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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2007-05-30

[월간지 관련기사] 피터슨 목사의 광주 증언록/내가 겪은 광주, 80년 5월.아놀드 피터슨(사회평론 길, 1995.5)

본문

긴급입수·피터슨 목사의 광주 증언록

내가 겪은 광주, 80년 5월



아놀드 피터슨 미국 남침례교 목사. 80년 당시 광주에서 선교활동

이 글은 80년 5월 광주 시민에 대한 총격이 흔히 알려진 5월 21일이 아니라 5월 20일부터 시작되었음을, 그리고 광주 시민에 대해 무차별한 헬기 기총사격이 자행되었음을 주장하는 한 외국인 선교사의 기록이다. 피터슨 목사는 자신의 주장을 사진을 통해 뒷받침하고 있다. 이 피터슨 목사의 증언록이 광주 전 신문의 지면세 대서 특필되는 동안 서울의 거의 모든 언론은 피터슨 목사의 헬기기총사격 주장을 간단히 언급했을 뿐 철저히 외면하고 있다. 이 자료의 원문을 입수해 주요 부분을 공개한다.이 증언록은

1. 광주 시민에 대한 정확한 총격개시일

2. 광주 시민에 대한 헬기 기총사격

3. 광주사태에 대한 미국의 개입에 관한 실마리가 되는 증언이 실려 있다는 점에서 의의를 가지고 있다. <편집자 주>



저자소개

저자 아놀드 피터슨 목사는 1973년에 한국에 파송된 미국 침례교 선교사로 75년부터 81년까지 광주에서 가족과 함께 활동하였다. 그의 한국 이름은 ‘배태선’이다. 광주항쟁을 경험한 후 그는 90년 선교사생활을 은퇴하고 귀국할 때까지 대전침례신학대학에서 교회사를 강의하였다. 피터슨 목사는 자신이 보고 겪은 것을 기록하고 녹음하고 남겨놓았다가 90년 한국을 떠날 때 증언록을 작성해 번역자 정동섭 교수에게도 전달했다. 그는 현재 미국 일리노이주에서 목회에 전념하고 있다.

번역자소개

정동섭교수는 현재 대전침례신학대학의 교수로 재직중이다. 80년 5월 당시 주한 미대사관 글라이스틴 대사의 공보관으로 통역 및 번역 업무에 종사한 경력도 가지고 있다. 그 뒤 대전침례신학대학의 학생으로서 피터슨 목사를 만났다. 정교수는 최근 5·18 광주항쟁에 관한 검찰조사가 진행되고 있음을 보고 이 때가 아니면 번역의 의의도 없겠다 싶어 번역을 마무리. 공개하게 되었다고 말한다.

무엇인가 잘못되어 있다

5월 18일(일요일)

주일 아침 우리는 신문과 라디오를 통해서 계엄령이 확대되었고 많은 정치지도자들이 체포되었음을 알게 되었다. 교회 예배활동은 금지되지 않았기 때문에 우리는 우리의 계획을 추진시켜갔다. 우리가 여러 교회들을 방문하면서 볼 때는 어떤 소요도 거리에서 일어나고 있지 않았다. 그렇지만 도시 전역에 걸쳐서 특히 전도대회본부가 있었던 관광호텔 주위 도심가에는 매우 많은 수의 전투경찰과 군인들이 배치되어 있었다.주요 거리들은 군인과 전경에 의해서 차단되어 있었다. 우리는 소수의 학생들이 여기저기서 큰 도로로 진입하고자 하다가 전경이나 군인들에 의해 쫓기고 마는 것을 보았다. 이 무렵(약 오후 2시 30분) 우리는 학생들과 시위진압자들 사이에 어떤 격돌도 일어나고 있지 않음을 보았다. 학생들은 쫓기게 되면 뒤로 물러났다. 그런 뒤에 다른 곳에서 큰 도로로 진입하고자 시도했다.이 시점에서 전경과 군인들의 차이를 명백히 하는 것이 필요하리라고 생각한다. 전경들은 군중을 통제하고 학생시위를 진압하도록 훈련된 광주지역 경찰들이었다.

그러나 군인들은 구성, 훈련, 행동 면에서 전경과 매우 달랐다. 5월 18일 주일과 5월 19일 월요일에 광주 거리에 나타난 군인들은 5월 17일 부산지역에서 광주로 이동한 검은 베레모를 착용한 공수부대원들이었다. 그들의 목적은 계엄령 확대가 토요일 한밤중에 발효되었을 때 그후에 있을지도 모를 시위들을 막는 것이었다. 그들은 젊은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한국군 중에서 가장 잘 훈련된 공수부대원들이었다. 그들의 부대는 베트남전에도 참여한 바 있었다. 그들은 “죽이고 없애버리라”는 식의 전투훈련을 받은 사람들이었다.다음 며칠동안 이 집단과 그들의 후계자들이 행한 행위가 광주민주화항쟁, 혹은 광주민주화운동이라고 불린 사건들의 직접적 원인이 되었다. 5월 18일에 광주에 주둔한 한국군인들은 시위에 참여하지도 않은 사람들에 대해 터무니없는 잔혹행위를 저질렀기 때문에 일어난 것이다.

1988년 10월 13일자 『코리아 타임즈』는 다음과 같이 보도했다. “7공수여단의 33대대와 35대대는 5월 18일 새벽에 전남대학교와 조선대학교 구내에 주둔하고 있었다. 11공수여단은 5월 19일 새벽 2시 40분에 조선대학교로 추가로 배치되었다. 3공수여단은 5월 20일 아침 7시 35분에 전남대학교로 배치되었다. 공수부대원들은 거대한 저항들이 서서히 제어됨에 따라 5월 21일 오후에 시 외각으로 철수했다.”국회에 제출되었던 위의 증언은 매우 심각하게 잘못되었다는 인상을 준다. 이 증언에 내재한 의미에 따르면, 군인들의 행동은 캠퍼스 주변지역에 제한되어 있다.

그러나 사실은 그렇지 않다. 실제로는 공수부대원들은 도시 전역에 흩어져 있었다. 더욱이 그들의 행동은 시위자들을 진압하는 데에만 제한되지 않았다. 그들은 아무런 혐의가 없는 사람들도 무분별하게 공격했다.영어예배가 끝난 뒤에 바바라는 우리 차를 몰고서 아들 덕을 버스정류장까지 데려가고 있었다. 덕은 집에서 주말을 보낸 뒤 대전에 있는 하숙집으로 되돌아가는 중이었다. 나는 매튜스와 사우씨가 오후 7시 30분에 시작될 저녁 복음전도집회를 준비하면서 휴식을 취하도록 택시에 태워 관광호텔로 그들을 데려가고 있었다. 5시 30분쯤에 우리는 관광호텔에서 세 구획 정도 떨어진 곳에서 택시에서 내렸다. 거리가 군인들과 전경들에 의해 차단되어 있었기 때문에 거기에서 내릴 수밖에 없었다. 택시에서 내리면서 20대의 한 청년이 우리 옆을 지나가는 것을 보았다. 그는 평상복을 말끔하게 차려 입은 사람이었다. 우리는 이 젊은이가 경찰서 앞에 서 있는 세명의 공수부대원들에게 갈 때에 한 구획쯤 뒤에서 걷고 있었다. 공수부대원들은 그를 둘러싸고 조사를 시작했다. 바로 우리 앞에서 일어난 일이었기 때문에 우리는 지나쳐가기보다는 멈춰서서 지켜보았다.공수부대원들 각자는 대검을 꽂은 소총으로 무장하고 전투복을 입고 있었다.

그들은 즉각적으로 젊은 사람의 갈비뼈, 등, 어깨를 곤봉으로 치기 시작하더니 무릎을 꿇도록 했다. 그들은 그가 시위에 가담하고 있다는 것을 암시하면서 조사했던 것이다. 그 젊은이는 그저 집에 가는 일이라고 했지만, 그의 말은 전혀 먹혀들지 않았다. 그는 아무 잘못도 하지 않았으므로 떠나도록 해줄 것을 빌었다. 그들은 그를 때렸으며 허벅다리 윗부분을 차고는 대검을 불쑥 갖다댔다. 대검은 그의 목에서 불과 몇센티미터 앞에서 멈췄다.여기서 그 군인들이 그 청년이 시위에 가담했다고 믿도록 하는 타당한 근거나 물증이 전혀 없다는 것을 강조할 필요가 있다.우리가 거기 서 있을 때 많은 군중들이 이 모습을 지켜보기 위해 모여들었다. 몇몇 사람들은 공수부대원들에게 돌을 던졌다. 공수부대원 두명이 군중을 쫓아냈으며 다른 한명은 계속해서 그 젊은이를 때렸다. 매튜스, 사우씨, 그리고 나는 앞 길이 막혔기 때문에 이 모습을 서서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몇분이 지난 후 우리는 가만히 군인들 옆을 지나 다시 호텔로 가기 시작했다.

호텔 뒷문에서 두 구획 정도 떨어진 곳을 걷는 도중에 나는 다른 세 사건들을 목격했다. 매번 두명이상의 공수부대원들이 머리를 약간 기른 젊은이를 공격해서는 그들을 곤봉으로 쳤다. 각각의 경우에 공격받는 사람들이 어떤 도발행위를 저지른 것은 아니었다.앞문으로 가는 길이 전경들에 의해 차단되어 있었기 때문에 우리는 뒷문을 통해 호텔로 들어가야만 했다. 전경들은 지나가는 사람들을 막기 위해 방패를 들고선 어깨를 맞댄 채 거리를 이중으로 차단하고 앉아 있었다. 그들은 이 모든 사건들을 수동적으로 앉아 지켜보았다.호텔을 떠날 때 뒷문을 통해 나는 다시 공수부대원들이 젊은이들을 곤봉으로 치는 것을 두 번 보았다. 더욱이 많은 젊음이들이 거리의 여러 진입로에서 머뭇거리고 있었다. 그들은 분명 밖으로 나오고 싶어했으나 그렇게 하기를 주저했다. 나는 택시를 내렸던 곳인 세구획 떨어진 모퉁이로 되돌아가서 다른 택시를 타고 시민회관으로 갔다.나와 동승했던 젊은 여성이 바로 그날 밤에 통행금지가 있을 것 같다는 소식을 들었다고 했다.

이때쯤에 우리는 시민회관 앞 광장에 도착했다. 전경 일개 소대가 시민회관 앞 계단 아래에 앉아 있었다. 나는 그들에게 가서 지휘관과의 면담을 요청했다. 나는 광주 거주 침례교회인들이 저녁 7시 30분에 시민회관에서 전도집회를 개최할 예정이며 많은 사람들이 참가할 것 같다고 설명했다. 나는 통행금지가 선포될지도 모른다는 얘기를 들었다고 했다. 그런 결정은 집회에 영향을 줄 것이기 때문에 나는 계획을 짤 수 있도록 상황을 밝혀줄 것을 요구했다. 지휘관은 통행금지가 발표된 것은 아직 없다고 했다. 나는 있을 것 같으냐고 물었다. 그는 그럴 가능성이 있다고 대답했다.나는 성가대가 리허설을 끝낼즈음 시민회관에 들어섰다. 두명의 목사들과 얘기를 나눈 후, 우리는 전도집회 개최 예배를 예정대로 치르기로 결정했다.

그러나 성가대들의 젊은이들은 저녁을 먹기 위해 집에 돌아갔다오는 대신 시민회관 근처에 남아 있기로 결정했다.나는 택시를 타고 다시 관광호텔로 들어왔다. 호텔로 오는 길에 공수부대원들이 여전히―그들과 젊은이들 사이의 충돌은 줄어들고 있었지만―주둔하고 있었다. 그들은 서로를 분명 불신에 찬 눈빛으로 바라보면서 대치하고 있었다.다음날 아침 우리는 관광호텔에 있는 플로리다 출신의 전도단원들이 탱크와 트럭이 밤새 내내 도시중앙으로 이동하는 것을 들었다는 사실을 접했다. 이것은 앞으로 일어날 사태를 불길하게 암시하는 일이었다.

그들이 우리 아이들을 죽이고 있어요!

5월 19일(월요일)

월요일에 바바라와 나는 호텔에서 아침을 먹기 위해서 전도팀에 합류했다. 우리는 다시 세 구획 떨어진 곳에서 우리의 차를 정차시켜야만 했다. 호텔로 걸어가면서 우리는 주요 도로로 가는 모든 진입로를 차단하고 있는 두 줄로 서 있는 전경들의 대열을 지나야만 했다.아침식사 후에 우리는 예배를 드리기 위해서 광주기독병원으로 갔다. 예배 후에 우리는 병원 근무자들과 교제를 나누었다. 그리고 또다른 예배를 드리기 위해서 수피아여고로 갔다가 오전 11시 30분경에 팀원들을 호텔로 다시 데리고 왔다.나는 점심을 먹으러 집에 돌아왔다. 호텔에서 차를 타기 위해 오는 중인 오전 11시 50분에 나는 처음으로 장년들과 젊은 여성들이 공수부대원들에 의해 끌려가는 청년들을 돕기 위해 오는 것을 보았다. 이 특별한 상황속에서 한 젊은이가 두명의 무장 공수부대원들과 맞닥뜨리게 되었다. 그 청년의 가족인 것 같은 사람들이 그를 위해 나서려고 했다. 어머니로 보이는 사람과 자매들로 보이는 두명의 젊은 여성들이 공수부대원들의 팔을 굳게 잡고는 공수부대원들과 젊은이 사이에 몸을 들이대고자 하였다. 공수부대원들에게 저항하고 간청하는 동안 그들은 공수부대원들이 젊은이를 때리지 않기를 빌었다.집에 돌아왔을 때 나는 아침에 베츠 헌트리씨 부부가 한국인 친구들로부터 들은 몇통의 전화내용중 많은 젊은이들이 공수부대원들에게 맞아서 죽었다는 소식을 전해들었다. 그날 내내 우리는 군인들에 의해 저질러진 잔혹행위에 대한 몇몇 보고들을 들었다.오후 1시 30분경에 호텔에 돌아왔을 때, 팀원들은 나에게 자신들이 목격한 사건에 대해 얘기해 주었다.

공수부대원들이 많은 젊은이들을 8∼10줄로 나란히 세워 끌고가는 것을 보았다고 했다. 팀원들 중 한 사람은 그 모습을 이렇게 표현했다. “우리는 수백명의 학생들이 곤봉으로 맞고 차이고 총 개머리판으로 맞는 것을 보았습니다. 학생들은 옷을 다 벗기고 속옷만 입고서 허리띠로 손이 묶인 채로 맞았습니다. 그들은 트럭에 실려갔습니다. 전경들은 군인들이 이렇게 하는 것을 지켜만 보았습니다.”월요일 정오쯤에는 상황이 급속히 악화되고 있음이 분명했다. 신뢰할 만한 여러 자료들을 종합해볼 때, 월요일에 많은 사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