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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2007-05-30

[월간지 관련기사] 광주 그날의 유산/'착한 자식 죽은 것도 서러운디'(월간경향, 1988. 4)

본문

'착한 자식 죽은 것도 서러운디'



김춘수 5·18유가족회회원



광주사태를 진압하는 과정에서 당시 조대부고 3학년생이었던 아들을 도청에서 잃은 한 어머니가 「분하고 서러웠던 7년세월」을 한숨처럼 토해 놓았다. 아들에 이어 남편마저 홧병으로 잃은 「광주의 한많은 母情」은 세월만으로 치유될 수 없음을 다시 한번 확인하게 된다. 斷腸의 역사를 광주의 말투 그대로 지상녹음하여 이 시대의 아픔을 진단해본다.

(기록1이봉환) 298 월간경향 1988. 4

"친구가 죽어부렀어요"

오늘은 참 하늘이 청청도 허요. 우리 성룡이 저 세상 갈 적에도 저렇게 노여운 하늘이었는디 벌써 7년이 지나가 부렸소, 5·18이 일어나고 온 시민들이 들고 일어나 야단헐 적에 우리 성룡이는 인자 고등학교 3학년이라 아무것도 모르고 학교나 댕기고 그랬지라.학교를 댕기다가 일이 터진께 학교도 못가고 어디가 불이나서 방에 불구경하다가 학생들이 하도 맞어 터지고 죽고헝께 그냥 분에 차서 횝쓸려 신역으로 갔는갑디다. 신역으로 몰려갔드니 거기서는 뭔 사람들인지 모르는디, 지 말로는 서울서 내려온 학생들인 갑다고 헙디다. 그 학생들을 보는 쪽쪽 쏴불드라요. 그래 가지고 거기서 사람들이 그렇게 많이 죽어부렀다고 그러면서 애가 분해 죽을라고 그래요.그렇게 사람을 많이 죽여야 쓰겄냐고 걍 가슴을 쾅쾅 치면서 "엄마 어째 그렇게 동족을 죽여분다요" 그러면서 웁디다. 그랑께 이 애가 신역서 그런 광경을 보고는 집에도 안들어오고 저녁내 시내로 횝쓸려돌아댕겠는갑써.즈그 형 누이들이 당하는 걸 보고는 고등학생들도 들고 일어나 부렀제. 팔팔헌 나이에 사람이 죽어 나자빠지는디 그꼴을 보고 그냥 있겄소. 그렇게 들고 일어나 다니다가 사직공원에서 즈그 친구를 만나서 이얘기 저얘기 울분을 터트리다 헤어짐서 안 죽으면 다시 만나자고 그랬는갑습디다. 그런디 그길로 다시 가보니 그애가·죽어 있드라요. 중학교 친구나 되는 갑인디 그놈이 지 먼저 죽어부렀다고, 안죽으면 다시 만나자고 그랬는디 죽어 부렀다고. "엄마 우리 친구가 죽어부렀어요. 사람이 너무나 많이 죽었어요. 엄마, 이럴수가 있다요 ? " 그럽디다.그러면서 어찌나 서럽게 우는지 이에미 속도 찢어질라 그럽디다.

성룡이가 처음 18일날 집을 나가 안들어오고 사람들은 죽어쌓고 나는 인자 그때 그놈 찾으러 즈그 친구집으로 시내 곳 곳으로 돌다댕기는디, 참 그런 징헌 것들이 없읍디다. 차타고 댕기는 사람을 쏴분께 걍 차에서 떨어져 붑디다. 나 도청 앞에서 봤소이. 우리 아들 찾으러 간다고 가서 여그저그 흑 우리 아들 있나 찾으러 댕기는디 읨매 징허고 치떨리드랑께라.도청앞 분수대에는 공수들이 총을 들고 쫙 서있고 시민들은 금남로에 꽉 찼는디,하도 사람이 많이 죽은께 시민들이 어디서 차를 수십대 갖고 왔읍디다. 차로 전부 밀어불자고.그래서

차가 앞서고 시민들은 수없이 뒤따라가는디 어디 도청쪽에서 빵빵 허고 총소리가 난께 앞선 차들이 인도로 뛰어들고 상가를 들이받고 야단난리났어.공수들이 운전사를 쏴분께 운전사들은 겁나게 죽고. 또 아직 살아있는 운전사들을 구헐라고 뛰어나간 사람들을 또 쏴불어.아이고 하늘이 막막허고 우리는 무서와서 앞에 나가도 못허고 그냥 땅만 치면서 발을 동동 구르는디, 피가 낭자하드랑께 길에가. 나는 그 꼴을 본께 아들생각이고 뭐고 없고 눈앞의 일에 정신이 없었지라. 한참 있다가 본께 장갑차 위에 머리를 짧게 깎은 고등학생이 타고 앉아 태극기를 흔들며 나타납디다. 장갑차는 천천히 계엄군 쪽으로 가고 그 어린애는 태극기를 흔들며 "시민을 쏘지말라"고 외치고 있었어라, 나도 시 민들도 저애를 쏘지는 않겠지 그런 생각을 했지라. 그런디 그건 환상이었지라. 대번에 계엄군이 M16을 난사해 버립디다. 그 어린 고등학생이 숨질 때 광경은 차마 말로 못하것소, 그때사 우리 성룡이 생각이 퍼뜩 들었지라.시상에 우리 아들도 저렀게 죽어부렀는갑다 싶으고 정신이 하나도 없읍디다.나는 거기서 최루탄만 얼마나 맞고 눈도 못뜨고 아들도 찾도 못하고 집으로 왔소.

고개 떨군 채 눈물만

그래서 인제 그놈을 찾지도 못하고 식구들은 이놈이 어디서 죽어 부렀다고 울고불고 초상집 같이 됐는디 21일날엔가 밤에 그놈이 들어왔데요.그랑쩨 18일날 나가서 21일날 밤에 들어온 거지라. 신역 얘기랑은 그때 들어와서 해준 거지라. 지도 인자 총을 들고 댕긴다고, 그럼서 지가 하고 댕긴 이야기를 하는디,김기열씨 아들하고 우리성룡이 하고 동창인갑디다.그러니까 그동안 총을 들고 차타고 댇기다가 친구집이라고 그집에 갔는갑써.나한테는 못오고 엄마한테 총을 들고오면 야단난리가 날 것 같고 하니까 친한 친구집엘 갔는갑제.그래서 총을 들고 그 집에를 가니 김기열씨가 깜짝 놀랐제.공부허는 어린 학생이 총을 들고 왔응께. 오죽 놀랬것소.그래서 총은 왜 갖고 댕기느냐,이런 것을 왜 니가 갖고 왔냐고 김기열씨가 뭐라고 호통을 쳤는갑써. 그애가 원래 내성적이고 과묵해서 말을 잘 안한단 말이요.뭐라고 해도 아무 대꾸가 엄응께, 이놈이 어른이 뭔 말을 해도 말대꾸를 안한다고 인자 뺨을 하나 때렸는 갑디다.그래도 이놈은 아무말을 않고 고개만 푹 숙이고 한참을 있드니 눈물을 뚝 뚝 떨구드래요. 나도 그일은 영 몰랐는디 작년엔가 기열씨가 그 소릴 합디다.그 소리를 들응께 얼마나 맘이 아프요. 기왕 죽은 자식 이지만 시상에 그놈이 뺨을 맞었다고 헝께 죽었어도 맘이 아픔디다.

그애는 집에서 때리고 뭣 할 일이 없는 애란 말이요.이 애가 어려서부터 투정부리 거나 부모말을 거역하거나 그런 일이 없었어라. 부모 말은 하나도 거역함이 없이 듣고, 친구들간에도 사이 가 참 좋았지라. 지가 어려운 일은 다 해주고 하니까 말이요. 근디 그 소릴 듣고 맘이 안좋아 있는디 한 번은 어디서 뭔 모임이 있어 가지고 기열씨를 만나기로 했는디 기열씨를 만나갖고도 괜히 말하기 싫어서 안했단 말이요. 그래서 기열씨하고 틀어져 부렀제라.기열씨도 뭐 우리 성룡이가 미워서 그랬겠소.걱정이 돼 그랬겄제.내 맘도 다른 것이 아니라 다 자식잃은 부모맘이 그렇다 이말이지라. 그러다가 작년에 망월동 제사 지내고 내려오다가 기열씨를 만나가지고 내가 그이야기를 했드니,기열씨 그 사람도 "그놈이 안죽었으면 별 일도 아닌디 그애가 죽었다고 헝께 뺨때린 것까지도 그렇게 맘에 걸렸다"고 급디다.그래서 나도 그랬지라.뭐 기열씨한테 섭섭해서 그런 것이 아니라 우리집안 기등같은 놈이 죽어서 그냥 맘이 쓸쓸해서 그랬응께 이해하라고. 그런께 기열씨도 고개를 끄덕 끄덕 합디다.

"도청 쪽으로 갑디다"

이놈이 그당시 조대부고 3학년 때는 아무것도 모르고 학교만 다녔지라. 조대생들이 태극기를 태우고 그런 일이 있었소 안. 그걸 보고 데모허고 학교건물을 부수고 형

께는 그것은 안좋은 일이라고 일기에 써놓기도 했습디다. 세상이 아무리 그렇제만 우리나라 국기를 태우는 것은 안 좋은 일이라고 맘이 아프다고 험서 지가 써놨듬마. 이놈이 처음에는 그런 마음이었는디 돌아다니다 봄서 사람이 하도 많이 죽고 공수부대 만행에 치가 떨렸응께 지도 데모허고 총도 들고서 돌아댕겠제.

그러다가 김기열씨한테 뺨하나 얻어맞고 갑자기 엄마 아부지 생각이 났는가 집에를 21일날엔가 들어와서 며칠 집에 있었단 말이요.내가 못나가게 했어라."우리는 오직 니 하나만 믿고 산다이, 니가 죽으면 나도 죽어 불 것이여"하고 밤낮 내가 그래쌓고, 지도 부모가 지만 믿고 사는 줄 아니까 나가서 죽기가 뭣 하지라이.지도 그때 그럽디다. "엄마, 이참에 나가 죽으면 개죽음을 당해. 찾지도 못해, 엄마." 그래서 그애 보고 "그래, 그러니까 나가지 마라" 그랬지라.

그러다가는 문득 이놈이 주먹을 이렇게 불끈불끈 쥐면서 "엄마,사람들이 그렇게 많이 죽었는디 집에서 요렇게 있어서 쓰것소" 자꾸 그럽디다. 그래서 나는 "그래도 가만히 있어야.집에 가만 있어"하고 달랬지라. 그렇게 달래서 며칠 집에 있었는데 26일날 오후에 갑자기 "엄마,나 친구집에 좀 갔다올라요" 그럽디다. 학동서 우리가 살고 즈그반 애기가 방림동서 자취를 하고 살었는디 거기 좀 갔다 온다고 그래요. 그날은 오후 늦게사 나하고 점심을 묵고 있다가 그런 소리를 해서 "그러면 저리(도청쪽)는 나가지 말고 이쪽으로 얼른 갔다오너라" 그랬단 말이요.

그때 통행금지가 아홉시일꺼요. 그러고는 대차나 나갔지요.그애가 그냥 엄마하고 시간약속도 잘 지키고 어디 갔다가 몇시에 올라요 하면 그시간에 오고 하는 그런 애란 말이요, 그러니가 "엄마, 친구 집에 갔다올라요" 헝께, 갔다가 올 줄만 알였지 도청으로 갈줄은 생각도 안했지라이. 그런디 옆엣집에 할머니가 살았단 말이요.그애를 내보내고 집에 있는디 그 할머니가 집에 와서 그래요. 그 할머니가 본께는 우리집에서 나가 획돌면 큰길이 나오고 큰길가에 전신주가 하나 있는디 우리 성룡이가 거기 전신주 옆에 딱 서서 우리집,긍께 제집을 한창이나 보고 서있드라요. 모르긴 몰라도 지가 도청으로 갈 결심을 하고 지 죽을 것까지 생각하고 그랬는

갑써.그랑께 죽으러가는 소가 집을 보고섰듯이 그렇게 한참이나 집을 보고 섰드니 도청쪽으로 가드라고 그럽디다. 그래서 저집 어미가 왜 이런 때 아들을 내보내고 싶으까 하는 생각이 들고 어쩐지 맘이 안좋아 죽겄드라요. 그 할머니가 보기에. 그러면서 나중에 우리집에 와서 "왜 아들을 이런 때 내보내냐"고 그래서 "즈고 친구집에 갔다온다고 그러고 나갔다"고 그렇께 "워메워메 친구집이 아니라 도청쪽으로 갑디다" 그래. 그때(26일)는 좀 조용했소이.그래서 나는 지가 궁금허니제 도청쪽에 갔다가 얼른 친구집에 다녀올랑갑다 했지라. 도청에서 시체가 나왔다고 연락이 와서 알았제 내가 어뜨케 그놈이 도청안으로 들어간지 알았것소.

S일만에 사망확인

그날 저녁은 참말로 몸써리납디다. 왠 여자가 확성기를 들고댕김서 "시민여러분 계엄군이 쳐들어옵니다. 시민여러분 !" 하고 숨이 넘어갈 듯, 간장이 끊어질듯 외쳐대는디 그 소리 사람 귀 터놓고는 못듣것습디다. 사방에서 총소리는 진동을 하제,우리 성릉이는 돌아을 줄 모르제, 그날 저녁엔 방문에다 이불을 치고 오들오들 떨면서 한밤을 뜬눈으로 새워부렀오. 밤을 새우고 이튿날, 그렁께 27일부터 아들놈을 찾아나섰지라. 다른 데는 안가보고 저희 친구집으로만 처음엔 찾어 댕겠소. 내가 생각하기로는, 내가 불량한 마음인가 몰라도 다 죽어도 우리 아들은 안죽을 것같이 생각이 듭디다.자석 둔 부모맘이 다 그런거 아니것소.이리저리 찾어 다녀도 없어서 8일만에, 6월4일엔가 산수동 갔다오면서 혹시 계엄군에게 잡혀갔나 해서 누구한테 부탁해놓고 왔단 말이요. 알어봐달라고, 혹시 밑에는 하얀 츄리닝 입고 위에는 파란 옷 입었응께 그런 애가 계엄군에게 잡혀있나 알어 봐주라고 하고는 산수동서 버스를 타고 학동집에를 오는디 맘이 좀 이상하데요이. 시내가 그렇게 깨끗할 수가 없어.그피투성이였던 시내가. 맥없이 맘이 안좋고 시상에 죽은 사람만 불쌍하구나, 이렇게 시내가 깨끗하니 핏자국은 흔적도 없어져 부렀구나, 죽은 사람들 그 양반들이 흘린 피도 저렇게 깨끗이 없어져 버릴 것이다냐,우리아들도 저렇게 되어부렀다냐,그런 생각을 하고 집에를 왔단 말이요

집으로 와갖고 또 나가 볼라다가 화순 사는 친구가 하나 있는디 그애가 어디로 댕김서 찾어보고 오기로 해서 기다리고 있었지라.그 친구가 와서 하는 말이 성룡이 시체가 도청에 있다고 한다고 고럽디다. 그말을 듣고 어찌 정신이 없든지 참말로 그애가 죽었다냐 생각이 듭디다.그래서 가본께 최형사하고 무슨 검사하고 둘이서 이애가 박성룡이라고 하는디 나는 관도 안떠들어 봤소이. 아니기를 바랬어. 아니고 차라리 살아서 어디서 "엄마"하고 부름서 달려오기 만 바랬어.

그렁께 죽었다고 연락받은 것은 26일날 집나가고 한 8일만이었지라.시체는 망월동에서 봤는디 도청에서 죽은 시체가 모두 열일곱구라고 그랬어요. 그때 망월동에도 시체가 많이 있었는디 포대기에 싸고 베니어판으로 관을 만들어 가매장했듬마. 중흥동 아들(문건양씨 아들 문재학) 하고 몇 몇 을 가매장해 분 것을 나중에 파보고 확인하고 다시묻었제.

나는 절대 죽은 것이 내 아들 성룡이가 아니기를 바했는디 사진을 본께 기여(맞어). 사진을 보고 찾었지라.즈그 아부지가 전대의대병원에서 사진을 찾어왔는디 허벅지에 M16을 맞었듬마. 꼭 뭔 점찍어 놓은 것 같습디다. 칼라로 찍어놨는디.다른 디는 쌩쌩해라.그렁께 보라고 내놨제.도청에서 총맞고 죽은 사람들은 얼굴이고 어디고 떨어져 나가 버린답디다.우리 성룡이는 다리를 맞고 피를 너무 닫이 흘려 쿡은 거지라. 근디 진단서 끊어온 디는 총자국이 둘이란디 사진에는 하나여 .의사말로는 총맞고 나간 허벅지 뒤쪽은 살이고 뼈고 통 없드라요. 총알이 휘젓고 나감서 푹 파져불고 한나도 살점이 없드라요. 그래서 피홀리고 죽어 부렀지 라이.

폭도 누명을 벗기려고

그래서 지금도 나는 아들놈이 도청서 어뜨케 죽었는가 알어볼라고 5·18 비디오를 상영하면 안빠지고 다 가본디 그당시 (27일 새벽) 도청에써 싸운 것은 안나오듬마. 근디 도청에서 죽은 우리 성룡이 사진이 카톨릭센타 사진전시한 디 나왔어라.중흥동 문건양씨 아들(문재학)하고 청식당 아들(안종필)하고 나란히 누웠듬마.이쪽으로 우리아들은 얼굴이 잘 보이고 청식당 아들은 돌아누워 있고 문건양씨 아들은 얼굴만·좀 보이고 셋이 나란히 누워 있어 그때 그애가 죽었을 때 조대부고서도 우리아들-죽었다고 식을 하고 그런다고 급디다만 그 당시에는 통 정신이 없고 세상살 맛이 안나 안가봤지라이.그놈 얼굴이,교복 입고 싱글싱글 웃는 얼굴이 눈에 선한디 어뜨케 가것소. 한동안은 다른 학생들이 조대부고 교복 입은 것만 봐도 눈물이 나와 울고 그랬소. 지금이야 세월이 7년이나 지나고 해서 이렇게 5·18유가족회에도 나가고 그러제 그때는 통 정신이 없었어라.

우리 성룡이 밑에 막내아들이 박형선인디 5·18 당시 서울에서 공장생활을 했는디 라디오나 신문에서는 깡패들하고 양아치들이 광주에서 난동을 부리고 다닌다고 글드라요. 도청이 피바다가 되고 여자유방을 도려내고 임신부의 배를 찢어 태아를 끄집어내고 한 일은 다 유언비어라고 그러면서 서울사람들이 광주사람들 큰일날 사람들이라고 글드라요.지도 Tv「보도가그렇게 나오니까 그렇게 믿었다요. 식량이 부족해서 식품가게가 털리고 은행이 털렸다고 그런 허무맹랑한 소리를 하드라요. 웜메 어디 그런 일이·있어라.나도 우리 성룡이 찾을라고 고렇게 싸댕기고 여태까지 살면서 보고 들어봤지만 그런 일은 없었응께. 그래서 막내아들 형선이가 공장에서 라면 한상자를 보내려고 했다요. 우리 식구 굻어죽을까봐서.그 러다가 좀 있으니까 사망자명단이 나와 지 형 이름을 보고 내려왔지라. 신문이나 TV 라디오에서는 광주를 궁지에 몰려고 교도소를 습격했느니, 학생이나 시민들 말은 안나오고 맨날 양아치니 깡패니 이런 사람들이 난등을 부린다고 했다 그럽디다.

그렁께 우리아들 성룡이는 폭도라요,폭도로 되어 있고 5.18이후에 4백만원씩 위로금을 줬는디 우리아들은 폭도라고 안줍디다.시상에 우리집안 기등인 자석 죽은 것만도 서러운디 내아들이 폭도라니. 이 원통함을 다 어디다가 풀어야 쓸랑가 모르것소. 우리 막내동이 시아재가 "형수님 다른 사람들은 위로금으로 4백만원씩 줬는디 어째 여그는 안준다요 ? "합디다.그래서 "냅두씨요, 고런 말 허지도 마시씨요" 그랬어. 고때는 그런거 생각도 안해봤단 말이요. 근디 나중에 알고 보니 폭도여서 안줬답디다. 그러니 억을하지라이. 아니 자석 죽은 것도 서러운디 죽은 자석이 폭도라니 그냥 두눈에 쌍불이 켜지고 보이는 것이 없지라.

그래서 그뒤부터는 폭도라는 누명을 벗겨야 쓰것다고 생각이 들어 5.18유가즉회에 나갔지라 서울서 높은 것들이 광주에 올라치면 형사들이 나를 따라 댕기등이라. 그러면 내가 그러요. 그것들 보고, "야 이 자석들아, 왜 우리 아들이 폭도냐. " 그러면 형사들이 그럽디다."서류에가 주동자로 되어 있다"고. "어째 우리 아들이 주동자냐" 하면 고놈들이 허는 말은 "도청에서 끝까지 저항을 하다 쿡었응께 주동자고 폭도지라" 그런단 말이요.워메워메 그말을 들으면 걍 속에 불이 일어 터지고 온몸이 부들부들 떨려서 말이 콱 멕히고 기가 락 멕히요.

아들 못다 한 일 우리가

고놈이 덩치가 크그등이라, 고등학교 3학년짜리라도. 그 당시 도청에서 어린애들을 다 나가자고 했다 합디다.느그는 나가서 살아서 이 사실을 방방곡곡에 알리고 이나라를 지켜야 쓴다고 해서 고등학생들은 다 나가라고 했는디 갸는 덩치가 큰께 안나간다고 했다고 누가 그럽디다. 안나간다고, 싸운다고 험서 안나가드래요. 누가 한번은 망월동 묘지에서 그러드랑께. "이 애가 그때 나가라고 그래도 안 나가듬마 죽었다"고. 시체를 들여다 봄시롱 그러드랑께,그 사람이 도청에서 같이 있음서 봤드라요. 우리 성룡이가 그런것을. 근디 그런 사람들 인자는 만나고 싶어져라. 어떻게 내아들이 총을 들고 싸우다 죽었는가 알고싶어서 말이요. 근디 그때는 정신이 통 없어서 그런 사람을 만나서 얘기해 볼 형편도 못됐지라. 26일날 밤에 중흥동 아들(문재학)은 "나 도청에 있다"고 밤에 전화를 해왔다고 합디다. 그래서 "얼른 집으로 오라"고, "거기 있으면 언제 죽을지 모츤다"고 헝께 "다 이렇게 죽어가는디 나만 살자고 가야"고 고집 아들은 그랬다고 그럽디다.그리니까 요놈들이 여그저고서 저희 또래나 형님, 누나, 아저씨같은 사람들이 죽어가니까 그걸 브고 젊고 팔팔한 피에 못참은 것이지라.그애가 어려서부터 불의에는 못참고 참 친구들 간에도 우정이 깊은 애있어라. 남의 집 사람들은 성릉이같은 아들 둬서 좋것다고 부러워했고 학교서도 공부를 안하거나 사고를 치는 친구가 있으면 지가 발벗고 나서서 해결하는 그런 놈이었어라.

5.18이후에 우리 유가족한테 온 피해는 화따 말도 마씨요. 경찰들한테 당한걸 생각하면 아주 분해서 못살어라. 워메, 닭장차에 실어다 어디다 안내분가.어디가서 데모하면 망차에 실어다 어디 차도 없는 디 다 갔다 내 다불지를 않는가.한나씩 내불어,그것도 한나씩.그라고는 발로 제기제, 걷어차제,병신 신 다 되았어라. 우리는. 그렁께 우리 5.18유가족회에서도 가만 안있지라 아, 우리 자석이 저놈들하고 싸우다 죽었는디 부모들이 가만 있으면 쓰것소. 아들이 못다한 걸 우리라도 이어서 해야제. 그렁께 데모가 있으면 프랑카드랑 들고 나가고 구호도 외치고 가만 안있제라. 우리가 그만치 해서 거시기가 살어났소. 5.18이. 진짜 참말로 말로는 다 못해라.

작년 재작년에 나는 최루탄을 두방이나 정통으로 맞어부렀소이. 그라고는 입이 틀어져 부렀어, 망월동 갔다가 와서 금남로에 있는 카톨릭센타에 가 앉었는디 웬 험상궂은 놈들이 오듬마는 최루탄을 쏘고 던지고 짓밟고 하는 통에 이발도 깨져 불고 입안이 요만치 찢어져 부렸소, 치과에 갔드니 요만이나(손가락 하나) 찢어져 부렸다고 그래, 그래갖고 입이 획틀어져 부렀어. 그라제 여그 허벅지에 맞어서 입은 한복이 다 찢어져 분 것이 지금도 옷장에 넣어져 있소이. 찢어져 붑디다, 사과탄에 맞응께. 워메 그래갖고 딱 나자빠져 분 놈을 끄잡고 망차에다 싣고 화정동 통합병원에다 차속에 넣어 갖고 데려다놔라. 거기서도 내려주지도 않고.그해서 문을 막 두드리고 우리가 뭐 죄인이냐고 밖에 내놔도 도망안갈 것잉께 차에서 좀 내려주라고 악을 빡빡 썼제. 그랑께사 내려 줍디다. 차밖으로 나온께 살것 같습디다. 최루탄을 맞어갖고 숫제 최루탄가린디, 온 몸뗑이가. 그랑께 최루탄을 밀가루 뒤집어 쓰듯 써분께 기침은 나오제,속은 뒤틀리고 온몸은 화끈거리제,그걸 차속에다 처박어놓았으니 어디 살것소.

행사 때마다 닭장 신세

그것뿐이 아니어라. 집에도 압력을 넣은 것이 한두번이 아니요. 높은 것들이 광주에 올때만 와갖고‥‥ 인자 첨에는 우리나 즈그나 같은 인간잉께 들어와서 방에도 있으라 하고 그랬는디 그것도 한두번이제 못하것습디다.그것들이 오면 암것도 못해. 화장실에 가면 화장실에도 따라와.시장에 가도 따라와. 아무것도 못해요. 높은 것들이 광주에 오기 3일전부터 집에 와서 그렇게 따라댕기다가 갈 때까지 며칠을 그런단 말이요. 그렁께 나는 누구보다도 먼저 누가 광주에 온지 알어부요. 어디 광주에 오면 온다고 떠들썩하니 옵디여, 도둑고양이 맨치로 살짝 왔다가 가면 그날 저녁 뉴스에나 떠들썩허니 나오제. 근디 나는 형사놈들이 3일전부터 우리집에 진을 치고 있으면 또 광주에 오는구나 하고 알어불제라. 광주사람을 그렇게 많이 죽이고나서 광주사람들 무서운지는 아는 모양이여. 그런더 형사들 하는 짓거리가 나중에는 부애가 나서 방에 들어오지도 못하게 했지라.그렁께 나중에는 일고여덞명씩 나한나에다 따라댕기게라.그러니 어디 낯들고 살지도 못해라.챙피해서. 저쪽에 청산아파트에서 살다 요짝으로 쪼깐 나와서 살았는디 거기서도 집밖에 차를 딱 대놓고 있고 해서 남부끄러워 못살것습디다.집을 지키다 틈만 나면 끌고 나갈라고만 하요이.

근디 유가족회에서도 남편이나 친척 죽은 사람보다 자식 죽은 사람들이 더 열렬합디다.우리는 죽음이고 뭣이고 막 달려들그등이라. 긍께 더 무서워라 하고 더 지키고 더 시외로 데리고 나가 불라고 하는갑써. 한번은 내가 이빨이 안좋아서 치과에 이빨 빼러 갈 일이 있었단 말이요. 근디 그때 하필 형사들이 지키고 있는 날이어서 "여보시요, 나 치과에 이빼러 갈랑께 다라오지 마씨요" 그랬는디 그래도 썩을 것들이 치과병원 안에까지 따라옵디다. 그래서 진찰을 받는다고 앉었는디 간호원이 그래요. "아줌마, 아줌마 아저씨가 왔어요? " 그러는거여. 그래서 내가 큰소리로 들어라고 그랬제. "그것이 아저씨여 ? 아저씨가 아니여. 살인마 꼬붕들이여. " 그럼서 소락대기를 질렀제. 그랑께 아무 말도 안하고 눈을 요렇게 째려봅디다. 그래서 "예, 여그까지 따라와야 쓰것소. 지킬라먼 밖에 나가 지키씨요"했제. 그래도 뭐 들은척도 안하고 앉어 있어. 그래서 나는 마취를 해서 이를 뺏지라이. 그러고나니 정신이 하나도 없어요. 이는 뺏쩨 형사는 저렇게 따라당기제.머리도 아프로 죽것드란 말이요. 근디 병원을 나선께 차를 대놓고 나보고 "탔씨요"그래.타기는 뭘 타느냐고, 나는 딸집에 가서 애기 봐줘야 한다고.그래야 딸애가 일을 나간단고 그런께 "암튼 탔시요 '데려다 줄틴케" 그래서 정신도 없고 몽롱한디다가 즈그가 날 어디로 데리고 갈라디야 생각하고는 탔단 말이요. 그라고는 한참을 간디 가만 본께 딸집 있는 디로 안가고 어디 이상한 디로 빠지드마.그래서 내가 "왜 이리 빠지요 여기는 딸집 가는 길이 아닌디"했제.긍께 "쩌그 어디서 유가족 몇이 만나기로 했다"고 하듬마.그래서 내가 어이가 없어서 "당신들한테 나 또 속았소이.예, 당신들 내 눈을 빼보씨요.어디 유가족이 또 나온가" 했게. 그랑께 "아니 쩌그 가면 유가족들이 있다"고 능글능글허게 웃음서 그럽디다.

감시 받으며 병만 들어

그해서 요것들이 날 또 어디 다 싣고 가 내불라고 그런가 싶어서 어뜨케나 차속에서 몸부림치고 고러다가 언뜩 본께 쩌그 고속도로로 나가는 데서 팻말을 본께 장성이드랑께. "워메워메 여그가 뭔일이다요. 우리딸이 지금 날 기다리고 있는디 나는 어쩌라고 이러냐" 고 "내가 나와 갖고 아무 목적이 없으면 흑 모르지만 나는 우리 딸집에 애기보러 가야한다고 안합디여, 그래야 딸이 일나간다고 안합디여" 하고는 몽부림을 쳤제. 그라고는 거그서 어뜨케나 두 형사들을 발로차고 함서 "하여튼 나 데리고 나가기만 해보라"고, "나 죽어불고만다"고, "나한나 죽어불먼 그만"이라고 거그서 어찌나 악을 써부렀든지, 즈그도 겁이 났든가 아니면할 수 없었든가는 몰라도 도로 차를 돌려갖고는 요'앞 우리 딸 집 앞에다 내려줍디다 사람이 맨날 이렇게 시달리고 고통을 받응께 순 악이나 욕 밖에는 안늘고 성질도 이상해지데요이. 사람이 자식 잃고나서 환장하고 막막해 죽것응께 병만 늘어붑디다.밤낮 이런 일저런 일로 속이 상하니까 딱 병이 나갖고 나 일년동안 아퍼서 누워 부렀소이.

음메 말도 못해라. 그랑께 맨날 아프기만 해라. 자식 죽은거 한이 들고 원이 박혀서 가슴병, 열병 든디다가 꺼뜩하면 감시받고 쫓겨 다니다가 두들겨 맞고 짓밟히고, 말도 못해라아조. 요리 가먼 요리 쫓아댕기고 저리가면 저리 따러 댕기요. 한번은 "이상한 사람들이 우리집 담을 넘겨다보고 있다"고 옆집 사람이 안그라요. 그래서 나는 또 형사들이 서을서 누가 온께 지키고 있다가 감시할라고 그런지 앙께 "이상한 사람이 아니고 도둑놈도 아니고 형사들"이라고 말해줬제. 그렁께, 형사가 왜 그러냐고 형사가 왜 집을 지키고 넘겨다 보며 감시하냐고 옆집 사람이 그럽디다. 그래서 속사정을 얘기한께 급디다, 옆집아줌마가. "그렁께 저놈들이야말로 이상한 사람이고 도둑놈들이구만 그차." 그래서 나는 그냥 웃음시롱 "내가 나쁜년인갑제" 그라고 말았오.

폭도가 아니라고 하시오

5.18 하면 정부에서는 피해보상이니 뭐니 지껄여대는디, 피해보상은 나중 문제고 억울한 누명을 벗어야 쓰것어요.5.18이 폭도들의 난동이라고 한 누명을 첫번째로 벗겨서 의거로 해야 쓰고, 두번째는 도청앞에 5.18위령탑을 세와야 쓰고, 세번째는 망월동묘지를 성역화해야 쓰고 네번째는 책임자들을 벌줘야 쓰고,그하고 나서 보상은 받어야지라.

근디 요새 뭔 민주화합 추진위원횐가 뭔가를 만들어 5.18문제를 갖고 떠들어대는디 다 쓸디없는 짓거리고, 얼렁뚱땅 5, 18을 흐지부지 해불라고 그런 것이제.그러나 어림없어.5,18은 그 힘으로는 해결 안돼, 우리가 해야써. 우리 힘으로. 그래도 저것들이 가장 손쉬운 방법으로 우리를 꼬시는 것이 돈입디다 돈. 긍께 관제 유가족회장을 비롯해서 몇 명이 돈에 넘어가 그것들 하고 잘도 놀아난디,인자 관제 유가족 숫자도 점점 줄어들듬마. 그렁께 당시 4백만원 위로금은 폭도라고 안주고 그후에 우리한테도 피해보상으로 천만훤을 줍디다.그래서 그돈 받음서 내가 얼마나 울었는지 아요 ? 내가 형사들한데 그랬어, "돈 주고 안 주고가 문제가 아니라 남의 좋은 자식, 꽃같으먼 당아(아직) 피지도 못한 나이요,그런 남의 소중한 자식, 소중하고 애지중지한 내자식 죽이고 뭐 폭도라고,응 ? 학생이 그것도 고등학생이 왜 폭도냐고. 폭도는 느그가 폭도제." 형사들한테 그했단

말이요. 그럼시롱 왜 폭도냐고 막 따졌드니 인자는 귀찮은가 서류상에는 그런 말이 없다고 글안허요. 그래서 뭣이 없어야고 따졌제. 왜 그라냐면 그때 서류에 주동자라고 쓰였었거등이라. 그래서 내아들이 정말 폭도여서 그런 소리를 했느냐고 악을 쓴께 즈그도 할말이 없는가 입구녁을 다물듬마. 우리 자식, 꽃같은 자식 폭도라는 누명을 벗겨야 죽어도 눈을 감고 죽제. 내 좋은 자식 죽은 것도 서러운디 폭도라고 누명씌우냐고 잠잘 때도 헛소릴 다 하요.이말을 들으떤 가슴이 제일 아프요. 다른 것은 웬만하먼 참은디 참말로 우리 성룡이보고 폭도라고 하는 그 소리만 들으먼 나는 딱 자지러져부요. 이렇게 가슴이 터질라 그러고 속창시까지 찢어질라 그런단 말이요.

나는 이것 좀 어뜨케 해결됐으먼 좋것소. 하도 답답하고 분해서 내가 형사보고 그랬소. "아니 폭도가 아니라고 TV에 보도해불먼 될 것 아니요. 고때 5.18 때 폭도라고 누명을 씌운 시민이나 학생들이 사실은 폭도가 아니었다고 말좀하먼 될 것 아니냐"고 그랬소. 그말을 해놓고도 내가 우습디다. 아니 그것들이 그말을 들을 것도 아니고 쇠귀에 경읽기 아니것소. 그러면 그사람들은 씩 웃음시로 "그런 말을 어뜨께 한다요" 그럼시로 등을 싹 돌리고 대꾸를안합디다. 그래서 내가 "왜 못해라. 아무리 윗사람이라도 제가 잘못한 것은 잘못했다고 시인을 해야 될것 아니요" 그랬제. 하기사 내가 그런 말을 한 것도 무슨 기대를 갖고 한 것이 아니라 그냥 화가 나서 한 소리였지라. 그 사람들도 위에서 시키는대로만 하는 불쌍한 그런 것들인디 말이요.

"이장하라면 돈 못 받아"

우리 성룡이 막 죽고는 통 세상 살 맛도 안나고 정신이 없어 그럭저럭 지내다가 5.18유가족회가 생겨 거기서 활동을 했지라. 그렁께 뭘 좀 알것습디다. 죽은 것은 내 자식만이 아니고 같은 처지에 있는 사람이 한 두사람이 아니어라. 그래서 이제 유가족회 사람들은 가족보다 친하고 서로 힘이 되지라. 그래서 유가족 회원들이 무슨 일이 있으면 함께 나서니까 밤낮 잡혀 댕기고 그랬지요. 피해 보상금 천만원 준 것도 우리를 어뜨케 좀 무마해볼라고 고랬든갑서. 보상금을 남보다 먼저 좀 받은 셈이 제. 고걸 받어 갖고 지금 살고 있는 집을 전세얻어 살고 있소, 내 자석이 죽어서 받은 금같은, 피 같은 돈인디 허투루 써불것소.

그런디 고 때 뭣을 하다가 잡혀서 서부경찰서 정보과로 끌려갔지요, 그때 한참 망월동 이장한다고 묘 파낼 때요.그래서 이장하라고 꼬실라고 주는 돈 아닌가 해서 그돈 받기가 무섭습디다. 묘 파내랄까봐 무서웠어. 김00이가 담당할 땐디 그것이 받으라고 드러듬마. 그래서 "예 당신 이것 주고 우리 아들 묘파내라고 그럴라고? 나 안 받을라요" 그렁께 안 그럴란다고함서 다방에서 만나자고 해서 갔드니 각서를 쓰라고 합디다.고래서 "무슨 생활보조금으로 준다듬마 각서를 다 쓴다요" 헝께 "각서를 써야 돈이 나온다요"허는 것이여. 그것들이 필시 무슨 꿍꿍이속이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듭디다."그라면 나 안 받을라요. 나 이렇게 어렵게 살제만 그것 있어 살고 없어도 살어. 아, 죽은 놈도 있는디 나 살자고 그걸 받어 ?그거 받으먼 뭣한다요 ? 우리자석 팔아서 내가 그돈 받으먼 그놈이 망월동 묘지에서 날 욕해. 다음에 나죽어 황천 가떤 우리 자석놈 볼 낯이 없어져, 난 죽었으면 죽었제 우리 자석 두번은 못죽여.각서 써서 당신이나 받어 처묵으씨요" 그러고는 다방에서 나와 부렸어. 긍게 옷자락을 붙잡고 "앗따 그러지말고 좀 써 주시요"험서 계속 달라붙드란말이요. 그래서 나는 "그것 안 받았으면 안 받았제 각서는 못쓰겄소. 뭣을 잘못한 것이 있다고 폭도누명 쓴것도 억울한디 각서를 쓰고 받어라" 그라고는 와 부렀어. 그런께 고놈들 허는 말이 "그라먼 우리가 써야 쓰것소" 허는 거여. "왜 당신들이 써, 이도독놈들아" 그라고 있는디 즈그가 어뜨케 했는지 아무소리 없이 돈을 갖다 줍디다.

그래서 요놈 받었다고 묘파내라고 그러면 안받을란다고 다시 그렁께 절대 안그런다고 그랍디다. 그때 묘파낸 사람들이 상당히 많었는디 그사람들 멍청한쩨 파냈지라. 망월동 묘지 거그가 얼매나 좋은 자린지 아요. 양지녘이고 흙도 좋고 무엇보다 5.18때 못다 핀 꽃들이 못푼한을 안고 누워 있는 성지가 아니것소. 그러고 그 묘들이 거그 한데 모아 있어야 우리 유가족들이 모이기 쉽고 5.18이 또 영원히 살아나는 것 아니것소이.근디 그것들이 한 때 고 묘를다 파내 이장시킬려고 그 난리를 안했소이. 그런 쥑일놈들이 어디가 있것소, 죽은 사람 편히 누워 있게 하지는 못할 망정 또 시신을 거덜낼라고 했으니 원.

북받치는 7년 설움

그 돈을 받고 얼마나 있다가 뭣을 하다가, 응 그래, 그때 무슨 데모가 있었을 거시요. 그래서 또 잽혀갔는디요. 징그럽게 잽혀댕기고 했소이, 하여튼.그래갖고 경찰서에 잽혀 가 있는디 정보과 계장이란 것이 떡 버티고 앉아 꼭 뱁새같은 눈을 치껴뜸시로 대뜸 하는 말이, "돈 받었어 안 받었어 ? " 그러는 거여, 나보고.그래서 나도 똑같이 눈을 노려 봄시로 "그래 받었다" 그렁께, "돈받고 또 나와? "하듬마. 그래서 "나오면 어째 느그가 쥑일 것이여 ? 쥑일라먼 죽여봐"하고 악을 썼지라.그것들이 그렇게 지랄을 하니 부애가 안나요.아이고 걍 하늘이 놀놀허고 사지가 부들부들 떨리는게 통 아무것도 안뵈는 것이여. 그래서 그놈 멱살을잡고 사방을 뛰어 댕김서 소락대기를 버럭버럭 질렀지라. "야, 이 도둑놈아,너 이때까지 살면서 돈천만원 못만져 봤냐 ? 에라이 썩을 것아, 니 지금 그 자리가 무슨 대단한 자리라고 나보고 받었어 만받었어 ? 반말을 해. 야이 더런 것아,나 그돈 필요없다. 당장 갖고 가. 천만원 당장 주께 우리 아들 살려내라,천만원이 아니라 몇천만원이라도 주라면 줄텐께 우리아들 살려 내란 말이다. 이놈아"하고 악을 썼제. 어째 부애가 나든지 위 아래로 뛰어 댕김서 악을 쓰고 소락대기를 지른께 어뜬 사람이 나를 붙잡고 "이리와서 앉으씨요. 아줌마가 이해를 허씨요. 저 사람이 성격이 좀 급해서 그런께 진정 허씨요"그래. 아, 천만원 그것이 문제냐고. 내 자식만 살려준다면 도로준다고 그까짓거, 고때는 받어다 아직 쓰지도 않았을 때요. 통장으로 그대로 갖고 있었제. 그 돈이 얼마나 마음 아픈 돈이요.그뒤에 얼마나 있다가 그 돈으로 지금 살고 있는 집을 전세로 얻었지라. 그 돈을 형사들이 통장으로 줬는디 그 통장 다시 줄텐께 내 아들만 내놓으라고 악을쓰고 댕겠소, 내가.그렁게 즈그가 와서 사과합디다, 잘못했다고. 을마나 서럽소이. 시상에 남의 자식 죽이고 돈 그것 찌끄러주고 뭣이 잘한 일이라고 유세하는지. 그런 분함 당하고 7년을 살었소.지내고 본께 벌써 7년이 지났지마는 자식 잃고 설움받고 그 7년을 어뜨케 살어왔는지 지금 생각해도 아찔하요.긍께 나는 요새는 사흘이 멀다 하고 밤낮 드러누워라. 요라고 있다가도 뜽금없이.어디 걸어댕기도 못하요. 요렇게 심장이렁께.

남편도 홧병으로 가고

즈그 아부지도 성룡이 그놈 잃고 한 삼년 밥태기 하나 입에 안넣고 술만 묵다가 저 세상으로 가부렀소.우리집에서는 그것이 하여튼 거울이고 기등인디 한참 필나이에 죽어부렀으니 즈그 아부지 슥이 오죽이나 탔것소. 즈그 아부지도 형사였는디 , 5.18이전에 그만두고 집에 있다간는 자식상을 당해 밤낮 술만 마시고 성룡이 이름만 외다 저 세상으로 갔지라. 성룡이 위에 큰 아들이 있는디 큰 아들이 징하게 못되어서 성룡이가 큰아들인 셈이지라. 그렇게 큰 아들이 항상 마음에 걸려 속이 아퍼라, 큰놈이 못 돼서 내가 속상해 울고 있으면 그놈이 우리 성룡이 그놈이, "엄마, 엄만 내가 있응께 걱정마씨요, 내가 안있소" 항상 그럽디다. 즈그아부지도 그것이 속 기등이었는디. 그랑께 즈그 아부지가 죽기 3일전에 "꿈을 꿨는디 누가 자꾸 자기를 데려간다"고 그런헛 소리를 합디다. 누가 자꾸 데려갈라고 그런다면서 "나를 데려갈라면 우리 성룡이 데려다주고 데려가라"고 밤낮 그러더니 돌아가십디다. 그만치 머리에가 벡혔지라, 아들 그것 한나가 꽉머리에 벡혔는갑써. 관제로 유가족회장 된 사람이 5.18 영령들을 다 팔어먹는 짓을 하고 다닝께 그통애 화가 나 밤낮 술묵고 댕겼지라. 회장이란 것이 그것들이 하라면 하란 대로 하고 댕긴다고 부애내고 댕기다가 홧병에 즈그 아부지도 저세상으로 가부렀지라.

내가 무슨 죄인이길래 자석 잃고 남편까지 잃어 부렸는지 모르것소만 인자 생각핸 본께 나는 그냥 죽으면 안되것습디다.내 자석 죽이고 내 남편 죽게 한 그 것들이 되어가는 꼴을 두 눈으로 똑똑히 보고 눈에 흙묻혀도 묻힐라요.그때까지 목숨이 붙어 있는 한 그렇게 그런 정신으로 살라요 나는.

광주가 사라지고 있다

국민신문 19988년 5월 13일. 사설.

분수대가 헐린다고 한다. 분수대가 헐린 그 자리에는 지하 주차장을 출입하는 차량의 통로가 만들어진다고한다. 현재 공사중인 지하상가가 완공되면 금남로는 명실공히 중심상권으로 형성되고 지하도가 생겨 교통난이 해소되며 특히 분수대 아래의 주차장은 광주의 고질적인 주차난을 해결할 수 있다는 것이 시당국의 주장이다.따라서 주차장 통로를 만들기 위해서 분수대 철거는 불가피하다는 것이 당국의 변명이기도 하다.

도대체 그곳이 어떤 곳인가. 80년 5월 반독재 반외세의 우렁찬 함성이 뜨겁게 끓어 오르던 광주의 심장이었다. 독재의. 칼날 아래 난자되어 쓰러졌던 통곡의 자리였다. 그리고 이제는 우리 모두가 그때의 함성을 되살려 구체화할 실천의 장이기도 하다.

고대 로마의 포럼이나 아크로폴리스가 민주주의의 밑거름이 된 토론의 장이었다면 도청 앞 광장은 이 땅의 민주를 지향하는 광주 시민의 토론 마당이었다. 분수대를 철거하려는 당국의 처사는 바로 민주주의의 싹을 제거하려는 음험한 책략이다. 또한 그것은 80년 5월 희생됐던 이웃들의 육신과-함께 이제 그 영혼과 정신마저 말살하려는 또다른 살륙행위이기도 하다.

지난 8년 동안 우리 광주의 5월정신은 전두환·노태우정권에 의해 무참히 살륙당해 왔다.묘지 이장을 둘러싸고 5·18유가족들이 겪은 고통은 이 정권의 지속된 잔인성의 단적인 예이다.이렇게 계속된 현 정권의 잔인성을 우리는 분수대 철거라는 문제에서 또다시 확인한다.

권력은 대중적 지지의 받침대 위에서만 확고하게 담보된다. 현정권이, 그 대중적 받침대를 거부하고 정권의 반민족 반민주적 속성을 폭로하는 광주를,그 광주의 총체적 상징인 분수대를 헐려고 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귀결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제 우리는 80년 5월에 회생된 육신과 함께 그 정신마저 싹쓸이하려는 현정권의 간악한 음모에 맞서야 한다. 분수대 철거 재고를 요청하는 소극적 자세가 아니라 그 음모를 분쇄할 힘의 결집 위에서 분수대 .철거책동을 저 지해야 한다. 분수대 사수는 살아 남은 우리들이 견지할 5월정신의 지상명령이다.

상징은 정신이며 그 정신의 견지 속에 실체는 확보된다.분수대는 쇠붙이의 자리가 아니라인간의 자리이다. 분수대는 지하로 들어가는 암혹의 입구가 되어서는 안된다. 그곳은 우리 모두가 이 땅의 민주 민족통일의 저 높은 정상을 향해 비상하는 출구로 남아야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