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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2007-05-30

[월간지 관련기사] 전 광주 505보안대 수사관의 폭로수기/내가 정웅장군을 체포 수사했다.허장환(신동아, 1989. 1)

본문

내가 정웅 장군을 체포 수사했다

허장환

(편집자의 말)

「5·18광주민주화운동」당시 發砲명령과 作戰 지휘권문제가 쟁점화되고 있는 가운데, 당시 광주지구보안대 상사 許壯煥씨(41)가 지난 12월 G일 平民黨술에서 「양심선언」을 했다. 이날 허씨의 발언 가운데 주목할 사실은 다음과 같다.▲1980년 5월 21일 全보안사령관이 광주 K-57 비행장에 도착, 전투교육사령부에서 사태진행에 대한 브리핑을 받은 후 헬기로 광주일대를 살펴보고 상경했으며, 그후 전교사 기밀실에서 전투교육사령관 尹興禎 중장, 특전사령관 정호용소장, 11공수여단장 崔雄준장, 7공수여단장 신우식준장, 3공수여단장 崔世昌준장, 전교사부사령관 김기석소장, 전교사 참모장장사복준장,505보안부대장 이재우대령 등이 참석한 가운데 열린 계엄관계관회의에서 특전사령관 정호용소장 등이 자위력행사를 주장했으며, 5월 17일 국방부 기밀실에서 확대계엄을위한 전군주요지휘관회의가 열리기 하루전인 5월 16일 전국보안부대 수사과장회의에서 이미계엄확대를 전제로 한 세부적인 지침이 하달되었다.이같은 허씨의 「폭로」는 「당시 실세인 신군부세력이 사태를 주도할 수밖에 없다는논리」로 全보안사령관과 郵특전사령관에 대한 공세를 취해온 야당측의 주장을 됫받침할 수 있는 「유력한 증언」으로 주목을 받았으며, 나아가 「광주造作說」의 정황증거를제시했다는 점에서 비상한 관심을 끌었다.

그러나 民正黨은 당시 505부대장 이재우대령(현 매일유업 감사)에게 확인해본 결과 전보안사령관이 80년 5월 21일은 물론이고 광주사태 전기간을 통해 광주에 내려간 사실이 없으며, 정특전사령관도 80년 5월 20일 오전 11시35분부터 오후 4시IS분까지 광주에 체재한 적은 있으나 5월 21일에는 서울에 있었음이 밝혀졌다고 반박, 허씨의 발언을 일축했다.한편 정호용 당시특전사령관과 윤흥정당시 전남북계엄분소장도 12월 7일 국회청문회에 나와 許씨의 주장을 강력하게 부정했다. 또한 정호용씨는 과잉진압의 책임이 인정된 공수부대의 지휘권문제에 대해 관례와 내규등을 제시, 『공수부대의 지휘권은 2軍-驛敎司-31사단으로 이어지는 공식지휘계통에 속해 있었다」며, 자신은 작전명령과 무관함을 주장했다.

그러나 윤흥정씨는 당시 지휘체계가 이원화되어 있었음을 시사, 정씨와 엇갈리는 진술을 했다. 本誌는 허씨의 주장이 자신의 좁은 개인 체험과 類推에 기반을 둔 것이고 아직 완벽한 검증을 받지 못한 것이기 때문에 이 주장의 전면적 수용은 유보하더라도, 허씨가 보안사 요원으로서 사태의 진실에 비교적 가깝게 접근할 수 있는 위치에 있었던 인물이라는 점을 감안, 시간이 갈수록 미궁에 빠져들고 있는 광주민주화운동의 진상규명에 한 참고자료를 보탠다는 의미에서 허씨의 주장 중 類推로 추정되는 부분은 제외하고 당시 그가 직접겪었던 체험부분만을 여기 에 게재한다. 허씨는 1987년 1월20일 방첩하사관3기로 임관했으며, 72년 5월8일 광주 보안부대에 배속된 뒤 81년 9월30일 전역할 때까지 이부대에서 대공수사요원으로 일해왔다.광주민주화운동당시에는 계엄사 전남합동수사단 광주사태처리수사국의 핵심부서인 특명반 수사관으로 재직했다.

『모조리 다 집어 넣어』

『許수사관 ! 이제 자네 소원 풀었네』1980년 5월 17일 국기하기식이 막 끝난 오후 5시경. 광주 505보안부대 대공과장 서의남중령이 차에서 내려 2층 부대장실로 올라가기 직전 현관에서 만난 나에게 다소 들뜬 어조로 툭말을 던졌다. 서중령은 전날 사령부 대공처장 李鶴接대령 주재로 열린 전국보안부대 수사과장회의에 참석한 뒤 막 귀대한 길이었다.『과장님,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자네 뜻대로 됐단 말이야. 모조리 처넣어」서중령은 이어 엄숙한 목소리로 부대장실에 갔다오겠으니 수사관 전원을 자신의 방에 집 합시켜 놓으라고 명령한 뒤 계단 위로 사라졌다. 피식 쓴 웃음이 나왔다. 사홀 전에 내가 건의한 문제학생 신병확보건을 이야기한 듯 싶었다.

당시 나는 종교계 및 학원가의 동정을「일일보고」형식으로 서면 보고하는 한편, 데모주동학생 명단 및 불순유인물 등을 첨부하여 이들의 활동이 극대화 극렬화되기 전에 신병을 확보, 「조치」를 취할 것을 건의한 바있었다. 지금도 자신있게 이야기할 수 있지만 당시 광주지역의 문제학생들은 사실 「중량급」은 아니었다. 이른바 「80년의 봄」은 광주에서도 피어났으나 이렇다 하게 특이한 점은 없었다. 전남대 조선대 등 학원가에서는 5월 들어 데모가 계속되었지만 그다지 염려할 정도는 못되었다. 몇몇 주동학생이 불을 당기면 학생들이 이에 동조하는 형태였다. 학생들은 정치일정단축과 계엄철회, 그리고 노동3권보장 등을 요구하고 나섰다. 주동학생들은 대다수가 자생적인 학술서클에서 배출된 학생들로 얼핏 보기에는 상당한 정도의 정치철학이 있는 듯싶었으나 내가 판단하기에는 아직 어린아이들에 불과했다. 막말로 이야기해서 몇대 쥐어박으면 깨끗하게 끝날 정도였다.뒤에 엄청나게 조작되기는 했으나 KT(金大中씨)를 추종하는 체계화된 조직도 광주에는 없었다. 다만 .당시 광주보안부대 수사요원들이 신경쓰는 부류의 인물들은 몇몇 학생들과 정치에 관여하는 가틀릭 신부들과 기독교 장로회 계통의 목사들, 그리고 녹두서점 등을 중심으로 하는 재야인물 등이 고작이었다. 일부 정치지향적 대학교 수들도 지난 겨을 한차례 보안대에서 「거른」 상태이기 때문에 전면에 나서지 못하고 있었다.

따라서 당시 보안대 수사요원들 사이의 분위기는 몇몇 「요주의 인물」들을 제지하는 사전예방, 그리고 경찰의 데모 저지에 대한 조언 및 조정업무의 필요성이 강구되었으면 하는 희망이 고작이었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나는 학원소요의 핵이라 할 몇몇 학생들에 대한 신병확보를 통한 조기예방활동을 강력하게 건의했었다. 이에 대해 서중령은 「시키지도 않은 엉뚱한 일을 한다」며 호통을 치곤 했다. 또 급하지도 않은 대공사찰 및 서류정리를 하라고 엉뚱한 지시를 내리기도.했다.부대장실로 올라가기 전 서중령이「자네 소원대로 되었다」는 말은 이런 맥락에서 비롯된 이야기였다. 그러나 단언하건대 어느 누구도 앞으로 닥쳐올 엄청난 사태를 예감한 수사요원도,또 계엄확대의 필요성을 이해한 수사요원도 없었다.나는 서과장의 집합명령지시를 외근 반장인 박준위에게 전했다. 서과장의 지시가 아니더라도 곧 순사회의가 열리기로 되어 있었다. 오전에 한차례,저녁에 한차례 열리는 회의는 수사관들의 계속 반복되는 일과였다. 오전회의는 예정사항회의로 참모회의가 끝난 직후에 열리고 저녁회의는 진행사항회의로 별다른 일이 없으면 오후 5시무렵에 열리는 것이 보통이었다.

보만 사령부의 지침

약 한시간 뒤 서과장이 희색이 만면에 가득한 채 나를 비롯해 수사관 6명이 대기하고 있는1층 대공과장실에 내려왔다. 그는 희노애락을 감추지 못하는 사람이다. 서과장은 자리에 앉자마자 준비사항이라는 말을 서너차례 강조했다.『사령부 지침을 이야기하겠다. 내일 새벽 00시를 기해 제주도를 비롯한 전국에 비상계엄령이 확대 실시된다. 특히 이번 확대계엄은 광주에 기인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사령부에서는 데모의 배후조종자 색출에 만전을 기하도록 지시했다. 얼마 전 서울이화여대에서 전국의 학생회 간부들의 비밀모임이 있었다. 여기에 참석한 대학생들이 광주를 기점으로 대대적인 데모를 하기 위해 은밀히 광주로 잠입했다는 정보를 사령부에서 입수했다. 그리고 특히이들이 광주를 대상지로 삼은 것은 그들 나름대로의 계획과 목적이 있는 것이다.허수사관, 이들이 왜 광주를 대상으로 삼았는지 알겠어 ? ‥‥‥』『김대중이란 놈 때문이다. 김대중이가 대통령에 출마하기 위해서 이들을 사주하고 있고, 더우기 데모자금까지 하달했다는 정보를 입수했다.내가 지금까지 여러분이 건의하던 데모주동자들을 사전검거하자는 주장에 아무런 조치를 취하지 않은 이유는 그 보고서가 살아있지 않은 죽은 보고서 였기 때문이다. 역시 사령부 요원들의 활동차원은 여러분 차원과 다르다. 여기 그 증거가 있다』서과장은 사령부에서 가져온 서류를 집어들었다. 8절지보다 조금 작은 그 서류는 표지에「예비검속」이라는 말이 들어 있었다『지금부터 여러분은 오늘 밤 안으로 이 명단에 있는 놈들 전원을 검거해야 한다. 전남도경과 협조해 경찰인원을 지원받을 것.

그러나 중요인물의 체포는 여러분이 직접해야 한다.그리고 목포를 비롯한 여수 강진 순천 분견대에 연락해 그쪽 지역 해당자를 검 거 하도록반장에게 지시하라』서 과장은 계 엄 확대를 알리는 새벽방송이 나가기 전인 새벽 4시까지 신병을 확보할 것과경찰을 믿지 말 것을 재삼 강조했다. 이때 나는 임무와 관계없는 질문을 한 가지했다. 김대중씨는 어떻게 되었느냐는 질문이었다. 이에 대해 서과장은 『사령부에서 벌써 검거했을 거야』하고 대수롭지 않게 대꾸했다.서과장은 이야기를 마친 뒤 밤 9시까지 부대로 재집결할 것을 명령했다.집에 가서 저녁식사를하고 옷을 두툼하게 입은 뒤 오라는 것이었다. 나와 박반장은 별도의 지시를 받았다. 전남 도경과 양경찰서(광주경찰서, 광주서부경찰서)에서 각 10명씩 도합 30명을 전남계엄합동수사단을 겸하고 있는 보안대에 보내 협조할 것을 지시하라는 것 이었다.저녁밥을 부리나케 먹고 귀대하니 서과장은 전남대와 조선대에 들어갈 것을 명령했다. 임무는 두 가지였다.지금 이 시간에 대학에 주둔하고 있을 공수부대를 '따라온 보안부대원을 찾아 앞으로 부대동정보고를 소속부대에 하지말고 505로 하라는 것과 각 대학에 있는학생들을 전원체포해 외부연락이 되지 않도록 하라는 것이었다.

예비검속자 체포

칠흑같은 밤이었다. 날씨가 흐린지 별빛마저 내리지 않았다. 전교사 헌병대 김중사와 서광주 경찰서 형사 등 2명을 보조요원으로 해서 조선대 캠퍼스로 들어갔다 자정 무렬이나 되었을까. 조선대 교정엔 얼굴에 혹칠을 한 공수대원들이 천막을 치고 있었다. 다른 한편에서는 늦게 도착한 병력들이 속속 트럭에서 내리고 있었다. 고도로 훈련된 특수요원 들답게 작은 소리 하나 없었다. 적막 속에서 민첩하게 움직이는 그들의 모습이 유령 같다고 느꼈다.7공수여단을 따라온 전주보안부대요원을 만나 명령계통을 505로 일원화할 것과 특히 공수부대 지휘관들의 동향을 예의 주시하라는 서과장의 지시를 전했다.이무 하나는 끝낸 셈이었다.기숙사에 가보니 대학생으로 보이는 학생이 니무침대 위에 담요를 둘러쓰고 공부를 하고 있었다. 문을 박차고 들어 갔다. 영문을 모르는 그 학생이 항의하자 성미 급한 정중사가 욕지거리와 함께 복도에 있는 연탄재를 얼굴에 집어던졌다. 아직 불씨가 남아있는 연탄세례를 받은 학생이 비명을 질렀다. 이름도 모르는 그 학생에게 이 자리를 빌어 늦게나마 사과를 드린다.그때 우리는 너나 없이 반쯤은 미쳐버렸턴 것같다.이미 공수부대 원들은 여러 명의 학생들을 붙잡아 무릎을 끓려놓고 있었다. 내가 이야기하지도 않았는데 이런 조치를 취한 것은 별도의 명령계통을 통해 지시를 받은 모양이었다.우리는 조선대를 나와 산수동 광주법원 부근으로 갔다. 지금은 이름이 기억나지 않지만 검거해야 할 대상자의 집이 있는 곳이었다. 5월이라고는 하지만 밤날씨는 꽤 추웠다.급습하는 예정시간은 새벽 4시로 정해져 있었다. 한두명이 아닌 상당수의 예비검속자들을일제이 체포해야 하기 때문에 서로 연락이 닿지 않도록 한순간을 정해 덮치기로 되어 있었다.시간은 아직 꽤 남아 있었다. 시동을 끈 차 안에서 우리는 몇시간동안을 덜덜 떨었다.

그러나 급습은 실패했다. 검속대상인 학생은 달포전 시골친구집에 간다며 집을 나갔다는 것이었다. 노모는 차분한 음성으로 사정을 전하며 도리어 밤중에 고생이 많다고 위로조로 이야기하는 것이었다. 학생의 공부방에서 책을 뒤지다가 우표수집책을 발견했다. 세계 각국의 우표들이 가지런히 꽃혀 있었다. 분량도 상당했다. 이런 섬세한 심정의 소유자가 거친 데모현장의 주동자라니‥‥부대로 돌아오기 전에 전남대에 들러 지시사항을 전했다. 마침 담당보안부대요원은 나와 방첩하사관 3기 동기생인 임 상사였다. 다소 빗나가는 이야기지만 우리 보안교육대 출신 요원들은 자부심이 대단했다. 우리 동기들은 모두 38명이었는데 높은 경쟁율을 뚫고 합격한 「인재」들로 학력도 대부분이 대졸 내지 대학중퇴자였다. 우리들은 스스로를 보안부대육사생이라고 부르며 일반임용된 다른 요원과는 자질이 다르다고 생각해왔다.

상궤 어긋난 「피의 일요일」

부대로 돌아오니 아수라장이었다.성과를 올린 조는 이미 조사단계에 들어갔으나 조사지침이 내려와 있지 않았다. 두들겨 패는 일밖에 달리 할 일이 없었다. 말하자면 신병수용단계였던 것이다.잡혀들어온 사람들은 학생들이 대다수였다.누가 누구인지 알 수도 없고 조사팀이 아니기에 인적사항을 알만한 처지에 있지도 않았으나 지금도 한 학생을 기억한다. 허00이라는 당시 전남대 학생으로 나와 종씨였다. 그 학생에게 괜히 버티지말고 다 불라는「충고」를 해주었다. 호감을 가진 사람에게 내가 늘상 들려주는 이야기였다.광주항쟁의 첫날인 5월 18일, 「피의 일요일」로 불리는 이날도 나는 미검자들에 대한 수색에 나섰다. 부대를 나온 우리팀(나와 헌병대 김중사, 서광주 서경찰관)은 교우관계와 주민등록지등을 중심으로 연고지 추적에 나섰다.시내 곳곳에서는 데모 양상이 심각하게 벌어지고 있었다.부대 1호차를 타고 함정으로 가던중 법원부근 동명다리를 지날 때 공수부대원에게 쫓기는 한 젊은이를 발견했다. 다혈질인 정중사가 차를 세우더니 학생으로 보이는 이 젊은이를 붙잡아 길바닥에 메다꽃았다. 쫓아온 공수부 대원에게 학생을 넘겨주고 차에 올라탄 김중사에게 「자네 맡은 일이나 잘하소」하고 핀잔을 주었다. 김중사는 씩 웃을 뿐이었다.

조선대 앞에서는거꾸로 경찰관이 학생들에게 뭇매를 맞고 있는 광경을 목도했다. 경찰관을 구출, 지프에실은 뒤 한적한 곳에 떨구어 주었다.사태는 걷잡을 수 없을 만큼 커지고 있었다. 할당된 임무를 수행하느라 눈코 뜰 새 없이 바쁘게 돌아다녔으나 한편으로 「이게 아닌데」하는 의구심이 고개를 쳐들었다.사실 보안대요원은 평온한 상태에서도 은근히 계엄을 바라는 편이다. 계엄하에서는 모든 조정 기능이 정보부에서 보안대로 이관되기 때문이다. 또 같은 보안대 안에서도 평상시에는 정보과에서 각 기관을 「장악」하나 계엄령이 발동되면 대공과에서 장악하게 된다. 우락부락하고 거친 대공요원에 비해 정보과 요원은 넥타이를 매고 다니는 「신사」들로 계엄이 발동되면 스스로도 일선에서 물러나는 경향이 있다. 따라서 대공요원 사이에서는 보안부대원이라고 다 보안부대 원이냐, 대공과 수사과 요원만이 진짜 보안요원 이라는 의식이 있다.

그러나 광주한쟁 직전의 계엄은 매우 미적지근한 계엄이었다. 개인적으로는 빨리 계엄이 끝났으면 하고 바라기도 했다. 계엄이 확대되기 전날인 516일밤 학생들의 「횃불 시위」는평온한 가운데 끝났고, 학생들은 당분간 쉬면서 정국의 추이를 지켜보기로 했었다. 굳이 계엄을 확대할 필요성도,공수부대완들이 출동해야 할만큼 시위 양상이 극렬했던 것도 아니었다. 그런데 18일의 상황은 상궤에서 매우 어긋나고 있었다.

공수부대의 시위진압방식

광주시민들은 19일 아침 금남로 가톨릭센터 앞으로 모여들었다. 누가 시킨 것이 아니었다. 전날의 악몽에 대한 불안 때문에 저절로 모여든 군중들 이었다.나는 19일 오전까지 미검거된예비검속자에 대한 추적수사와 아직도 밝히기 어려운 특별임무를 수행하느라 바쁘게 움직이다가 19일 오후쯤 되어서야 나의 「非認琴은거지」인 광주관광호텔로 들어을 수 있었다."광주관광호텔은 시가지 중심부에 위치하고 있다. 나는 「10·26」이후 계엄령이 발동되면서 구성된 합동수사단의 중추요원으로서 이 호텔 7층객실에 은거지를 정한 뒤 첩보수집 및 주요 인물에 대한 동태파악을 하고 있었다. 이날 오후는 주로 이곳에 머물러 있었기 때문에 시가지에서 일어난 상황을 비교적 자세하게 살펴볼 수 있었다. 구체적인 상황을 언급하지는 않겠다. 다만 지적하고 싶은 점은 공수부대원의 데모진압방식이다. 가시적으로 나타난 사실은 군중들을 고의적으로 자극하고 있지 않나 하는 것이다. 내가 보기에는 그했다. 이들은 시위양상이 극렬화해지면 빠져나가고 사람들이 웅성거리는 곳에서는 강경하게 진압,다시 빠져나가는 것이었다.아직도 많은 국민들은 광주항쟁의 원인이 계엄군의 강압적인 시위진압방식에 있다고 믿고 있다. 이런 면에서 우리 국민들은 순진한 측면이 많다.앞으로 하나씩 하나씩 내가 보고들은 사실을 토대로 광주항쟁이 이미 짜여진 「시나리오」에 맞추어진 것이 아닌가 하는 의문을 예시 하겠으나 어쨌든 당시 공수부대원의 시위진압방식을 보고는 큰 충격을 받았다. 공수부대가 최초로 투입된 것은 79년 「釜馬사태」에서다. 그 공수부대요원들이 다시 광주에 온 것이다.

그렇다면 부산·마산에서는 별다른 일 없이 넘어갔던 시민과 군의 충돌이 왜 광주에서는 그토록 엄청나게 일어났단 말인가. 부산:마산에서도 강경진압을 했다고는 하지만, 일면 시민들을 달래가며 시위를 진압하던 이들이 왜 광주에서는 일부러 시민들을 자극했는가.흔히 이야기되는 것처럼 악성 유언비어 때문인가.유언비어 문제만 해도 그렇다. 당시 광주에서는 온갖 유언비어가 나돈 것은 사실이나 유언비어에 대한 진원수사를 명령받은 적이 없다. 全斗煥씨에 대한 유언비어의 진원수사는 그토록 철저하게 다그치던데 비해 「경상도 군인이 전라도 사람의 씨를 말리기 위해 왔다」는 엉청난 유언비어에 대해서는 추적해보라는 말조차 없었다.그날 저녁 부대로 들어가니 보안사령부 대공과장 흥성율 중령 (육사 18기)이 내려와 있었다. 홍중령은 광주출신으로 보안사 내에서 호남출신으로는 드물게 「성공」한 사람으로 알려져 있다. 홍중령은 서과장 방에서 무슨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는데 동료 수사관의 귀띔으로는 홍중령이 「사태 감독관』으로 18일 밤에 내려왔다고 했다.

그때 어디선가 총성이 들렸다. 시계를 보니 바늘은 8시20분쯤을 가리키고 있었다. 첫 총성인만큼 기록해둘만한 가치가 있겠다 싶었다. 총성은 M-16소리였다. M-16의 총성은 단음이 나면서 「딱」하는 소리가 들리나 M-1이나 칼빈은 「삐-잉」하면서 파음이 들린다. M-16이 연발로 발사된 것임에 틀림 없었다.「폭도」가 부대가 위치한 곳에서 1km가량 떨어진 전신전화국 가까이에와 있다는 보고였다.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근접거리에 차를 세워 방향을 부대쪽으로 돌려놓은 뒤 몸을 낮추어 군중들아 밀집된 쪽으로 다가갔다.광주서구청 앞이었다. 엄청난 수자의 시민들이 횃불을 들고 모여 있는데 대낮같이 밝았다. 중앙분리대가 끊어지는 지점에 몸을 숨기고 20여분간 군중들의 동태를 파악했다.각목을 가진 사람들이 간혹 있었고 무언가 번쩍거리는 「흉기」를 소지한 사람도 눈에 띄었다. 칼인가 싶어 유심히 살펴보니 전화통에서 뜯어낸 알미늄이었다. 아직 시민들은 무장은 하지 않은 상태였다. 시민들 사이에 전화국을 습격하자는 주장과 살리자는 주장이 팽팽이 맞서 있었다.

잠시 지켜보다 귀대하니 홍중령과 서중령이 아직도 홍중령 방에 있었다.홍중령에게 보고를 하려는데 때 맞추어 505부대장 이재우대령(육사 15기,현 매일유업 감사)이 내려왔다. 보고대상자를 상급자인 부대장으로 바꿨다.『1만명이 넘는 상당한 인원이 전신 전화국을 기습하고자 하는 계제입니다. 그리고 이 문제를 놓고 자제하자는 측과 기습하자는 측이 의견대립을 벌이고 있읍니다』『기습할 것 같애, 안할 것 같애 ?『제 판단에는 하지 않을 것 같습니다』 ,『그런데 총소리는 뭐야, 누가 한 거야?』『어떤 총소리인지 모르겠읍니다』『장소는 어디야 ? 』『그것도 파악하지 못했읍니다』이때 서중령이 나서서 말했다.『부대장님, 까딱 없읍니다. 애들 딱총소리에 지나지 않는 거예요』부대장이 불쾌한 표정으로 눈짓으로 나를 부르더니 『앞으로 直報』해 하더니 자리를 떴다.

『사령관이 광주에 다녀가셨다』

5월21일 아침 505보안대 수사관들에게는 기쁜 소식이 하나 전해졌다. 아침회의석상에서 서의남과장이 『사령관님이 오늘 아니면 내일 광주에 오신다』는 이야기를 했다. 사령관이 온다는 것은 곧 일선수사요원에 대한 하사금 배당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했다.서과장은 「사령관님이 부대에 들르실지도 모르니 준비를 해야겠다』고 말하더니 『그런데‥‥‥ 아마 들르시지 않을거야』하고 혼잣말을 했다.보안대의 「준비」란 피의자들이 있는 지하실을 깨끗하게 정리하는 등 환경'정리와 함께 사태진행자 수사인원 등의 브리핑 자료를 마련한다는 것을 의미했으나 서과장의 말 속은 상무대 전투병과교육사령부만 들르실 것 같다는 느낌을 던져주었다. 따라서 수사관들은 「준비」에는 그다지 신경을 쓰지 않고 혹시 떨어질지도 모를 하사금을 기대 하는 분위기였다. 이날 저녁 회의에서 서과장은 『오늘 사령관념께서 다녀 가셨다』고 운을 뗀뒤 수사관들의 심리를 읽은 듯 『그런데 하사금은 가지고 오시지 않은 것 같애. 사령관님이 오셨다 가셨으니 곧 처장님께서도 내려오시지 않겠어』 한 뒤 업무사항을 이야기했다. 이날 회의에서 자위력 구사가 최종 '결정되었다는 서과장의 이야기를 들었다. 이말은 곧 공식적인 발포명령을 의미한다.

서과장은 외근근무를 하는 수사관들은 사복근무를 하기 때문에 폭도로 오인받을 수 있으니 특히 주의하라고 지시했다. 나는 이 말의 중요성을 깨닫고 『4.19당시의 최인규와 같은 꼴이되는 것은 아니겠지요』하고 묻자 서과장 「그때와는 사태가 다르다. 그리고 모든 문제는 사령관님이 책임진다』고 이야기했다. 이후 형식상 지휘계통인 이희성계엄사령관의 자위력울 위한 자구력이 하달되었으며 이날밤 계엄군이 퇴각을 시작하면서 전면적인 발포가 있었다.회의가 끝난 뒤 나는 집으로 전화를 걸기 위해 통신실 들렀다. 보안대내에서 일반전화사용을 꺼리기 때문에 수사관들은 흔히 통신실의 교환병에게 다그쳐 전화를 하는 것이 보통이었다.통신실 옆에는 바로 텔렉스실이 있다.나는 텔렉스의 경쾌한 소리를 듣는 것을 좋아하지만 그보다는 정보과나 보안과의 보고내용도 궁금해서 전문내용을 지켜보기를 즐겨한다.

물론 텔렉스 병이 「보시면 안됩니_다」고 항의하지만 나는 이를 가볍게 일축하곤 했다.505부대에서 사령부로 보고하는 지휘관 동향보고 및 주요언동사항보고로 나는 조금전 사령판이 왔다갔다는 사실과 전교사사령부에서 주요한 회의가 있었다는 사실을 재확인할 수 있었다.사람들은 일개 보안대 상사가 어떻게 그와 같은 고급 정보내용을 알고 있느냐에 의문을 품고 있는 것 같다. 그러나 이것은 보안대의 기능을 몰라서 하는 말이다. 보안부대 요원은 시간과 장소, 출입하는 부서, 취급하는 업무 등을 타인과 타기관으로부터 추궁받지 않도록 되어있으며, 어느 곳에나 출입할 수 있다. 특히 보안과 요원은 지휘관의 동향에 대해 지휘관보다 오히려 더 잘 알아야 한다. 지휘관이 중요회의에 참석했다고 할 때 지휘관에게 회의내용을 물어보는 보안요원은 무능한 사람이다.

「폭도 분류심사」

계엄군이 철수한 뒤 광주는 시민들의 손으로 넘어갔다. 이른바 「광주 공화국」이 열린것이다. 이때부터 「광주」가 진압된 5월27일까지 나는 체포된 시민군의 분류심사및 그때그때 하달되는 별도의 특수임무를 수행했다.체포된 시민가운데 특이한 경우는 광주통합병원에서 시민군애 잡아 계엄군에 인계한 전옥주 및 ■■■이었다.이들은 광주항쟁기간 광주시민에게 끝까지 싸울 것을 선동하다가 수상하게여긴 시민군이 간첩용의자로 넘긴 사람들이었다. 당초 이들에 대한 수사는 동료수사관인 장모수사관이 담당했으나 서과장의 지시로 내가 잠시 맡은바 있다. 이때 서과장은 이들을 『최대한 김대중과 연계시키라』고 지시했다.조사 결과 전옥주는 간첩도 김대중 추종세력도 아니었다. 그녀가 시위에 참여, 군중을 선동한 동기는 미심쩍은 구석이 많았으나 이른바 「물건」은 아니었다. 이미 그녀는 동료수사관의 모진 고문으로 횡설수설하고 있었다. 오히려 의문이 가는 쪽은 ■■■이었다. 본적지 조회 결과 그녀는 가짜였다.혐의점을 확증시키지 못한 상태에서 군검찰에 송치했고 그후 내가 옷을 벗었기 때문에 추후 결과는 알지 못하지만 수상한 구석이 많았다.

22일 오후 5시무렵 서중령은 계엄군이 철수한 광주시내 시민군의 동태탐지를 나를 비롯한 4명의 수사관에게 명령했다. 시민군의 배치사항, 병력,소지화기 특히 중화기 소지 여부 등을 중점적으로 확인하라는 것이었다. 이틀날인 5월23일부터는 광주교도소에 수용중인 1백78명의 분류심사에 들어갔다. 서과장은 이날 아침 헬기안에서 나를 비롯한 6명의 수사관에게 이같은 지시를 내리면서 교도소내에는「폭도」이외에 기결 좌익수가 상당수가 수용되어 있으니 상황이 여의치 않을경우 모종의 조치를 취하라고 주의를 주었다.교도소에 도착해보니 수용자들의 꼴이 말이 아니었다. 유탄을 맞아 살이 썩어 들어가는 자가 있는가 하면 곧 숨이 끊어질 지경에 놓인 사람도 있었다. 이들을 한곳에 집결시켜놓고 환자는 손들어 보라고 하니 한명도 빠짐없이 고통을 호소하는 것이었다. 이 가운데 정도가 심한 3명을 통합병원에 이송조치했다.이들은 대부분이 담양 순천 등에서 광주로 통학하는 학생들이었다. 집으로 돌아가다 교도소 습격폭도라는 낙인이 찍힌 순진한 학생들이 많았다.시민군이 「탈취」한 차량에 올라타 우쭐한 마음에서 손을 흔들다가 뒤에 붙잡혀 이 사실을 인정하고 중량급 폭도가 된 학생, 제대로 말도 못하고 어물 어물하다가 얻어터지고는 폭도로 「만들어진」 학생, 이런 「관제폭도」들이 대다수였다..심지어는 중학교 학생도 끼어 있었다. 그 학생은 내가 책임진다며 현지에서 석방조치했다.내가 보안과 사무실에서 분류심사를 하고 있는 동안에 수용자 1명이 죽어 나갔다.시체처리는 어떻게 하느냐고 교도소측에 물어보니 담밑에 묻어버린다는 것이었다. 아마 이런 식으로 매장당한 경우가 꽤 있었을 것으로 짐작 된다.

광주가 시민군에 장악된 뒤 계엄군의 「수복」을 원하는 여론이 적잖이 일었다. 광주의 소식이 차단된 상태에서 국민들은 불안감을 가졌고, 광주시민은 물자부족에 시달리게 되었다. 계엄군이 광주외곽을 차단하고 있었으므로 외부로부터의 물자반입이 전혀 이루어지지 않았고,광주시내에서는 품귀현상이 일어났다. 광주는 「溫島」가 되어 버렸다 이야말로「위」에서 노리고 있는 점이 아니었을까. 일이 이렇게 흘러버렸으니 평정을 시켜야 되지 않겠느냐, 누구의 잘 잘못을,따질 것 없이 국가는 누란의 위기에 서버렸다, 강력한 위기처리기구가 필요하다, 이런 분위기를 잡아갈 수 있게 된 것이다.

도청 진압 작전에 투입

5월26일 방 나는 서좌남과장으로부터 도청진입을 명받았다. 공수부대「점프 팀」을 따라 20사단이 들어가기전에 도청에 들어가 「폭도」들이 남긴 서류를 확보하고 기자의 접근을 통제할 것, 그리고 시체가 있주면 없애라는 지시였다. 이에 앞서 CAC 공병대 폭약전문처리군속이 전남도청 지하실에 은밀히 침투, 폭약뇌관 완전제거 보고가 들어왔고, 저녁 9시에는 K-57비행장에 주둔하고 있는 공수부대원에게 도청내부 구조사업에 관한 브리핑이 있었다.27일 새벽, 막 진압작전이 완료된 도청에 투입됐다. 시민군 지휘본부인 도청서무과 사무실로 제일 먼저 뛰어 들어갔다. 아수라장이었다. 창문에 M-16을 맞은 시체가 겉쳐있었다. 서류는 보이지 않았다. 2층 도지사사무실을 거쳐 이방저방을 뒤지는데 어느 방인가 캐비닛 뒤에 시체 2구가 쓰러져 있었다. 최후까지 항전하다 쓰러진 시민군인 모양이 었다.도청 뒤에 붙어있는 도경쪽으로 향했다. 마당에 여나믄 정도의 관이 널려있었는데 악취가 진동했다. 관 하나에 시체가 3구씩 들어간 것도 있었다.서무과 뒤뜰로 돌아가니 여기저기에 쓰러져 죽은 시틴군 모습이 눈에 띄었다.도청에서 나와 YWCA쪽으로 가기위해 대기시켜놓은 차를 타려는데 어디선가 플래시가 터졌다. VPI통신완장을 두른 한국인 기자였다. 권총으로 위헙, 카메라를 땅바닥에 내팽개쳐 버리고 장화로 짓이겨버렸다. 아직도 어스름한 어둠이 짙게 깔려있었다.

YWCA빌딩에도 2, 3구의 시체가 2층에 널부러져 있는 것이 눈에 띄었다. 한편 다른 보안대수사요원은 광주 외곽 요소요소에서 시내에서 빠져나가는 사태가담자 색출작업을 벌였다. 洪南淳변호사 및 일가족이 이모수사관에 의해 송정리 검문소에서 체포된 것도 이날 아침이 었다.

『끼워 맞추기」식 수사

광주가 「진압」된 뒤 사태처리를 위한 수사국이 긴급 편성되었다. 보안대를·중심으로 안기부 검찰 범죄수사단 등의 수사요원 80여명이 당일인 27일 헬기로 505 보안대에 투입되었다. 수사국 국장은 보안사 기조처장 최예섭준장, 부국장에 최경조대령(최준장에이어 제2대 수사국장이 됨), 서의남 중령, 광주지검 김기준 공안검사 들이었으며 3개과 1개반 으로 직제가 편성되었다. 1과는 재야담당, 2파는 학생담당, 3과는 폭도담당 등이었으며, 그밖에 특명반이 있었는데 나는 바로 이 특명반의 중추적 요원이었다. 광주항쟁이 발발하기 이전이나 과정 중에도 어렴풋하게 느낀 사실이나, 나는 광주사태처리수사국 특명반 요원으로서 수사체계도를 작성하는 과정, 그리고 이 무렵 태어난 국보위의 지시를 수행하는 과정에서 점차 광주항쟁이 계획된 시나리오에 의한 것이라는 심증을 굳히게 되었다.

수사과정에서 가장 신경을 쓴 대목은 김대중씨와 범죄사실을 연계시키는 것이었다. 처음에는 광주에서 영향력이 큰 김성룡신부를 재야수괴로 정했으나 김신부가 광주를 탈출해 미검거된 상태였기 때문에 홍남순변호사를 수괴로 만들었다. 학생수괴로는 전남대 복학생인鄭東年씨, 폭도수괴로는 시민군 대장인 金宗培씨로 정했다. 이 수사체계도에 맞추기 위해 관련자들에 대한 무자비한 고문이 가해졌다.홍남순씨는 내가 담당하지는 않았지만 처가쪽으로 인척관계가 되기 때문에 주의깊게 살펴보았는데, 말 그대로 혹독한 고문이 가해졌다. 홍변호사에게 몽등이와 회유를 번갈아 가면서 겨우겨우 「틀」을 맞추어 놨는데, 군검찰관에 넘어간 뒤 홍변호사가 진술을 번복하는 바람에 다시 수사국으로 넘어왔다. 공소유지가 도무지 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홍변호사가 되돌아왔다는 이야기를 들은 나는 슬며시 지하조사실로 가보았는데 파김치가 된 홍변호사가 담당수사관이 작성해 준 진술서를 보고 그대로 베끼고 있었다. 같은 수사관의 입장이었지만 너무 한다 싶었다. 탈진한 홍변호사의 허탈한 표정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당시 서의남파장은 군재판부의 공판이 진행되지도 않은 상태인데도 사태 가담자의 형량이 기록된 쪽지를 가지고 다녔다. 이들의 형량은 505보안부대와 전교사, 군검찰및 재판부가 사전에 협의 미리 정해놓았으며, 공판일에는 피고인이 범죄사실을 시인하도록 수사관들이 법정주변에서 대기하며 분위기를 잡아갔다.

사실의 「조작」 「은폐」

이밖에도 어처구니 없는 사실이 많다. 전남도청 독침사건의 주범 장계범에 대한 사례가 대표적이다. 서의남중령은 독침사건 수사를 지시하는 대신 장계범의 신변보호를 잘 하라고 지시 하는 것이었다. 장계범은 말하자면 보안사측에서 침투한 프락치였던 것이다. 또 5월29일 정동련이 숙박했다는 완도읍 모여인숙의 숙박부를'찢어버리고 변조했다. 그의 알리바이가 성림,혐의가 없어지기 때문에 조작한 것이었다.수사의 골격은 이미 잡혀져 있는 것이었다. 그 체계에 맞추어 적당한 인물들을 묶으면 됐다. 이런 식의 수사가 그해 8월29일 수사국이 공식으로 해체될 때까지 계속되었다. 사태가담자들은 내란 국사범으로 치안본부 컴퓨터에 입력되었다. 이 작업이 수사단의 마지막업무처리였다.이런 끼워맞추기식 수사가 진행되는 한편 특명 반에서는 권력형 부조리를 척결하라는 국보위의 지시에 따라 조선대총장 朴哲雄씨, 전남일보사장 金宗大씨 등을 잡아들여 재산읜 일부를 몰수했다. 서슬퍼런 권력의 칼날이 마구 휘둘러지던 때였다. 특명반의 이름으로 못할 일이 없었다.학원가도 특명 반에서 한차례 「정리」했다. 전남대 민준식총장및 김동원 이방기 명노근교수등 수십명을 사태의 배후세력으로 지목, 평소 껄끄럽게 생각해온 이들을 강제로 사표를 내게 해 거리로 내쫓았다. 삼청교육및 공무원숙정작업에도 깊이 관여했다. 무소불위의 힘 앞에 나는 깊숙이 빠져들어 가고 있었다. 당시 국보위에서는 전남도에 전모대령을 파견, 행정전반을 지휘 감독했다. 앞으로 기회가 주어진다면 나는 이때의 기록을 숨김없이 말하고 싶다.

鄭雄 장군 납치, 고문

훨씬 뒤에 일어난 일이지만 나는 31사단장이었던 鄭雄장군(현 平民黨 국회의원)을 81년에 상부의 지시에 따라 납치, 강제로 11대 국회의원선거에서 입후보 사퇴케 한 장본인이라는 사실을 밝혀두고 싶다.당시 정 웅장군의 국회의원 입후보문제를 「위」에서는 상당히 골치를 썩이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나는 K-57비행장에서 정장군을 납치, 입후보사퇴를 종용하라는 지시를 받았다. 경우에 따라서는 없애도 상관없다고 했다. 병 신을 만드느니 차라리 없애는 것이 낫다는 것이었다. K-57 귀빈실에서는 尹誠敏장군이 최종회유를 했으나 실패 한 뒤 였다.윤장군이 비행장 트랩에서 떠나는 순간 정웅장군을 승용차에 납치했다.나는 내심 작정해둔 방법이 있었다. 그것은 골프채로 발바닥을 때리는 고문이었다. 손바닥 발바닥을 때리는것은 통증이 무척 심하나 고문의 후유증은 없다. 이 점을 나는 노렸고, 의도는 맞아 떨어졌다. 정장군은 「항복」을 했다.최근에 나는 정장군을 만난 적이 있다. 인사를 드린 뒤 당시 이야기를 했더니 『이 사람아, 그때 정말 아팠네』하고 말하는 것이었다.정장군의 후보사퇴를 시키기 위해서는 인감도장이 필요했다. 선거관리위원회에 취소신청을 하기 위해서였다.인감도장은 정장군의 부인이 가지고 있었는데 당시 부인은 선거사무실에서선거운동원과 함께 있어서 감쪽같이 빼오기가 힘들었다. 이 임무는 다른 수사요원이 맡았는데 가만히 들어보니 포르말린을 사용해 마취시키겠다는 것이었다. 깜짝 놀라 내가 이 임무도 맡겠다고 이야기했다. 포르말린은 할량이 지나치면 치사상태에 빠질 위험성이 있기 때문이다. 결국 이 임무도 내가 맡았다.원계획은 정장군을 미국에 보낸다는 것이었는데 이야기가 잘 풀려 국내에체류하게 되었다. 그 이후는 정보과 요원에 말겼다.

역사의 직진이 될 수 없었다

끝으로 나는 이러한 글을 쓰게 된 동기에 대해 말씀을 드려야 할 것 같다. 지난 9월4일 광주민주항쟁 당시 시민군 상황실장인 박남선씨는 전두환씨를 비롯한 9명을 살인및 살인미수죄로 광주지검에 제소한 바 있다. 이 9명 중에 내 이름이 포함되어 있었다.이런 사실을나는 모르고 있었는데,며칠 뒤 중학교에 다니는 아들이 이 고소내용이 보도된 신문을 보고난 뒤 나에게 사실여부를 물어왔다.『나는 이순신장군과 아버지를 세상에서 가장 존경해왔다』며 아들은 광주사태의 배경과 당시 나의 역할, 그리고 역사적 평가를 물어오는 것이었다.당혹해하는 나에게 아들은 『지금 당장 이야기하시지 않아도 좋다』며 돌아섰다. 상명하복만요구되었던 당시 나의 입장과 아버지로서 떳떳하게 처신하고 싶다는 양립하기 어려운 갈등 속에서 나는 후자를 선택하기로 했다. 이미나는 81년 9월, 10여년간 입고 있었던 군복을 벗고 그동안 낭인 비슷한 생활을 해오고 있었다. 군복을 벗게 된 '사유에 대해서는 장황한 설명이 필요하겠지만 직접적인 계기는 수십가지의 모함이 담긴 투서때문이었다. 이 모함은 사실무근한 것으로 판명되었으나 나는 깨끗하게 옷을 벗었다. 그렇지 않아도 광주사태를 겪으면서 스스로에 대해 회의가 싹터왔던 터였다.어린 아들에 게마저 진실을 호도할 수는 없었다. 나는 광주민주화항쟁 당시 숨져간 수많은 민주열사들의 영혼 앞에 사죄하면서, 역사를 바로 세우는 길은 전두환보안사령관의 친위대원이 었던 나같은 사람이 겪은 사실을 그대로 공개하는 길밖에 없다고 판단했다.산화한 수많은 광주시민과 의미없이 숨져간 공수대원들의 영령 앞에 조용히 옷깃을 여미며 명복을 빈다. 505보안부대에서 나를 비롯한 수사관들에게 잔혹한 고문수사를 받은 모든 분들에게도 엎드려 사죄의 말씀을 드린다. 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