 3박4일 정도의 맴버십 트레이닝도 가져 의식화작업을 하기도 했다.

농민운동의 활성화에 자신을 얻은 金南注는 해남 YMCA와 함께 지역문화운동의 새 지평을 연 「제1회 해남농민잔치」를 계획 ·실행해 문화운동에도 적지않은 성과를 거두었다, 문화운동이 제자리를 잡아가자 이를 전담할수 있는 조직과 인원이 필요하다는 것을 절감한 그는 77련 文炳蘭 · 黃哲暎·崔權幸·金相允 등과 함께

「민중문화운동연구소」를 차리고 초대 소장에 취임했다.

김남주는 연구소활동의 일환으로 대학생들을 중심으로 한 독서 서클을 운영했는데, 일본어판 『빠리꼬뮨』 『파농』 『세계를 뒤엎은 10일간』 등 텍스트가 문제가 되어 경찰의 수사망에 걸려들자 곧바로 서울로 피신했다.

『南民戰」의 전사( ? )로 변신

그때의 서울행이 金南柱가 지금까지 고향땅을 밟지 못할 길이 될줄은 그자신도 몰랐다. 南民戰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이른바 「南朝鮮民族解液戰總_이하 南民戰」은 79년 11월 13일까지 3차에 걸쳐 검거된 관련자 73명 전원이 유죄판결을 받은, 당시로서는 사상최대의 「공안사건」이었다.

주범 이재문(당시 45세)과 申香植 (당시45세)은 사형이 확정, 申香糖은 사형이 집행됐으며 이재문은 수감 도중 병사했다. 또 安在求(46·淑大교수역임) 崔錫鎭( 28 한국경제개발협회연구원),李海景( 39 ·무직), 朴錫律( 31·무직), 林東圭( 40 · 高麗大노동문제연구소총무부장역임)등 5명이 무기징역을,金南栓를 비롯한 車成煥(26·무직) 이0일( .貞信女中꾜샤역임), 金秉權(58·무직), 朴錫三(24·무직), 黃金秀( 41·침술사), 金達三( 31 · 한국가톨릭농민회조사부장) 등 7명이 유기징역의 최장기형인 15년형을 선고 받았다.

79년 10월 9일 당치 具滋春내무부장관은 기자회견을 통해 "대한민국정부를 전복시키고 사회주의국가를 건설하기 위한 전위대로서 이른바 「南朝鮮民族解放戰經準備委員會」를 조직, 사회흔란을 통해대정부 투쟁과 선동을 일삼아 온 대규모 반국가단체조직 총 74명의 계보를 파악하고 이 가운데 주모자 등 20명을 검거하고 나머지 사범들을 지명 수배했다"고전격적으로 발표, 세상을 깜짝 놀라게 했다.

具장관은 이어 "民靑學聯을 배후조종 했던 이재문을 총책으로 한 이 반국가 단체는 지난 76년 2훨부터 지하조직을 결성하기 시작, 그동안 철저한 점조직형태로 교사 · 학생 · 지 식 인 · 긴급조치위반수형자 등 모두 74명을 포섭하여 불온유 인물의 살포, 민주화를 빙자한 사회혼란 선동 등 도시게릴라 방법에 따라 불법 사

제무기류를 사용한 납치 강도행위까지 저질렀다"고 밝혔다.

신문과 TV를 접한 많은 사람들은 '엄청난 범죄'사실에 경악하면서도 유신의 마지막 발악기에 접어든 전반적인 사화분위기에 심한 우울감을 느꼈다.

당국은 이날 발표에서 '지난 8꿜 28일 서울시내 중심가 5개소에 뿌려진 불온유인물 관련 용의자로 추적중이던 서울대생 金富燮(26)을 10월 3일 애인인 朴美玉(23 ·외국어대 불어과 4년)과 함께 검거, 이 불온단체에 대한 단서를 잡은 뒤 강도상해사건 공범수배자인 이조직 '전사' 金南柱·車成煥을 잇따라 검거했으며 이들과 같이 있던 총책 이재문도 함께 검거했다"고 검거경위를 밝혔다..

독서회의 텍스트와 관련, 서울로 피신 했던 시인 金南柱가 어떻게해서 南民戰의 戰士가 되어 재벌총수 집에 흉기를 들고 들어가 '땅벌작전'이라 불리우는 강도행위까지 하게 됐는가?

이 부문에 관해서는 현재로서는 당시수사당국이 발표한 내용에 의존할수 밖에 없다. 서울로 피신한 金南柱는 6월 오래전부터 광주구속자협의회 회원으로 안면이 있던 朴錫律로부터 이재문을 소개받았다. 3달 뒤 朴錫律의 집으로 간 金南柱는 이재문의 입회하에 南民戰의 강령. 규약 ·선서문을 적은 유인물을 읽고 이에 가입 했다..

현실에 대한 강한 개혁의지를 갖고 있었던 金南柱는 조직의 활동에 적극적으로 참가, 유인물 제작및 배포를 전담했다. 조직의 운영자금을 조달하기 위해 金南柱는 79년 4월 27일 하오 10시쯤 서울 江南區 盤浦洞 ,590의 동아건설 崔元碩회장(당시 38세) 의 내연의 처 집에 車成煥·朴錫律 등 8명과 함께 들어가,경비원을 과도로 위헙, 손발을 묶고 집안으로 들어가려다 경비원의 고함소리를 듣고 주민들이 모여들자 그대로 달아났다는 것이다.

전후사정이야 어쩠던 늘 책안에만 있던 시인이 신념에 따라 강도행위까지 했다는 것은 엄청난 변모였다. 金南柱는 사건이 터지기 전 서울에서 黃晳暎과 만난 적극 있는데 이 자리에서 "무서워서떨린다"고 말했다. 곧 이어 그는 "이러한 두려움으로 해서 사는 희열이 있는 것 아니겠는냐"고 덧 붙였다는 것이다.

미워할 수 없는 친구

黃哲暎은 "당시 南柱의 표정과 말을 생각해 보건대 업청난 일을 앞둔 두려움과 그 두려움의 절제에서 오는 기쁨같은 것이 엉켜있었던 것 같다"고 술회했다. 그는 또 "南柱가 서울로 피신하기 직전 겅상에 올라가야만 할 산이 있다고 하자. 그런데 절벽으로 기어 오르는 평탄한 대로로 올라가든 정상에 도달한 자만이 비로소 어느 길이 옳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고 한 말이 생각난다'며 "그때 그가 말한 길이 남민전에의 길인지의 여부는 모르겠으나 그의 심정은 이해할 것 같다"고 말했다.

격정적이고 자유주의적이던 金南柱는 조직생활을 통해 대단히 규범적이고 도덕적인 인간즈로 변모해 갔다. 그가 검거 된 뒤 문제의 강도사건에 대해 언급하면서 "조직이 대중화되기 전에 지나친 모험 주의의 길을 걸었다"며 지도부의 노선을 통렬히 비판하기도 했다.

그는 현재 全州교도소에서 15년형기의 절반을 훨씬 넘어 9년째 수감중이다.낮 한때 1시간의 운동씨간을 빼놓고는 밖에 나오지 못하고 舍房안에서 독서와 사색으로 매일 매일을 보내고 있다. 벗들과 비교적 마음놓고 이야기를 주고 받을 수 있는 운동시간에 그는 땅탁구를 즐긴다. 땅탁구는 감윽에만 있는 득특한 스포츠로서 탁구대 넓이만한 땅에 시멘트를 바르고, 네트를 치고 나무판자로 라켓을 만들어서 손에 쥐고 탁구 규칙에 맞게 정구공을 사용하여 치고 받는 고런 운동이다.

9년의 球歷을 자랑하는 그는 제 1.급선수로 상대할 선수가 마땅치 않아 빈번히 애를 먹기도 한다. 교도소 내에서 김남주는 누구에게나 다정다감하고 따뜻하게 대해 간수들로부터도 인기가 높다고 한다.

남민련 사건으로 그를 취조·고문했던 수사관들마저도 그를 가르켜 '절대로 미워할 수 없는 친구'라며 나중에는 어느정도 다정하게 대하기도 했다. 그의 성품은 한마디로 천의무봉(天衣無縫'l 바로 그것인데, 워낙 맺힌데가 없고 어리숙한 그를 보고 선배인 朴錫武가 '물봉'(바보라는 뜻의 전라도사투리) 이라는 별명을 붙여주었다. 많은 이들이 '물통선생' '물봉형님'하고 놀려대니까 그는 "새벽 물(辨 에 벌 봉(蜂),_嚬蜂이라, 새벽에 일어나는 가장 부지런한 벌이구먼"하고 유쾌하게 웃어 넘겼다. 金南柱는 아마 일벌이 아니라 분명 싸움벌이 있을 것이다. 가장 강하고 포악한 적에게 따끔한 침을 꽃고야 마는‥‥

청춘의 대부분을 신념에 찬 투쟁으로 일관해 온 그도 식구들에 대해서만은 늘 죄스럽게 생각했다. 생전에 똑똑한 아들의 '빛나간' 행동을 못마땅해 하던 그의 아버지도 "제가 가는 길이 옳은 길입니다"라는 그의 단호한 말에 설득당해, 마침내는 말없는 지지를 보냈다.

예언자적 안목과 단호함의 시정신

金南控 가 南民戰으로 구속되기 몇 달전 그의 부친은 '南柱야'를 수십번 외치다가 눈을 채 감지 못하고 숨을 거두었다. 그가 방학이나 주말에 光州에서 내려을 때 씨암탉이나 달걀을 형제들 몰래 내놓곤 했던 노모도자나깨나 아들이 돌아을 날만을 기다리고 있다. 어머니에 대해 효성이 지극한 金齋柱는 이런 시를 쓰기도 했다.

산길로 접어드는

양복장이만 보아도

혹시나 산감이 아닐까

흑시나 면직원이 아닐까

가슴 조이시던 어머니



끌려간 서울의 아들

꿈에라도 못보시면 한시 라도 못살세라

먼 길 팍팍한 길

다시는 나서지 마세요

허기진 들판 숨가쁜 골짜기 어머니

시름의 바다 건너 선창가 정거장엘랑

다시는 나오지 마세요

(「편지」 중에 서)

지난 84년 그의 첫시집 진혼가(도서출판 靑史 간행i에 이어 최근 두번째 시집인 "나의 칼 나의 피』 (도서출판 인동 간행)가 출간됨에 따라 그의 문학세계를 조명하는 평단의 작업도 활기를 띄고 있다.

84년 "예언 전신과 선언정신"이란 제목으로 金南柱 의 시 세계를 들추어낸 문학평론가 金津經은 "「鎭塊歌」를 포함한 그의 초기 시들은 한 지식인이 그 사회의 모순과 맞서 싸우려 할때 부딪치는 갈등을 잘 드러내고 있다"며 "이러한 치열한 자기와의 싸움을 통왜 시인은 피와 눈물을 통한 혁명으로만 모순의 극복이 가능 하다고 하는 탁월한 역사인식에 도달하고 있다"고 평했다.

金津經은 이어 "金南柱의 시는 民族誥속에 깊은 뿌리를 내리고 있는 韓龍雲 李橘和 李賤史등의 예언적 정신과 맥락을 같이 하고 있다"며 "그러나 이들의 목소리가 다소 추상적이고 과거지향적으로 느껴지는 반면, 金南柱의 그것은 구체적이고 역동적인 미래로 가득차 있다"고 말했다. 金漂經은 또 "만일 그에게 다시 誘作에 전념할 수 있는 기회가 주마진다면 그는 예언자적인 거시적 안목과 리얼리스트의 구체적인 시각이 튼튼하게 결합, 우람한 시편들을 뽑아낼 것으로 믿는다"고 덧붙였다.

또 신예 평론가 鑛基喆 은 87년 한신대 교지 『한신』에서 『단호함의 시정신」이란 제목으로 "金南柱 시의 남다른 매력은 바로 '단호함'에서 오는것" 이라며 "그의 시는 우리가 '이런 말을 해도 될까' 싶을 정도로 대담한 선언성을 지니고 있다. 즉 우리가 수긍하되 말하기를 꺼려하는 그래서 늘 입가에 뱅뱅 맴돌기만 할 뿐인 그런 말들을 金南柱는 과감히 내뱉아 버린다"고 말했다.

국제 문제화된 문인투옥

魏基喆은 이어 '육신과 영흔이 어떻게 만나 꽃과 함께 피와 함께 합창하는가'라는 金南柱의 데뷰시 「잿더미」중 일부를 인용하면서 "이는 그의 문학관을 그대로 반영하고 있는 것이라 보아도 무방하다 영혼의 가장 화려한 논이라 할만한 문학은 육신의 피흘림, 즉 가장 처절한 싸움의 한복판에서 피어나는 것이라는 것이 바로 金南波의 믿음이다. 따라서 문학인은 문학인 이전에 가장 치열한 삶의 소유자이어야하며, 「잿더미i와 같은 상황도 육신에 가해지는 고통도 영혼의 승리를 장식하는데 아무런 장애가 되지 않을 뿐 아니라 오히려 이런 극한상황은 오히려 진보의 터가 될 뿐이다"라고 말했다.

한편 무크지 『전환기의 민족문학』 등을 통해 활발한 평론활동을 펼치는 평론가 金明仁은 "金南柱 문학은 80년대 이후 민족자주화와 반외세라는 시대적 흐름 속에서 각광받고 있다'며 "이미 교육받은 농민의 아들로서써 부끄러움, 서구지향에 대한 각성 등 초기의 성향이 점차 혁명적인 자기 단련을 통해 戰士로서의 모습을 드러내고 시대 상황에 대한 객관적인 인식을 획득해 나가는데 그의 시의 탁월함이 있다"고 말했다.

金明仁 은 또 '너무나도 힘든 시대와의 싸움을 철저히 고독하게 치르내는 시인의 모습은 너무나 감동적"이라며 "그러나 자기단련의 강도가 너무 높아 타인이 틈입할 여지가 별로 없고 지하활동을 했던 객관적인 한계이긴 하지만 대중을 향해 넉넉하게 가슴을 열어보이는 부분이 적은 것은 아실움으로 남는다"고 지적했다.

金南柱의 석방을 위한 사회 각계 ·특히 문인들의 노력은 옥중에 있는 시인만큼이나 집요했다.김남주의 석바을 위해 가장 먼저 집단의사를 표명한 문인단체는 실천적 문인들의 모임인 「자유실천문인협의회」였다.

자식은 각종 성명 ·탄원 등을 통해 그의 석방을 호소했고 기관지인 『민족의 문끌 민중의 문학』을 통해서 여러번 金南柱 특집을 마련하기도 했다. 한편 金南柱로 대표되는 구속문인 문제는 펜(PEN)클럽의 국제모임 때마다 한국대표들을 곤경에 빠뜨리곤 했다. 지난 86년 6월 24일 서독 함부르크에서 개최된 제 49차 국제 펜 총회에서도 예외는 아니었다.

한국대표 鄭乙炳이 한국문단 현황을 보고하자 총회장·됫좌석에서 자리잡고 있던 해외反韓단체인 民連會대표 이종수가 발언권을 얻어 "왜 당신은 한국에 투옥 작가들에 대한 언급이 한마디도 없느냐"며 鄭乙炳을 비난하자 각국 펜 대표들 여기저기서 한국의 인권상황을 소재로 정부를 공격하기 시작했다.

이중 서독 최고의 작가 귄터 그라스를 비롯 일본의 오다 마꼬도, 서독의 울리히 쿠륵, 로베르트 응크 등이 교대로 등장,한국측에 융단폭력을 가했다. 불가리아 대표는 "이 같이 작가가 고통 받고 있는 상황에서는 88년 서을 펜대회는 올림픽과 함께 한국 정권을 강화시켜 줄 뿐이므로 유보돼야 한다"고 목청을 높였다.이에 알렉산드르 브로크(프랑스) 펜사무총장의 한국예찬 및 브라질, 자유중국 대표 등이 한국측을 지원사격하는 바람에 '88서울대회유보'는 일단 철회했다,

간신히 위기를 넘기고 대회장을 나서는 圈淑禱단장의 두볼에는 '감격'에서 인지 부고러움줴서인지 알 수 없는 눈물이 하염없이 흘렀다.

이튿날 열린 「투옥작가 분과회의」에서 장소변경을 주장하는 대표들이 많아 한국대표단은 또다시 애를 먹었다. 그러나 총회는 88년도 9월로 예정된 제 51차 펜 총회의 서울대회를 확정하고, 단서로 펜 클럽 본부가 가을까지 한국의 투옥작가현황에 대한 상세하고 정확한 보고서를 제출하라로 지시했다.

석방운동 구체화돼

한편 오는 8 월 29 일 서을 개최가 확정된 펜 총회를 앞두고 펜 클럽 한국본부(회장 顚淑濬) 는 대책 ( ? )마련에 부심하고 있다.

이번에도 金南柱를 포함한 구속문인 석방문제를 놓고 각국대표들이 파상공세를 펄쳐볼 것이 뻔한데, 자칫 잘못했다가는 손님 불러놓고 망신당하기 십상이기 때문이다.

국제 핀 산하 구속작가위원회에서는 틈날 때마다 '구속문인 문제는 어떻게 돼가느냐'고 문의를 해오고 있는데 이에 대해 한국본부측은 '8.15특사로 좋은 결과가 있을 것'이 라고 원만한(?) 답변을 해주고 있다.

펜 한국본부 朴南禧 사무국장은 '국제적 위신이 걸려있는 대회니 만큼 최선을 다할 예정이며 정부당국에 구속문인의 석방을 최초로 건의할 계획 이라고 밝혔다.

金南柱 석방운동은 지난해 9월 17일 자유실천문인협의회가 발전적으로 해체하고 민족문학작가회의로 확대 개편되면서 더욱 활기를 띠기 시작했다.민족문학작가회의는 창립일 당일에「金南注 시인-그 통한의 세월이여」 라는 제목의 성명서를 내고 그의 즉각적인 석방과 문학적 복권을 단행할 것을 정부에 강력히 촉구했다. _

성명서는 "20대 초반부터 40살이 넘은 지금까지 오직 詩와 이 땅의 민주화와 인간다운 세계의 건설이라는 꿈만을 간직하며 살아오고 있는, 이 땅이 낳은 전형적인 민족 ·민중시인인 金南注가 우리와 살 맞대고 함께 있지 않는 민주화는 허구에 가득찬 것임을 선언하지 않을 수없다'며 "그를 비롯한 수많은 양심수가 不在한 가운데 열리는 대회는 죽은 자식을 방 가운데 두고 잔치를 하는 것 만큼이나 부도덕한 일"이라고 주장했다.

첫번째 성명에서 정부측의 별다른 ·반향이 없자 민족문학작가회는 지난 2훨 1일 문인 5백여명의 서명으로 된 「구속 문인 金南柱 시인의 석방을 촉구함」 이라는 제목의 탄원서를 법무부장관 앞으로 보냈다.

문인들은 탄원서에서 "金시인이 구금되던 70년대 말기는 문학인뿐 아니라 나라와 민족의 앞날을 염려하는 많은 양심적 지식인들 모두가 절망스러워하던 어두운 시기였다"며 "그리하여 각종의 이름이 붙은 사건에 많은 이들이 억울하게 옥고를 치러야만 했다"고 말했다.

문인들은 이어 "그러나 그들중 대부분은 80년대 이후 대개 사면 ·복권되어 민주사회 건설에 앞장서고 있으며 그러한 유신시대의 사태들은 실정법상의 잘잘못을 가리기에 앞서 우리 모두가 부담해야할 비극이었다"고 전제한 뒤 "어둡고 암담한 유신시대에 남달리 예민한 감수성을 가졌던 시인으로서 그 어둠에 저항했던 결과로 南民戰에 연루될 만큼. 그 과정에서 얼마간 지나침이 있다 하더라도 9년의 구금기간과 허옇게 센 머리칼로도 충분한 대가를 치렀다"고 주장했다.

이 탄원서는 金廷漢 ·金奎東·朴斗鎖등 문단의 원로를 비롯한 중진 ·신예들이 총망라돼 서명을 했으며 田淑護 ·鄭乙炳 ·李根三 등 한국 펜회장단도 서명을 했다.

민족문학작가회의는 오는 4월말부터터 光州 ·釜山 등지에서 2-3일 시차를 두고 계속하여 「金南柱문학의 밤」을 개최 그의 석방에 관한 문인 및 일반인들의 관심을 고취시킨 뒤 5월 10일쯤 서울대회를 갖고 전원 석방을 요구하는 농성에 들어 갈 예정이다.

金南柱와 함께 南民戰에 연루했다 석방된 문학평론가 任軒永 은 "南梁戰은 제5공화국 들어 유일하게 사형이 집행된 사건이었다"며 "사형선고를 받은 두 사람 증 한 사람은 형이 집행되고 한 사람은 병사함으로써 사실상 모든 처벌은 끝났다고 볼 수 있다'며 金奫柱를 비롯한 관련자 전원의 석방을 주장했다.

민족문학작가회의 金明秀 사무국장도 "펜대회 및 올림픽의 원만한 개최와 국제적 위신을 생각해서라도 金시인의 석방은 시급히 이루어져야 한다"며 "문인의 수감 자체가 민주화와는 동떨어진 탄압 상황임 을 드러내는 것"이 라 주장했다.

9년째 맞는 봄의 따사로운 햇빛을 金南柱는 쬐고나 있을 것인가? 세상에 대해, 인간에 대해 사랑이 지나쳤던, 그 지나침으로 인해 온 몸이 묶여 있는 사랑의 시인 김남주. 다음과 같은 구절을 곱셉어 보면 그가 사랑의 실천자임이 확연해 진다.

나는 당신에게

오직 슬픔만을 주기 위해

여기 있고

그대는 나에게

오직 고통만을 주기 위해

거기 있고

그러나 어쩌랴, 잡을 수 없는 것이

세월인 것을

나는 갇혀 있는 것을, 속수무책으로 알아

지는 꽃잎 바로 볼 수조차 없는 것을

그대는 나를 위해

원군으로 거기 있고

나든 그대에겐

자랑으로 여기 있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