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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2007-05-30

[월간지 관련기사] 외국인이 증언하는 80년 5월 광주/광주는 전두환 집권의 단계적 쿠데타였다.마크 피터슨(신동아, 1989.…

본문

특별기획 80년 5월 光州 외국인이 證言하는

「光州」는 全斗煥집권의 단계적 쿠데타였다

「마크 피터슨」(美브리검영大극동문제연구소)



□編輯者 註

광주민주화운동 당시 주한 美대사 「글라이스틴」과 美8군사령관 「위컴」의 「광주」관련증언을 기록한 미국학자의 논문이 최근 발표돼 「광주사태」에 있어서 미국의 역할과 입장을 엿볼 수 있는 자료로 주목하고 있다. 웨스트뷰출판사의 광주사건논문집 『광주봉기』에 실린 「마크 피터슨」(Mark Peterson. 브리검영大 극동문제연구소)의 「미국과 광주사건」(Americans and the Kwan-gju Incident)이 그것으로, 「피터슨」은 지난 87년 「글라이스틴」「위컴」등 당시 한국내 미국 고위관리들의 인터뷰 결과를 토대로 △「12·12」와 「광주」는 全斗煥씨 등 신군부세력의 단계적 쿠데타의 일환이며 △「12·12」당시 미국은 代案이 없어 이 쿠데타를 인정할 수밖에 없었고 △미국은 대응방안의 하나로 逆쿠데타를 검토했으나 군부내 全의 지지세력이 확고해 이를 포기했으며 △80년 8월 미 국무성에서 全의 지지를 검토했다는 등 주목할만한 주장을 담고 있다.本誌는 「피터슨」의 「미국과 광주사건」전문을 완역한다. 중간제목은 본지에서 임의로 부친 것이다.

광주에서 일어난 시민·학생 봉기는 사건을 냉정하고 엄밀하게, 그리고 완전하게 기술할 의무가 있는 역사가들에게 일련의 흥미있는 문제들을 제기한다. 그렇지만 광주문제의 경우 감정적이고 편파적이며 부정확한 이야기들이 많았다. 사건이 일어난 지 얼마 되지 않았다는 사실이 정확한 역사기술을 어렵게 하는 문제의 핵심이다. 실제로 광주사건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는, 해결되지 않았다는 견해가 많았다. 정부의 정통성에 대한 문제, 軍이 그 일에 대해 참회하는 태도를 보이는가에 대한 의문, 그리고 응어리져 있는 광주시민들에 대한 제반 문제들이 모두 풀리지 않은 상태로 남아 있다.지금까지 알려진 사실들에도 비슷한 문제가 있다. 정부의 공식 설명은 목격자의 증언과 큰 차이를 보이고 있다. 신문 잡지 등에서 중요한 몇몇 기록들을 싣고 있다고는 하나 명쾌한 해답을 내리지 못한 채 남겨두고 있는 문제들 또한 적지 않다.

그렇지만 역사가들에게는 최근에 일어난 역사적 사건들을 기록하는 일에 유리한 점도 있다. 그 하나는 사건에 직접 관여한 사람들 중 몇몇과 인터뷰를 할 수 있다는 점이다. 이 논문은 정부의 공식 설명과 목격자의 증언, 각종 인쇄물, 그리고 당시 주한 미대사였던 「윌리엄 H. 글라이스틴」과 주한미군사령관이었던 「존 A. 위컴」장군 두 사람과 최근 가진 인터뷰에 근거한 것이다.

쿠데타의 시발점, 「12·12」

사건에 대한 여러 견해를 제기하고 다각도로 검토하기 전에 먼저 사건의 개요를 설명해야 하겠다. 광주문제는 역사적 배경을 알아보고 그 연장선상에 놓고 보는 것이 중요하기 때문이다.먼저 1979년 10월 26일 있었던 朴正熙대통령 암살에서부터 이야기를 시작해야 하겠다. 이 사건에서 그해 12월 12일 全斗煥소장이 주도한 군사쿠데타의 길을 열렸다. 그 쿠데타에서 육사 11기 출신의 全장군과 그의 동료들이 군부를 장악했다. 그 쿠데타는 처음에는 제한된 범위에서 시작됐으나 계엄령하에서 점차 사회의 모든 분야를 장악해나갔다. 그들이 처음 내세운 명분은 사회정화였다.군으로 돌아가겠노라는 의사를 밝히면서도 그들은 12월 12일부터 이듬해 5월초까지의 기간 동안 영향력을 키워갔다. 全의 개인적 세력도 그에 따라 증대됐다. 4월 중순, 그가 중앙정보부의 지휘권을 장악하자, 이제 그의 정치적 야심에 대해 의심하는 사람은 거의 없게 됐다(미국은 이때 공식적으로 또 공개적으로 그 행위를 비난했다). 일부 민간조직들은 「군의 정권 장악으로 너무나 얼룩진」한 나라에 생각할 수도 없는 사태가 또 일어날까 우려하면서 조직을 동원하여 계엄령 철폐를 요구해나갔다.캠퍼스를 가득 메운 학생시위의 물결은 거리로 흘러넘쳤고, 5월 15일 절정을 이루었다. 한편 교수와 종교 지도자, 작가들은 계엄령의 종식을 요구하는 청원서에 서명했다. 국회의원들도 돌아오는 월요일, 즉 5월 19일에 계엄령 철폐를 요구하는 결의안을 통과시킬 것이라고 발표했다.

5월 16일. 금요일이었던 이날은 1961년에 일어났던 군사쿠데타 19주년 기념일이었는데 지나치게 고요했다. 학생 지도자들은 군부의 조작과 불순분자들의 선동에 휘말릴 것을 우려하여 모든 시위를 철회했다. 5월 17일 토요일, 학생대표들은 앞으로의 일을 의논하기 위해 이화여대에 모였다. 그 회의장에 군이 난입해 들어감으로써 군의 의도는 처음으로 명백히 드러났다. 학생들 중에는 정부를 더욱 밀어붙여야 할 상황이니만큼 보다 대대적인 시위를 벌여 계속 압력을 가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측도 있었다. 그러나 또 다른 편에서는 군의 세력 전모가 다 드러나지 않은 상태에서는 보다 신중한 접근을 해나가야 한다고 주장했다. 결국 후자가 옳았음이 판명되었으나, 애석하게도 때는 이미 늦어 있었다. 군인들이 회의장에 난입하여 학생들을 거의 전부 체포해버린 것이다. 겨우 몇몇만이 창을 깨고 나가 탈출할 수 있었다(당시의 학생회의에 대한 자세한 사항은 그날 탈출에 성공하여 몇 달동안 숨어지냈던 한 참석자로부터 들은 것이다).

그날 밤 늦게 金大中, 金永三, 金鍾泌 등 3김씨가 체포됐다. 계엄령이 전국으로 확대됐다. 서울에서의 시위 진압은 효과적이었다. 공수특전부대가 주요 캠퍼스에 배치됐다. 검은 베레가 그들의 소속을 말해주었다. 정규군 부대는 나머지 대학의 캠퍼스에 진을 쳤다. 운동장에 설치된 텐트가 두드러져 보였다. 군인들은 문마다 돌아다니며 출입을 통제했다.

거칠고 무자비한 진압

이런 전법은 다른 지역에서는 성공적으로 수행됐으나 광주에서만큼은 크게 실패했다. 광주에서는 이미 시위가 캠퍼스를 넘쳐 나와 도청 근처 중앙로로 집결해가고 있었다. 시위를 캠퍼스안에 묶어두는 것이 이미 한발 늦었음을 깨달은 군부는 서울에서 사용한 것 보다 거칠고 대대적인 공세를 취하기로 했다.5월 18일 일요일 오후 3시경, 공수부대가 진입, 소규모로 모여 있는 시위군중들을 해산시키고 거리를 돌아다니며 시위군중들은 가까이 있는 건물로 쫓아들어가 거기 있는 사람들을 시위 여부와 관계없이 모조리 곤봉으로 치고 때렸다. 그들의 무차별 폭력은 그렇지 않아도 달아올라 있던 학생들의 가슴에 불을 당겼다. 더욱 중요한 것은 일반 시민들조차 학생들의 분노에 공감하게 됐다는 사실이다. 그래서 시위는 다음날에도 계속했다.월요일이 되자, 시위 진압에 실패했음을 깨달은 공수부대원들은 폭력을 가일층 난폭하게 휘둘렀다. 그들은 학생·시민들에게 무차별 폭력을 가해 아예 거리를 싹 쓸어버릴 듯이 덤벼들었다. 화요일, 폭력은 점점 더 심해졌다. 어느 면에서 그들 공수부대원들은 그 지역 경찰들마저 따돌리고 있었다.

그러자 많은 경찰관들이 이 우직스러운 특수병력에 대항하여 시민과 합세하기 시작했다. 파출소와 무기고가 시민들에게 개방됐다.수요일에 시민들은 공수부대를 도시에서 완전히 몰아냈다. 이제 사태는 중대한 국면으로 접어들었다. 그 열쇠가 된 사건은 시민들의 도청점거였다. 도청은 공수부대의 본부였던 것이다. 도청 공격을 주도한 것은 택시운전사들이었다. 시내 반대편에 있는 무등경기장에 집결한 택시운전사들은, 부상당한 시민들을 병원으로 옮기던 동료기사들이 심하게 폭행당한 일에 저항하기로 한 것이다. 시내에서 가장 큰 병원은 도청 뒷편에 있었다. 부상자들을 병원으로 실어나르던 택시운전사들이 맞거나 죽임을 당했던 것이다. 택시운전사들은 대열을 짜서 광주 시내로 차를 몰았다. 그리고 도청 주변 방어망을 부수고 공수부대를 시 외곽으로 몰아냈다. 군대가 비무장 시민들의 조직적 항거에 패퇴한 것이다.

그 다음주, 그러니까 5월 27일 목요일 새벽까지, 시민들은 여러 가지 위원회를 조직해서 군과 협상을 벌여나가는 한편, 바깥 세상으로부터 철저히 차단되어버린 도시 안의 여러 일들을 관리해나갔다. 정부 보고와는 반대로 당시 상황은 무법천지가 아니었다. 즉석에서 조직된 위원회의 활동이나 시민의 협동정신을 매우 놀라운 것이었다. 협상을 바라는 시민도 있었지만 결국 군대가 다시 도시를 휩 쓸 것이라며 우려하는 사람들도 있었다.마침내, 대한민국 정규 국군 제20사단이 서울을 벗어나 광주로 투입됐다. 화요일 아침, 새벽 빛이 밝기도 전의 일이었다. 진압이 감행됐을 때 도청을 지키고 있던 시민들은 얼마 되지 않았었다. 거기서 30명 남짓이 목숨을 잃었다. 시민항거는 거점인 도청이 함락되자 군대는 시내 곳곳으로 진군, 다시 계엄령을 발동했다. 광주 시민 봉기는 이렇게 끝이 났다.당시 정부의 공식 설명은, 광주 시민들을 불순분자들이 선동하여 폭동을 일으켰다는 것이었다(불순분자란 통상 북한의 간첩이나 북한 동조세력들을 일컬을 때 쓰는 말이다). 특히 5월 18일 아침 일찍 체포된 김대중은 그가 연행된 이후에 시작된 시민항쟁을 사주했다는 혐의를 덮어썼다.

정부 발표에는 문제가 있었다. 실제로 항쟁 초기에 정부의 허위발표에 분격한 시민들은 그 발표를 방송한 광주 문화방송이 들어 있는 빌딩을 불태웠다. 수많은 사람들이 죽어갔는데 정부는 고작 시민 한 명과 군인 네 명이 죽었다고 발표한 것이다. 항쟁기간 동안 파괴된 주요 건물은 MBC건물과 세무서, 노동부 사무소뿐이었다. 목격자의 증언도 제각각이다. 앞서 말한 MBC의 경우만 해도 논쟁의 핵심인 사망자 수는 지금까지도 풀리지 않고 있다. 정부는 2백명 가량 사망했다고 하나, 2천명 가까이 죽었다고 주장하는 측도 있다. 보다 믿을 만한 목격자의 진술로는 당시 평화봉사단이었으며 현재 하와이대 대학원에 재학중인 「팀 원버그」의 글이 있다(그의 글은 하와이대 한국학연구소에서 펴낸 잡지 「한국 연구」11권에 실렸다). 그는 단 한 사람이 죽었다 해도 너무 많이 죽은 거이 아니냐고 말해 정부의 발표를 정면으로 공박하고 있다.한국인들에게 장례식이 얼마나 중요한 의미를 갖는지는 「원버그」나 「글라이스틴」대사의 말을 빌리지 않아도 잘 알 수 있다. 예컨대 한국인들은 1960년 4월 19일 숨진 순교자들을 특별한 곳에 묻어 명예로운 죽음을 기리고 있다. 광주 희생자들의 죽음이 정당한 명예를 부여받지 못하는 한 광주사건은 끝나지 않을 것이다. 요컨대 몇 사람이 죽었는가를 따지기만 하는 일은 의미가 없다는 말이다. 그런데고 많은 유가족들이 가족의 죽음을 숨기고 있는 듯하다. 정부의 보복을 두려워하기 때문이다.

「글라이스틴」과 「위컴」의 證言

목격자들의 증언 중에는 미국의 개입 여부에 대한 것도 있다. 몇몇은 군의 장비가 미국에서 공급한 것이라는 지적을 한다. 미 국무성은 그동안 개입사실을 거듭 부인하고 공수부대의 행동조차 알지 못했다고 했지만, 20사단이 광주 탈환을 위해 한미연합사에서 벗어나도록 한 점은 시인해왔다.미국정부와 한국에 파견돼 미 대표들의 역할은 심한 비판을 받아왔다. 최근 「윌리엄 글라이스틴」대사와 「존위컴」장군은 그들 편에서의 이야기를 풀어놓기 시작했다. 「글라이스틴」은 자신의 임기중 한국에서 일어난 주요 사건 네 가지에 관련된 세부사항 일부와 자기 편에서 본 이야기를 글로 써냈다. 1987년 초, 「글라이스틴」대사와 「위컴」장군은 광주문제와 관련해 나와 논의하기로 했다. 현직 육군참모총장이 자신의 과거 행적에 관한 인터뷰에 응했다는 것은 특별히 의미있는 일로 여겨졌다. 두 사람 다 솔직했으며, 잘못된 기록들을 정정하는 데 성의를 다 했다. 광주항쟁과 1980년 군사쿠데타 이후 소문으로만 떠나녔던 것들이 언급됐다.「위컴」은 모범적인 군인의 자세로 사실에 입각해 이야기해나갔다. 그는 조급한 판단이나 어설픈 추측에 기울어지는 일이 거의 없었다. 「글라이스틴」은 학자풍 외교관답게 진지하게 과거를 회상했으며, 당시 그들이 생각했을 법한 혹은 마땅히 그랬어야 할 대안들에 대한 질문에도 기꺼이 응했다. 두 사람은 그들이 긴밀하게 협조했으며 결정을 내림에 있어 서로 잘 융화했다고 말했다.

그들의 입장은 1979년 12월 12일의 쿠데타로 전두환이 한국군의 실권을 완전 장악했고 너무 치밀히 실행해간 탓에 이를 받아들이는 일밖에 다른 방도가 없었다는 것이었다.비록 1980년 5월의 광주항쟁을 잘 처리하지 못한 것이 신군부세력 편에서 보면 결정적 실패였고 광주의 상처는 아직도 정부를 크게 괴롭히고 있지만, 광주 진압은 쿠데타의 한 단계였다. 12월에 시작되어 이듬해 8월 전두환이 대통령으로 선출되기까지 이어진 일련의 쿠데타 진행과정 중의 하나였다는 말이다.미국의 태도에 대한 비판은 12·12사건에 대해 미국이 취한 반응에도 쏟아지고 있다. 광주사건을 막을 수 있었던 가장 합리적인 방안을 12·12사태를 미연에 방지하거나 쿠데타에 대응하는 조치를 취하는 것이어야 했다는 주장이다. 미국 관리들이 쿠데타를 막기 위해 뭔가 더 적절한 행동을 취할 수 있었던 것은 아니었을까?그 사건에 대한 「글라이스틴」과 「위컴」의 해명은, 전두환과 그의 세력들이 너무도 치밀하고 계획적인 쿠데타를 실행해나갔기 때문에 한국군 수뇌부에서는 이를 저지할 수 없었으며 그런 마당에 미국이 무엇을 할 수 있었겠는가 하는 것이었다.

「光州진압」은 단계적 쿠데타

「글라이스틴」은 그날 저녁 7시 30분쯤 용산에 있는 미8군 사우드 포스트 벙커에 불려갔다. 「위컴」은 그보다 몇 분 전에 도착해 있었다. 그들은 거기서 DMZ 근방의 미군 부대와 한국군 병력이 주둔 또는 이동하고 있던 남쪽의 미군 부대로분터 병력이 서울을 떠나고 있다는 보고를 들었다. 그밖에 그들이 알 수 있는것이라고는 그 병력이 북한측 군대는 아니라는 사실뿐이었다. 밤 9시쯤 盧載鉉국방장관이 金鍾煥합참의장과 함께 벙커에 들어섰다. 곧이어 그들은 이동중인 병력이 보안사령관이자 계엄사령부 합수본부장인 전두환장군의 휘하에 있다는 사실을 알아냈다.한국군 수뇌부가 취할 수 있는 방법은 다른 부대를 불러내 서울 거리에서 全의 병력과 맞서도록 하는 것이었다. 처음에 그들은 이 계획을 실행에 옮기려 했다. 그러나 「위컴」장군이 새벽까지 기다리자며 그들을 만류했다(아마 전두환이 그 자신의 명령계통과 일선 보안장교들을 통해 그런 명령쯤은 얼마든지 뒤집을 수 있었음을 이미 그들을 알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그날 밤 늦게 노장관과 김의장은 쿠데타 지도자들로부터 벙커에서 나와 국방부 청사로 와달라는 전갈을 받았다. 「위컴」과 「글라이스틴」이 만류했으나 그들은 떠났다. 두 사람은 국방부에서 습격을 받고 체포됐다. 그리고 崔圭夏대통령과 함께 鄭昇和장군을 비롯한 몇몇에 대한 체포영장에 서명해야 했다(헌법이 지명하는 계엄사령관인 정승화장군이 대통령의 인가가 나기도 전에 쿠데타 지도세력들에 의해 폭력으로 체포됐다는 사실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어 정승화는 박정희대통령 암살사건에 연루된 혐의를 뒤집어쓰게 했다. 그는 朴이 총에 맞은 그날 밤 현장에 있었고(비록 그 옆 별관에 있었다고는 하지만)곧이어 계엄사령관이 되었는데, 12월 12일 체포·구금된 것이다.그가 체포된 이유에 대한 여러 가지 설의 중의 하나는, 그가 전두환을 동해안 외딴 지역의 사령관으로 전보시키려 했었고, 사실상 추방이나 다름없는 이 전보발령 소식이 전해지자 전두환은 곧 정승화에 대항하는 쿠데타에 착수했다는 설이다. 어쨌든 그에게 덮어 씌어진 혐의는 심각한 것이었다(그의 생명은 어쩌면 「위컴」이 구한 것인지도 모르겠다. 「위컴」은 한국측 사령관에게 생일카드를 보내는 관례대로 무심코 감옥속의 정승화에게 축하카드를 보냈었다. 이에 전두환은 즉각 「글라이스틴」을 찾아와 「위컴」의 내정간섭에 대한 해명을 강력히 요구하고 나섰다. 한편 정승화는 카드를 받고 눈물을 흘렸는데, 그 까닭은 그 카드를 자신이 처형당하지 않을 것이라는 「위컴」의 보증으로 해석한 때문이었다). 결국 그는 20년 형을 선고받았으나 병보석으로 풀려났다.

『나를 믿어 달라』

「위컴」은 쿠데타설을 한국군과 국방부에 진작 알려주었다. 그들의 반응은 무관심이었다. 마치 「한국인들 자신이 모르는 그런 일을 어떻게 미국인들이 알 수 있다는 말인가」라고 묻는 듯 믿으려들지 않았다.쿠데타 후 전두환은 먼저 「글라이스틴」을 방문했다. 그리고 하루인가 이틀 뒤 「위컴」을 방문했다. 그의 메시지는 「부패를 일소한 후 방영에 복귀하겠다」는 것이었다. 全은 『나를 믿으라. 우리가 하는 일을 지켜보라. 그러면 언젠가 나를 자랑스럽게 여기게 될 것이다』고 말했다. 「글라이스틴」과 「위컴」은 서류철을 뒤져 1961년 쿠데타 당시 박정희가 김종필을 보내 한 말의 기록을 찾아냈다. 당시 서울에 있는 유엔군사령관이었던 「카터 B. 매그루더」장군을 찾아온 김종필은 「부패를 일소한 뒤 병영에 복귀하겠다」고 말했다는 것이다. 이 기록은 「매그루더」가 하와이에 있는 태평양지역 총사령관에게 보낸 보고서에 적혀 있었다. 또한 이에 덧붙여 김정필은 『우리를 믿으라. 우리가 하는 일을 지켜보라.

그러면 언젠가 우리를 자랑스럽게 여기게 될 것이다』고 말했다고 했다.어찌되었든 全과 그의 동료들은 자신들이 전혀 정치적 야심을 갖고 있지 않다고 맹세했다. 그들은 쿠데타가 전적으로 군 내부의 일이라고 주장했다. 즉 부패한 민간지도자와 늙은 장성들을 몰아내기 위한 집안 청소라는 얘기였다. 군 수뇌부에는 24년이나 4성장군 자리를 지키고 앉아 있는 사람들이 있어 젊은 장성들의 진출을 막고 있었으므로, 그들 나이 든 수뇌부를 제거할 필요가 있다는 주장이었다.미국은 왜 쿠데타 임박설을 알고 있었음에도 그대로 있었던 것일까? 분명 그들은 속수무책으로 앉아 있지만은 않았다. 적어도, 가능하다고 생각되는 한도내에서 선택된 조치를 취했다. 공식적으로는 신군부세력들과 협력하는 듯했으나 사석에서는 그들에게 비판을 가했다. 신군부측은 이런 비판을 내정간섭이라고 일축해버렸다. 미국측 불만이 언론을 통해 새어나가기도 했었다. 그러나 워싱톤의 공식 비난은 없었다.「글라이스틴」은 자신의 임기중 한국에서 쿠데타가 발생할 경우에 대비해 비상책을 세워놓았었다. 그의 관심은 첫째, 싸움을 막고 둘째, 북의 남침을 방지하고 셋째, 정치의 공백상태를 극소화하는 데 모아졌다. 이를 위해 (1)유혈사태를 줄이고 (2)쿠데타 지도부와 관계를 유지하고(그렇지 않으면 영향력을 행사할 수 없을테니까) (3)미국이 어리석은 입장에 처하지 않게 한다는 목표를 세웠다. 특히 마지막 (3)항에 있어 「글라이스틴」은 1961년 쿠데타 때처럼 미국이 들어먹히지도 않는 명령을 내리는 바보가 되지 않도록 유의했다. 1961년, 「매그루더」장군은 실제로는 유엔군사령관으로서의 지휘권을 발동, 박정희장군에게 병영복귀를 명령했으나 결과적으로 아무 소용없는 순진한 행위로 그치고 말았다. 쿠데타세력들은 이미 죽음을 불사한 일대 결전까지 각오하고 있던 만큼 외국인의 명령 따위는 들으려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美國의 세가지 代案

미국의 입장을 정리해보자면 몇 가지 의문이 제기된다. 미국이 정말 미리 알았다고 해야 옳을까? 본디 쿠데타란 죽음을 각오하고 전투를 준비한 무장군인들이 갑작스럽고도 비밀스럽게 단행하는 법이다. 미국측에서 소문을 입수했다고는 하나 한국측에서 무시해버리지 않았는가.1979년 12월 12일 밤 미국이 뭔가 더 나은 조치를 취할 수 있었을까? 워싱턴은 군인들에게 원대복귀명령을 내리라는 메시지를 보내왔다는 사실을 「글라이스틴」은 상기시켰다.

그러나 1961년 5월 박정희의 쿠데타에서 그러했듯이 그런 명령은 무시되고 말았을 것이다.그렇다고 그 이후 미국이 어떤 일을 해야 했을까? 「글라이스틴」은 12·12사태 이후 일련의 사건들에 대한 미국의 결정권을 쥐고 있었다. 그는 먼저 힘의 균형이 어느 쪽으로 치우치는가를 판단할 만한 시간을 달라고 했다. 그리고 나서 쿠데타 배후세력을 확인하자 그들을 어떻게 다루어야 할 것인가를 결정했다. 그는 대화의 선을 터놓는 것이 영향력 행사를 가능하게 하는 열쇠가 된다고 생각했다. 전두환장군과 최규하대통령 양쪽에 다 접근하는 방식이 가장 생산적이라는 것이 그의 생각이었다. 「글라이스틴」은 12월 13일 아침 최대통령을 찾아갔다. 이미 그때 최대통령이 「독자적인 행동」을 취할 수 있는 인물이 아님이 분명하다고 그는 느꼈다.12월 13일 오후 전장군이 정동에 있는 미 대사관저로 「글라이스틴」을 방문했다. 그는 사태가 소장파와 노장파 군인들간의 싸움에 지나지 않는다고 말했다. 그는 민주화의 진전을 방해하지 않을 것이며 헌법규정이나 절차에 어긋나지 않을 것이라고 약속했다. 全은 계속해서 대통령이 될 생각이 없으며 실제로 자신은 장기집권을 획책한 박대통령에 비판적이라고 말했다.

다음 며칠 동안 새로운 쿠데타세력의 기반을 평가하고 그 정체를 파악해 낸 미국은 대강 세 가지 대안을 놓고 대책을 모색했다. 그 첫째는 적극적 개입이었다. 여기에는 역쿠데타 지원 방안도 포함됐다. 둘째는 절대 불간섭. 그리고 셋째는 경고를 한 뒤 불만스러운 태도를 보이며 사태를 지켜보는 것이었다. 이런 방안들에는 모두 한계가 있었다. 쿠데타세력들에 대한 한국군의 강력하고 일치된 지지 때문이었다.「글라이스틴」에 따르면 이때 미국은 전두환세력에 대한 군의 확고한 지지에 놀랐다고 한다. 미국은 역쿠데타를 수행할 만한 확실한 대체세력을 찾을 수가 없었다. 「위컴」은 어느 시점에선가 역쿠데타에 대한 지원을 요청하며 미국측에 접근해온 세력이 있기는 했다고 말한 바 있다. 그러나 그때 미국은 그들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들이 역쿠데타를 성공시키는 데 필요한 군부내 지지를 확보하지 못했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아무 조치도 취하지 않는다는 두 번째 대안은 별로 설득력이 없었다.미 대사관측은 워싱턴과의 상의 끝에 쿠데타 피해를 줄이기 위해, 평소에는 조용히 접촉을 해나가다가 필요에 따라 때때로 공개적으로 태도를 표명하는 방안을 택했다. 예컨대 1980년 4월 全이 대한민국 헌법을 위반하고 스스로 중앙정보부장 서리에 취임했을 때 미국은 이를 공개적으로 강력하게 비판했다.

『미국은 평화적 협상을 원했다』

쿠데타의 다음 단계는 3김씨의 체포와 계엄령 확대조치였다. 5월 17일 밤과 18일 아침 결행된 계엄령 확대는 광주항쟁의 불을 당긴 사건이었다. 미국은 3김씨의 석방을 요구했다. 이같은 요청은 李熺性계엄사령관과 최규하대통령에게 전달됐다. 워싱턴에서는 이 요청을 공개 발표했으며, 서울·부산·대구·광주에 있는 미 문화원을 통해 한국에서도 공개 발표됐다. 이같은 조치는 곧이어 발생한 광주사태로 일반의 주목을 끌지 못했다. 「글라이스틴」이 최근 기술한 바에 따르면 당시 대사관측에서는 광주사태에 즉각 주의를 기울이지 못했는데, 그 까닭은 『아이러니칼하게도 우리는 그때 김대중 체포에 강력 항의하는 데만 정신이 쏠려 있었기 때문』이었다.「글라이스틴」의 글을 계속 읽어보자.『잔혹한 비극이 이미 일어난 뒤에야 대사관과 미군사령부에서는 사태 발생을 알아차렸다. 우리가 모르는 사이에 한국 당국은 광주에서 발생한 격렬한,

그러나 특별히 폭력적이지는 않은 시위에 대처하기로 결정했다. 그들은 특수부대를 동원, 경찰력을 강화했다. 그 특수부대는 미군 사령부의 통제하에 있지 않았고 그런 적도 없는 부대였다. 공수부대의 시위 진압법은 매우 자극적이었다. 그들의 도발적 폭력은 광주시민을 분노하게 했고 폭력사태를 급격히 악화시켰다. 결국 정부군은 한동안 시 외곽 안전지대로 퇴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한국군이 광주에서 퇴각한 당시 미국이 취한 행동을 「글라이스틴」은 이렇게 묘사했다.『우리들이 미칠수 있는 영향력의 한계를 절감하고 사태의 추이를 파악하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에 당혹하여 서울과 워싱턴의 미정부는 우선 폭력사태를 개탄하면서 평화적 협상을 부추겼다. 우리는 협상을 중재하려는 가톨릭 주교의 노력을 강력 지지했다. 마지막 이틀간의 협상의 희망이 보이기도 했다. 한국군과의 대화를 유지하고 더 이상 심한 폭력이 일어나지 않도록 하기 위해 우리는 최선을 다했다』계속되는 글에서 「글라이스틴」은 광주에서의 미국의 역할에 대한 중요한 단서를 결과적으로 제공하게 된 일화 하나를 기록한다.『…우리는 양측 모두에게 사태의 평화적 해결을 촉구하고 북한에게는 관여하지 말 것을 경고하는 등 우리측 입장을 신중하게 정리해서 여러차례 발표했다. 한국 당국은 미국측 의견을 방송하고 유인물로 살포하는 데 동의했다. 미국의 언론에서도 이를 잘 보도했다.

그렇지만 우리의 의견을 듣거나 읽은 광주 사람들은 거의 없었다. 오히려 대다수가 미국이 폭압을 조장하고 지원했다는 그릇된 정보를 듣고 있었다. 누가 이런 비열한 왜곡에 책임이 있는지를 나는 단지 추측만 할 수 있을 뿐이다』물론 미국이 협상을 주장한다는 유인물을 약속대로 살포하는 일은 계엄세력 쪽에 유리한 일이 아니었다. 군부는 미국이 자신들을 지원하는 것처럼 보이기를 원했던 것이다.

『20師 투입 불가피했다』

미국이 한국군부와 결탁한 것이 아닌가 하는 의구심을 더욱 증폭시킨 사건은 20사단의 광주투입이었다. 서울지역 방위임무를 맡고 있던 20사단은 한미연합사 소속이었던 것이다. 「위컴」은 이에 대해 국방부의 요청에 따른 것이었으며, 사태의 확산을 방지하기 위해 군에 협력할 수밖에 없었다고 해명했다. 이에 덧붙여 「글라이스틴」은 20사단을 한미연합사에서 빠져나가도록 한 것은 광주에서의 협상이 결렬 되었을 때에 한한다는 조건부였다고 설명했다. 또한 「글라이슨틴」은 20사단이 폭동진압훈련을 받은 부대이므로 공수부대와는 달리 더 심한 폭력사태 없이 광주를 탈환할 수 있으리라 믿었다고 했다.미국은 군부가 협상의 기회를 주고 기다려줄 것을 촉구했다. 군이 얼마나 작전을 지연시켰는지 알 길은 없지만, 대사관측에서는 이틀쯤 시간을 늦추는 인상을 받았다고 했다. 결국 20사단이 광주를 탈환했다.「글라이스틴」의 보고는 이렇게 이어진다.『워싱턴의 지시를 받고 있는 상태에서 나는 즉시 한국정부 고위층에게 광주사건에 대해 사과할 것을, 아니면 적어도 깊은 유감의 뜻을 표명할 것을 강력히 주장했다.

그러나 그렇게 되지 않았다. 짐작컨대 조금이라도 과오를 인정한다면 권위에 손상을 입게 될 것을 우려했기 때문이었던 것 같다』「글라이스틴」은 광주항쟁에 대한 그의 회고담을 이렇게 마무리한다.『사건 당시에는 미국에 대한 칭찬도 비난도 없었다. 그렇지만 몇 달 지나지 않아 미국이 사건에 부분적으로 책임이 있다는 소문이 떠올랐다. 「전-레이건 정상회담」이 때맞춰 퍼진 이 소문은, 정상회담에 사람들을 자극하여 미국에 책임을 전가하는 잘못된 의견을 악의적으로 퍼뜨리고 있음을 시사하는 것이었다』나와의 인터뷰에서 「글라이스틴」과 「위컴」은 제멋대로 부풀려진 소문에 대해 우려를 표명했다. 그들은 역사가 잘못 기록되지 않을까 염려하는 것이었다. 야권이나 군부나 다같이 미국을 정치적 목적에 이용해왔다. 야권에게 있어 미국에 대한 비난은 곧 정부에 대한 비난이었다. 정부 펀에서는, 정상회담이나 다른 몇 가지 미국의 태도에 대한 긍정적 평가는 곧 그들이 미국의 지원을 받고 있다고 국민들이 믿기를 바란다는 인상을 주어왔다.지금까지 광주사건은 12월 12일의 군내부 쿠데타에서부터 시작된 일련의 사태중의 하나로 묘사됐다. 광주항쟁은 80년 8월에 일어난 일련의 사태들의 구심점이 되고 있다. 全은 민간정부를 허수아비로 내놓고 막후실력자로 행세하겠다는 생각을 품어오다가 결국은 전면에 나섰다.

全斗煥을 지지한 이유

全이 민간인 대통령이 된 과정 역시 「위컴」장군과 관련이 있다. 1980년 8월 「로스앤젤레스 타임즈」와 AP통신은 익명의 군 고위 장성의 말을 인용, 미국이 한국의 또다른 군사정부를 지지할 것이라고 보도했다. 그 기사에는 한국인들은 언제나 그들의 지도자 뒤에 열을 지어 늘어서는데, 全에게도 그렇게 하고 있다는 문장도 있었다. 나와 만난 「위컴」장군은 이 사건에 대해 각별한 관심을 보였다. 1980년 사태가 복잡하게 진전되자 「글라이스틴」대사는 「위컴」에게 정기적으로 기자들과 만나 사태의 진행과정에 대한 정보를 제공하려 일렀다. 당시 언론은 그때그때 정확한 정보를 취득하기가 힘들었기 때문이다. 8월에 「위컴」장군은 두 기자를 만났다. AP통신의 「테리 앤더슨」(최근 레바논에 인질로 억류되어 있는 바로 그 사람이다)과 「로스앤젤레스 타임즈」의 「샘 제임슨」이 그들이었다.그 인터뷰는 분명 「오프 더 레코드」라는 사전양해 아래 다만 사건의 배경 설명이라는 차원에서 이뤄졌다.

그렇지만 인터뷰 진행 도중 「위컴」은 대화를 녹음하도록 허용했다. 「앤더슨」과 「제임슨」이 인터뷰를 마치고 일어섰을 때 「앤더슨」이 마지막 질문을 던졌다. 『미국이 한국의 또다른 군 출신 지도자를 지지하느냐』는 질문이었다. 「위컴」은 국무성 안에서 이야기되고 있는 바를 전해주었다. 한국의 신군부세력은 선거를 포함한 합법적 절차를 거쳐야 할 것이며 국민 대다수의 지지를 받고 있음을 입증해야 한다는 내용이었다. 「위컴」은 만약 그런 조건이 충족된다면 미국은 아마도 새로운 정부를 지지할 것이라고 말했다. 두 기자는 이 말을 특종으로 삼고 「미국의 지지, 전두환을 승인하다」라는 제목으로 기사화됐다.

다음날 「뉴욕 타임즈」의 「헨리 스코트 스톡스」기자가 전두환장군과 인터뷰에 「위컴」의 인터뷰 녹음테이프를 가지고 갔다. 「스톡스」는 「앤더슨」「제임슨」기자와 같은 숙소에 머물고 있었으므로 테이프를 입수할 수 있었던 것이다. 「스톡스」는 테이프를 전에게 들려줬다. 그리고 테이프 속 음성의 주인이 누구인지 알겠느냐고 물었다. 「스톡스」에 따르면, 「앤더슨」과 「제임슨」기자로부터 테이프를 비밀에 부쳐야 한다는 사실을 분명히 들은 터였지만, 전장군은 이미 전날 보도에 인용된 「고위 장성」이 「위컴」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고 했다. 2주일이 채 못돼, 全은 최규하대통령을 사임시키고 스스로 대통령자리에 앉았다.한국정부 관리들의 조작이었든 미국의 실수였든 아니면 그 두 가지 요인이 합해진 탓이었든간에 다시 한번 미국은 군사 쿠데타를 지지하는 것으로 비쳐졌다. 「위컴」과 「글라이스틴」 두 사람 다 쿠데타세력을 지지할 의사는 없었음을 명백히 했다. 하지만 나중에 그들은 쿠데타세력과 협조해야했다. 다른 합리적 대안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들은 심한 충돌이 일어나면 불확실하거나 격심한 혹은 받아들일 수 없는 어떤 결과를 초래하지 않을까 두려워 모든 수단을 강구했다.

逆쿠데타계획은 실패했다

그들이 역쿠데타세력을 찾으려고 했음은 확실하다. 그러나 전두환의 쿠데타는 놀랄 만큼 효과적이었다. 쿠데타는 너무도 치밀히 계획하고 수행되었으며 지원도 완벽했다. 과감히 대안을 채택할 수도 있었겠으나 현실을 감안할 때, 그리고 북쪽의 남침 위협을 고려할 때 너무 위험했다.이렇게 되돌아보면, 그리고 급증하는 반미감정을 놓고 보면, 아마도 당시 미국이 「어리석어 보이는」상태로 있는 편이 나았을지도 모르겠다. 다시 말해 쓸데없는 일인 줄 뻔히 알면서도 쿠데타를 철회하라는 입장을 취하는 쪽이 나았을지도 모르겠다.그러나 「글라이스틴」은 쿠데타 이후에도 군부에 영향력을 행사하기 위해 그같은 대안을 선택하지 않았다. 그의 견해로는 미국의 영향력은 효과면에 있어서나 행사 범위에 있어서나 한계가 있었다. 「위컴」이 반미주의를 그다지 염려하지 않는 반면(그는 두 나라 관계에 있어 한 나라의 경제력이 다른 편을 따라잡으면 자연스럽게 생성되는 감정이라고 생각한다)「글라이스틴」은 시각을 달리하는 양편으로부터 동시에 미국에 대한 비난이 쏟아지는 것을 우려하고 있다.

사실에 관계없이, 야권과 정부당국 입장에서는 미국을 끌어들이는 것이 정치적으로 유리했다.광주항쟁의 역사적 실체는 사건에 연루된 각계각층의 한국인들이 숨김없이 자유롭게 진실을 이야기할 수 있을 때까지는, 그리고 숨겨진 문서들이 공개되어 연구되기 전까지는 완전히 드러날 수 없을 것이다. 현시점에서는 일부 목격자의 진술과 언론에 밝혀진 이야기들 그리고 이제 입을 열기 시작한 미국 관리들의 증언을 토대로 그 사건의 정확한 역사적 진실에 접근할 수 있다. 정부자료가 공개되고 그 사건에 직접 참여한 사람들이 자유롭게 진실을 공개하게 되면 보다 많은 사실이 밝혀질 것이다.사건이 발생한 지 일곱해가 지났지만, 광주항쟁의 객관적 역사를 기술하는 데 감정에 기울지 않는 냉정한 역사가들은 아직도 한계를 느끼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