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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2007-05-30

[월간지 관련기사] 외국인이 증언하는 80년 5월 광주/광주의 마지막날 내가 본 그 현장.헨리스코트 스톡스(신동아, 1989.…

본문

특별기획 80년 5월 光州 외국인이 證言하는

「光州」의 마지막 날, 내가 본 그 現場

헨리 스코트 스톡스 (당시 美「뉴욕 타임즈」東京特派員)



―예술은 하나의 사치이다. 그것은 침착하고도 깨끗한 손을 필요로 한다―    「귀스타프 플로베르」

얼마전 런던에서 만난 한 은행가는 자신이 얼마전 북한의 외채 10%를 사들였다는 놀랄 만한 이야기를 내게 들러주었다. 그의 말인즉 9천만달러에 가까운 북한외채를 담보로 약 8백만달러를 대출했는데, 만약 그 외채증서가 상환된다면 그의 은행은 8천2백만달러를 손쉽게 번다는 것이다.글세, 그러자면 몇해를 기다려야 할 것인지 나는 자못 의심스러웠다. 그런데 그가 아니었다. 그의 계산으로는 얼마 가지 않아 한국측이 정치적인 양보를 얻어내는 대가로 약 9억달러에 달하는 북한의 외채를 떠맡아두는 데 동의 할 것이고 그 정치적 양보란 남북한간의 오랜 냉전에 종지부를 찍는다는 내용이었다.그 은행가는 올림픽전부터 남북한 사이에는 개별회담이 있었는데, 쌍방은 평양당국이 올림픽 기간중 말썽을 부리지 않는다고 약속하면 남한당국이 북한의 외채를 떠맡아주겠다는 합의에 거의 접근했었다고 했다. 그런데 북한측이 외채상환액을 휠씬 넘는 30억달러를 요구하는 바람에 회담은 결렬되었다는 것이었다.이 친구는 끝으로 남북 쌍방이 조만간 다시 이야기를 나눌 것으로 믿고 있으며, 일본이 그 중개역을 맡게 될 지도 모른다고 말했다.

「光州」와 한반도

솔직히 말해 나는 그의 말에 회의적이었다. 그러나 며칠후 일본의 「다께시다」수상이 일본의 식민지배에 대해 북한에 사과한다는 보도를 접하면서 한반도문제에 새바람이 분다는 것을 느꼈다. 그리고 과거를 되돌아보면서 당시엔 사태를 비뚤게 봤을지도 모르지만 광주사태란 남북한관계에서 긴장완화를 선도하는 남한내의 한 전환점이 되지 않겠는가 생각해보았다. 다시 말해 나는 광주사태에 대해 아직도 회한을 품기보다는 미래에 대한 희망을 갖고 싶은 것이다.

이 글에서 나는 1980년 5월의 마지막 10일동안에 내가 보고 느꼈던 몇가지를 단편적으로나마 재구성해보고 또한 당시 내가 소속했던 「뉴욕 타임즈」지에 보도할 수 없었던 상황을 살펴보고자 한다. 끝으로 나는 광주사태가 아마도 한국문제에서 하나의 화해점 구실을 하게 될지도 모른다는 처음의 주제로 되돌아갈 것이다.오랫동안 전라도 사람들은 미국의 흑인들처럼 차별을 받아왔다. 내 생각이 잘못된 것이 아니라면 이제 金大中씨와 그 고향 사람들은 9년전에는 갖지 못했던 하나의 위치를 한국사회에서 차지하고 있다. 그들은 주로 자신의 용맹성 때문에 또한 金永三 등의 야당지도자들의 곁을 떠나지 않았던 「뉴욕 타임즈」의 힘도 약간 입어 총탄의 불길속을 뚫고 나와 오늘날까지 건재할 수 있었다.호남지방은 한국의 역사와 문화에서 독특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전라도 사람들을 한국의 다른 지방 사람들과 진정으로 결합시킬 수만 있다만 지금까지와는 매우 다른 보다 강력한 남한의 기틀의 마련될 것이며 남북대화에서도 상당한 영향력을 끼칠 것으로 생각한다.여기서 세가지 양해를 먼저 구해야겠다.

첫째 나는 여러해 동안 한국내의 일련의 사태와 접촉이 없었고 한국 방문도 몇차례밖에 없었다. 그 이유는 동경주재 미국대사였던 「마이크 맨스필드」씨를 통해 1982년 이후 한국정부가 나에게 위해를 가할지도 모른다는 정보를 입수했기 때문이었다.

둘째 나는 광주에서 폭력사태를 직접 본 것은 아니었다. NYT의 동료기자였던 沈在薰과 「르 몽드」지의 「필립퐁스」는 사태현장을 직접 목격했었다.그들은 거리에서 총탄이 오가는 속에 현장을 보았고 사망자들이 가득 찬 병원과 임시시체안치실들도 찾아보았다. 나는 이런 것들을 하나도 보지 못했다. 나는 광주시가 정부군에 점령되던날 밤에만 광주를 있었기 때문에 여기서부터 시작해보려 한다. 마지막으로 나는 모두에 인용한 「플로베르」의 金信을 지킬 수 있을지 자신이 없다. 그의 말대로 침착성을 유지하고 여러 생각들을 두루 배려할 수 있을런지. 「광주」는 나의 인생에서도 하나의 분수령이었다. 비록 9년이라는 세월이 흘렀다고는 하나 당시에 대해 조용한 마음을 갖기란 어려운 일이다.

光州의 마지막 날 오후

심재훈과 「필립 퐁스」그리고 나는 광주가 정부군의 손에 넘어가기 전날인 5월 26일 오후 늦게 서울로부터 막바로 차를 몰고와 뒷거리들을 통해 시내에 도착했다. 나는 애초 광주시 진입이 무척 어려우리라고 여겼다. 세계의 언론들이 1주일 이상 보도했던 격동의 현장에 도달하는 일이 불가능하지는 않아도 쉽지는 않으리라고 생각했었다. 그러나 그렇지가 않았다. 고속도로 검문소의 검문은 엄하지 않았다. 심재훈이 광주에서 30여㎞ 채 못되는 곳에서 軍으로부터 통과증을 얻었다. 우리가 광주에 도착했을 때 뒷길들은 열려 있었다. 운전기사는 철책이 있고 탱크들이 눈에 띄는 주요검문소들을 피하면서 길을 찾아냈다. 광주시는 꼭 당시의 언론들이 표현하던 「포위상태」는 아니었다. 시내로 들어가는 길은 여기저기 뚫려 있었다.우리가 현장에서 본 철책 쳐진 검문소 풍경도 내가 예상했던 것과는 달랐다. 물론 군인들은 모두 한국정규군 보병들로 탱크의 지원을 받고 있었다. 미국인들의 모습은 전혀 띄지 않았다. 나를 놀라게 한 것은 군인들의 모든 장비들이 미제라는 사실이었다. 소총은 말할 것도 없고 탄띠까지 미제 일색이었다. 「U.S.」라는 표지가 군인들의 카키색 요대 위에 흰색으로 뚜렷하게 새겨져 있었다. 북한은 그전에도 남한이 「괴뢰」라는 선전을 끊임없이 해오고 있었으니 군복에서라도 「U.S.」라는 이 숙명적인 두 글자를 떼어버릴 법 했을텐데도 그러지를 않았다. 한국군과 미국 사이에 긴밀한 유대가 있다는, 문자그대로 직접적인 표현은 아닐 지라도 詩的표현의 증거가 여기 있었던 것이다.물론 한미간의 군사적 유대를 나타내는 것은 이것말고 얼마든지 있을 것이다.

그러나 한국군의 지휘관들이 스스로를 이런 사소한 것부터 미군과 연계시킴으로써 북한의 선전에 어떻게 말려드는지에 대해 눈꼽만큼의 기미도 알아차리지 못하고 있다는 것은 생각해 볼 일이 아니겠는가.광주거리는 한마디로 살벌한 느낌이였다. 육중한 곤봉으로 무장한 우람한 몸매의 사나이들을 가득 실은 트럭들이 시내 한가운데를 누비고 있었다. 그들은 한 눈에 보아 폭력배이거나 깡패 비슷한, 힘으로 일을 보는데 익숙해 있는 듯한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어떤 제복도 입지 않았다. 가끔 운동모자를 눌러쓴 사람들이 보일 뿐이었다. 그들은 「코스타 가브라스」의 영화 『Z』에 나오는 엑스트라처럼 보였다. 내가 여기서 말하는 것은 그 영화에서 사회주의지도자(「이브 몽땅」)를 향해 광장을 가로질러 갑자기 질주해 온 소형트럭에 타고 있던 극우파들을 말하는 것이다(이 장면에서 한 친구가 몸을 밖으로 내밀고는 「몽땅」의 머리에 곤봉으로 치명적인 타격을 가한다).

누가 질서를 유지하는가

이들은 누구인가. 목포의 부둣가에서 멋모르고 뛰어든 일단의 사나이들인가. 그러나 그들이 거리를 지배하는 것을 보고 있노라니 하나의 의문이 가슴에 떠올랐다. 누가 여기서 질서를 유지하고 있는가 하는 것이었다. 이 친구들이 경찰을 대신하는 힘으로 등장했다면 광주는 앞으로 「민간인들에 의한 자치상태」에 있다고 할 수는 없을 것이다. 물론 거리에는 경찰의 모습이 전혀 보이지 않았다.귀에 들리는 소리도 또한 겁을 먹게 할 만했다. 가끔 「빵」하는 작은 소리가 들려왔다. 아직도 총격이 계속되고 있는지, 또는 닭장이라도 터는 것인지, 아니면 쇠그릇을 두드리는 것이지 알 길이 없었다. 시민군들이 교외에 있는 군인들에게 총을 쏘고 있는 것 같지는 않았다. 왜냐하면 시외곽 철책 검문소의 군인들은 위협을 느끼는 지는 몰라도 태도는 침착해보였기 때문이다.여기서는 시내로 다시 돌아가려는 기색이 전혀 보이지 않았다. 그 경계선을 사이에 놓고 광주시쪽에서는 일단의 민간인들 그리고 가끔 목에 흰컬러를 두른 천주교신부가 여기저기 밀려다니고 있었다. 어떤 사람들은 군부대와 이야기를 하고 있었고 또 어떤 사람들은 더 큰 무장충돌을 피하려고 중간역할을 맡아 나서고 있었다. 여기서는 어떤 총격도 오가지 않았다. 그러나 시내에 총이 나돌고 있다는 것은 누구나 알고 있었다. 누가 총질을 하고 있는가. 총성은 어디서 들려 오는 것일까. 그것은 수수께끼였다. 한마디로 무정부상태가 다가오고 있었다.

金大中계 개입설은?

심재훈과 「필립 퐁스」그리고 나는 시내 중심가에 있는 전남도청쪽으로 향했다. 출입은 통제돼 있었다. 그러나 좁은 복도를 지키고 있던 학생들에게 우리가 외국기자들이라는 것과 두 사람이 「뉴욕 타임즈」소속이라고 신분을 밝히자 그들은 곧 우리를 지휘부로 안내했다.내 생애에 있어 처음으로 나는 사실상 상대방에게 엄청나게 압도당했고 또한 위협에 직면해 있는 도시게릴라의 심장부 아니 신경중추에 와있는 나 자신을 발견했다. 적어도 이것은 소총으로 무장한 학생들의 안내를 받으며 우리가 2층으로 올라갈 때의 나의 소감이었다. 아, 여기는 내가 있을 곳이 못 되는구나. 빨리 빠져나가야 겠구나하고.나는 그 前週까지 서울에 있었다. 서울에서는 어째서 광주에서 유혈 폭력사태가 일어나게 됐는지를 파악하기가 어려웠다. 「사태의 책임은 누구에게 있는가」라는 근본적인 문제도 처음부터 풀어내기가 거의 불가능했다. 정부측―근본적으로는 全斗煥 휘하의 군정보당국―은 김대중이 폭력사태를 조장했다고 주장하면서 그가 내밀하게 또는 드러내놓고 북한과 공모하여 사태를 일으켰다는 뉘앙스를 풍겼다. 사태를 이렇게 보는 시각을 덮어놓고 물리칠 수도 없었다. 왜냐하면 광주사태가 평양의 손에 놀아나게 되리라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사태에 대한 이런 해석은 남쪽은 미군이 한국 군부와 기업계의 「꼭둑각시」들을 부리는 억압된 사회라는 북측의 선전과 꼭 들어맞는 것이었다.

다른 한편으로 보면 김대중은 폭력사태가 터지기 전에 이미 체포돼 있었다. 그가 구속중이면서도 그의 대리인들을 통해 폭력사태를 배후에서 조종했다고 주장한다면 이는 정부측 주장의 신빙성을 정면으로 뒤집는 결과밖에 되지 않는다. 문제의 핵심은 광주의 지도자들은 누구이며 그들의 정치적 동기는 무엇인가 하는 것이었다. 그들은 정치적 성분에서 어떤 위치에 속하는 자들일까. 이런 질문은 단순한 것같으면서도 바로 문제의 핵심이었다. 내가 알아내려고 했던 것은 아직 체포되지 않은 김대중의 대리자나 보좌관들을 통해 광주시내의 현장에서 목숨을 내걸고 있는 사람들에게 김의 지휘나 통제의 직접적인 줄이 닿아 있는지의 여부였다.만일 그런 증거가 있다면 서울의 정부측 발표가 그런대로 신빙성을 유지할 수 있는 가망성은 조금이라도 있게 된다. 그러나 그것도 학생지도자들이 극단적인 급진파들이거나 사실상의 마르크스주의자들이라고 할 때에나 가능한 이야기가 된다(이런 관측이 터무니 없다는 것은 당시 외국특파원들의 공통된 의견이었다.

그러나 알아볼 것은 알아봐야 했다. 사람의 목숨, 특히 김대중의 목숨이 걸려 있는 문제였다. 물론 광주의 이름 모르는 수많은 민간인들도 마찬가지였고, 그들은 얼마뒤부터 옥중 심문에서 크나큰 고초를 겪었다).물론 미국인 특파원들은 서울의 미국대사관이나 미군 당국과 접촉을 유지하고 있었다. 그리고 우리는 그쪽으로 부터도 회답을 얻어내려고 했다. 그러나 구원의 손길은 오지 않았다. 미국의 당국자들도 외국기자들 못지않게 무엇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 알지 못하고 있었고 아마도 그들의 암중모색은 더했을 것이다. 서울에 있는 외국인들은 장님이 장님의 길안내를 해주는 격이었다.당시 내 속을 뒤집히게 한 것은 우리가 만난 미국당사자들이 결정적인 단계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또는 왜 그런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를 알아보려고 하지 않았다는 데 있었다. 나의 친구인 미대사관 정치과의 「빌 클라크」참사관은 우선 질서회복(이는 정부군이 광주를 장악하는 것을 뜻했다)이 된 뒤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에 대해 알아보겠다는 것이었다.

이란에 발목잡힌 「카터」행정부

내가 광주로 내려간 것은 사태가 아직 유동적이지만, 나의 의문을 메꿔줄 정보의 입수가 가능한가를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또한 우리들 가운데 일부는 그때까지도 휴전을 성사시킬 기회가 있을지 모른다는 생각으로 기적이 일어나기를 기원하고 있었다. 실제로 「필립 퐁스」와 심재훈 그리고 나는 학생지도자들과 마주앉자마자 이 희망을 거론하였다.여기서 잠깐 배경설명이 필요할 것 같다. 당시 한국에서 무엇이 일어나고 있느냐는 워싱턴이건 뉴욕이건 전세계적으로 중요한 문제였다. 그러나 여기서 기억해둘 것은 이보다 훨씬 더 큰 문제가 임기만료를 앞둔 「카터」행정부의 관심사였다는 사실이다. 이란의 미국대사관 문제였다. 미국인들이 인질로 억류되자 미국의 관심사는 이란뿐이었다. 백악관이나 국가안보회의 CIA 국방성 등 미국의 집권층은 미국의 영도력에 대한 대규모의 도전에 직면했다. 이에 비하면 광주사태는 지엽적인 문제였다.미국정부로서는 사태가 수습불능의 지경에 빠지지 않게 하는 것이 핵심이었다. 현실적으로 말한다면 「카터」행정부는 질서회복을 위한 노력에서 全을 100% 밀고 있었다는 것을 뜻했다. 미국이 전을 좋아했느냐, 아니냐는 2차적인 문제였다. 즉 미국이 믿고 있는 가치, 민주주의에 합당하는 힘을 全이 대표하고 있느냐의 여부가 1차적인 관심사는 아니었다.

우선순위는 남한에서의 질서회복이었고 북이 비무장지대나 그밖의 다른 곳에서 모험을 할 수 있는 구실을 주지 않는다는 데 있었다. 미국은 이란문제에 손발이 묶여 있었다. 「카터」행정부는 한국에서의 지엽적인 문제가 확대되는 것을 바라지 않은 것이다.이렇게 말하면서도 나는 당시 서울이나 워싱턴에 있던 미국관리들을 덮어놓고 비난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당시로부터 「레이건」 및 「부시」행정부로 줄곧 이어지면서 미국의 정책수립자들에 가해지는 도전은 미국내에서의 가치와 해외에서의 힘이라는 자가당착적인 요건을 어떻게 짜맞추느냐 하는 것이다. 세월이 순탄할 때는 이 두 가지 요건은 순조롭게 발맞추어 나간다. 시국이 어려워지면 미국의 정책수립자들은 해회에서의 위기를 그럭저럭 넘기고 평온이 되돌아오면 보다 장기간에 걸쳐 그들이 신봉하는 가치들을 내세우려고 노력한다.가령 과거에 볼 수 있었던 영국식의 제국운영 전통이 부족하기 때문에 미국인들은 가끔 일을 터무니없이 벌여놓기도 한다. 광주에서의 예가 바로 그것이다(하긴 내가 알고 있는 한 사태의 진상은 오늘날까지 그 전모가 밝혀져 있지 않았지만…).

학생지도부, 미국에 구원요청

다시 학생들 이야기로 되돌아가자. 그들은 초조해 하고 있었다. 지도자들은 근 1주일간 잠을 자지 못하고 있었다. 우리와 함께 마주앉은 두서너명의 학생지도자들은 육체적 정신적인 지구력의 한계점에 달하고 있었다. 우리가 앉아 있는 동안 다른 학생들은 무기를 들고 주위에 서 있었다. 나는 그 무기들에 탈환이 장전돼 있는지, 또는 잠금장치를 하고 있는지 궁금했다. 그들은 보기에도 무기조작에 익숙한 것 같지 않았다. 기본적인 안전수칙에도 신경쓰지 않는 양 플래스틱장난감을 다루듯 소총을 움켜쥐고 있었다.나는 이들로부터 커다란 이야기를 기대한 것은 아니었다.―가끔 밖에서 폭발음이 들려왔다. 저 총성은 어디서 들려오는 것일까. 거리에는 소매를 걷어붙인 사람들이 이리저리 밀려 다니고 있었다. 그들은 이런 총성 비슷한 소리를 듣고도 조금도 개의치 않는 것 같았다. 나는 우리가 있는 2층회의실의 창문을 겨냥하여 누군가가 총을 조준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하고 생각해보았다. 실제로 한두 학생들은 창문을 등지고 서 있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여기서 그들은 일시적이나마 안전하다고 느끼고 있는 것 같았다.

그러나 나는 그렇게 못했다. 심재훈이 통역을 하는 동안 나도 정신을 집중시켰다. 학생들의 요구는 간단했다. 구원의 요청이었다. 그들은 우리에게 메시지를 당장 서울에 있는 미국인들에게 전해주기를 바랐다. 그 메시지는 미국대사 「글라이스틴」에게 전해져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들은 우리를 통해 「글라이스틴」과 미대사관 직원들에게 즉각 휴전을 성립시켜야 한다는 요청이 전달되기를 바랐다. 그들은 동시에 긴급구호를 요청했다. 병원은 부상자들로 가득차 있었고, 시체안치실로 넘쳐 흐르고 있었다. 날씨가 더워 이대로 방치할 경우 시내전체가 악취로 물들지도 몰랐다. 그러니 미국측이 개입해야 한다는 것이었다.수분 가량 지나는 사이에 나는 이보다 더 많은 것을 보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것은 환상이었는지도 모른다. 학생들은 미국을 신임하고 있었다. 그들은 서울에 있는 미국인들이 인도적인 구원과 살상의 종식을 호소하는 그들의 요구를 물리치리라고는 전혀 생각하지 않고 있었다.

통신두절, 차편으로 기사송고

9년이라는 세월이 지난 오늘, 하나의 뚜렷한 사실이 나의 마음을 친다. 그들은 어떤 경우에도 그들의 목숨을 건지려는 생각을 하고 있지 않았다(이로부터 24시간후 이 학생들은 아마 모두 죽었거나 또는 혹독한 심문을 받았을 것이다). 그들은 시내로부터 빠져나갈 수 있는 어떤 안전통과도 요구하지 않았고, 정부측과의 협상에 증인이 돼달라는 부탁도 하지 않았다(그러기에는 시간이 이미 늦었다. 협상은 대부분 연로한 교인들이 맡고 있었다).학생지도자들은 사람들의 죽음을 막을 수 있는 구호를 바라고 있었다. 그들은 정치에 관해서는 완전히 천진무구한 청년들이었다. 한국은 어차피 한국이고 미국이 아니라는 것, 서울에 있는 미국인들은 무슨 일이 있어도 全에게 어떤 명령을 내리지는 못한다는 사실을 조금이라도 생각해보았을까.미국측은 살상의 발단에 대한 책임이 있는 공수부대―광주시민들의 분격을 자아내게 하는 데 있어 그들의 역할이 제1차적인 것이었다―를 철수시키고 그 병력을 정규보병부대로 대체하라는 제안을 전에게 할 수 있었을 것이고 틀림없이 그러한 제시는 했다.

그러나 미국이 광주의 「진압」과정에 직접 개입한다는 것도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그렇기는 하나 나는 판단을 유보했다. 나는 신문기자로서 기사만 송고하면 되는 일이었다. 나는 재빨리 그들이 내게 들려준 이야기를 기사화하고 이를 심재훈에게 자동차편으로 넘겨주도록 부탁했다. 이것만이 유일한 송고 수단이었다. 당시 광주시의 통신수단은 두절상태였다. 시간은 이미 늦은 오후였고 그날밤으로 서울로 돌아가기에는 너무 늦은 시간이었다. 나의 동료 「필립 퐁스」도 심재훈과 함께 떠났다. 그도 그날밤에 기사를 송고해야 했다. 이렇게 해서 나는 광주시가 전의 손에 함락되던 날 밤에 광주에 혼자 남아 있게 되었던 것이다.

최후 공격의 밤

며칠전 심재훈이 김대중의 동조자들과 접촉하여 그들이 골라준, 광주시내 한복판에 가까운 골목길의 여관에서 밤의 장막이 내리는 것을 기다리는 동안 나는 사태를 더 명확하게 느낄 수 있었다. 여관 주인이 저녁이라고 건네준 식은 두알의 삶은 계란 껍질을 벗기면서―이때 시내에는 식량이 부족해 계란이라도 고마웠다―내가 얻은 결론은 대략 이런 것이었다.

▲김대중의 「기구」가 시내의 막후에서 조용히 순조롭게 활동하고 있다. 안전한 여관―전투가 벌어질 때 현장에서 너무 멀지도 않고 그렇다고 너무 노출돼 있지도 않을―을 찾아낸다는 기본적이고 필수적인 일에서 심재훈이 접촉했던 사람들은 자신감 있고 신속하게 행동을 취해준 것이라고.

▲행동에 앞장서 있는 세력은 김대중파의 사람들이 아니라 학생들이었다. 그러므로 김대중이 일을 조종했다는 생각도 크게 잘못된 것이다. 서울에서 나돌고 있던 식으로 광주사태를 해석하는 것은 거짓말의 잡동사니밖에 안되는 것이라고.

▲몹시 흥분해 있는 학생들과 침착한 김대중지지자들 간에는 놀랄 만한 차이가 있었다. 학생들은 기적이 일어나지 않는 한 희망은 거의 없었다. 김대중계 사람들은 앞으로도 견뎌낼 것이고 그들은 살아날 것이라고.여관주인이 내 방에 들어왔다. 몸이 건장하고 쾌활해 보이는 남자였다., 그도 일본말을 조금 알아 그것이 우리의 유일한 의사소통 수단이었다.『웬일입니까』하면서 그는 내 오른손 엄지손가락을 들여다 보았다.―나는 불안할 때면 손톱 주변의 살을 피가 날 때까지 뜯어내는 신경질적인 버릇이 있다. 그는 핏자국을 보았던 것이다.『괜찮겠소?』그는 아버지다운 몸매로 고개를 한쪽으로 기우뚱하면서 궁금하다는 듯 물어왔다. 나는 좀 신경이 날카로워져 있기 때문이라고 했다. 나는 속으로 이 양반은 광주시가 하룻밤을 더 무사히 견뎌낼 것으로 여기는게 아닐까 하고 생각했다. 시가 정부군의 손에 떨어진다면 무슨 일이 있어도 심재훈이 내곁에 다시 있어야 했다.

그런데 나 혼자이니 어찌할 바를 몰랐다. 나는 그전까지 광주에 와본 일이 한번도 없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나는 할 일이 있지 않는가.여관주인은 창문가로 가 차양사이로 밖을 내다보더니 『잘 돼 갈테지요』라고 말했다. 9년후에 내가 품게 되는 생각의 첫기미라도 느끼게 된 것은 아마 이 순간이었던 것 같다. 즉 광주의 진통속에서 신경이 날카로워진 외국인들이 아니라 한국인들이 그들 스스로의 미래를 결정하게 되는 그러한 한국이 앞으로 태어날 것이라는 생각이었다. 그 한국인들이란 전라도사람들이 건 한반도의 어느 여타지역의 사람들이든간에 상관이 없는 일이었다.갑자기 복도 끝에서 시끄러운 소리가 들려왔다. 창문을 열고 보니 여관 종업원 몇 명이 한 건장한 청년을 둘러 싸고 있었다. 그 청년은 한눈으로 봐 학생이었다. 사태의 초기단계부터 부근의 무기고에서 총기나 군복 등을 징발해 간, 우리가 이전에 보았던 학생들과 똑같은 카키색 군복 차림을 하고 있었다.여관종업원들은 이 청년을 계단밑으로 밀어냈다. 목조건물에 울려퍼지는 묵직한 군화소리가 들리더니 이 청년은 이윽고 밤의 어둠속으로 사라졌다. 여관주인이 돌아와 이야기를 들려주었다.『당신을 학생들 본부로 데려가겠다는 이야기였소. 당신의 의견을 듣고 싶다는 거요. 그래 헛소리하지 말라고 돌려보냈소』나는 이날 오후 늦게 보낸 기사가 어떻게 되었을까, 일이 이 정도로 진행되고 있다면 사태의 추이가 내 기사내용을 앞지르게 될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에서 『이 사태가 얼마나 더 지탱될 것 같소』라고 물어보았다.

만약 일이 그렇게 된다면 학생들의 호소는 결국 아무도 들어주는 사람이 없게 되고 미국인들 그리고 아마 한국인들도 이 사태의 핵심을 들여다볼 수 없게 될 것이다. 더욱이 미본토에서 1만마일 떨어진 곳에서 일어난 사태에 대해 재퍼슨주의자들에게 알릴 길이 전혀 없어지는 것이 아닌가….나는 내 엄지손가락을 다시 물어뜯기 시작했다. 여관주인이 웃음을 띠며 내게 다가왔다. 그의 손은 크고 단단했다.『어떻든 잠이나 잘 자시오. 좀 쉬는 것이 좋을 것 같소』

곡사포소리와 대전차포소리와

어떻게 해서 잠이 깼는지 모른다. 갑자기 나는 여관에 있던 모든 사람들이 일어나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적어도 나는 그때 그렇게 느꼈다. 모든 불은 꺼져 있었고 나는 어떤 불빛도 밖에 새나가지 않게 하라는 권고를 받고 있었다. 나는 비실비실 일어섰다. 밖은 칠혹같은 어둠으로 아무것도 볼 수 없었다. 침대에 다시 누웠다.멀리서 총소리가 들려왔다. 이번에는 닭장을 두드려부수는 듯한 소리는 아니었다. 분명히 총소리였다. 한국에서 내가 총성을 들은 것은 이때가 처음이었다. 묵직한 기관총소리는 어느 한쪽에서만 들려왔고 이에 응사하여 가끔 빈약한 소총소리가 들려오는 것은학생들이 쏘는 총성이라는 것이 명백했다.젠장! 시간은 바로 뉴욕에서 1판이 찍혀나올 시간이었다.

그런데도 나는 여기에 이렇게 갇혀 있다니. 공격이 시작되고 있는데도 나는 이 기사를 보낼 수가 없었다. 내 머리에 떠오른 첫 생각은 순전히 직업적인 것으로 신문기자가 곤경에 처할 때 느끼는 하나의 조건반사였다.이윽고 밤하늘에 소름을 끼칠 듯한 소리가 울려퍼졌다. 그것은 거의 광란에 가까운 여인의 목소리였다. 그 소리는 내 머리를 꿰뚫고 나의 다른 생각 모두를 내 머리 밖으로 몰아냈다. 나는 내가 해야 할 일이 무엇이었는지를 잊어버릴 지경이었다. 여인의 목소리는 그만큼 나를 죽여주는 것이었다.그 목소리는 계속 높아갔다. 칠흑같은 어둠이 마침내 광란의 오색찬란한 꽃으로 폭발할 것이라고 생각될 지경까지 그 목소리는 울려퍼졌다.그것은 『밖으로 나오시오, 밖으로 나오시오』라는 깨지는 듯한 목소리였다. 나는 한국말은 하나도 모른다. 그러나 가슴을 통해 듣는 소리는 있는 법이다.『광주시민 여러분, 군부대가 들어오고 있습니다. 밖으로 나오십시오. 밖으로 나오십시오』나는 창문가로 갔다. 밖은 여전히 칠흑이었다. 밖으로 나오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어리석은 제퍼슨주의자들인 학생들은 이제 그들 스스로를 지킬 도리밖에 없었고 육탄으로 총탄을 맞이할 수밖에 없었다.곡사포를 쏘는 듯한 소리도 들려왔다. 대전차포도 쏘고 있는 것 같았다. 「펑」하는 소리가 들렸다. 무슨 소리인지를 알 길이 없었다. 또 지금까지도 그때 들은 무슨 소리가 무슨 무기였는지 전혀 모르고 있다. 내가 그때 알 수 있었던 것은 그런 소리들이 점점 가까이 다가오고 있다는 것뿐이었다.확성기를 통한 여인의 목소리도 마침내 잠잠해졌다. 이제는 완전한 침묵만이 내려앉았다.

다음날 아침

아침이 빛이 어둠속으로 녹아들어갈 때 나는 하늘 높은 곳에서 처음으로 그것들을 발견했다. 승리의 분열식이라도 하듯 헬리콥터들은 매우 높게 떠있었다. 이른 아침의 햇살이 헬리콥터에 부딪쳐 눈부시게 반사되었다.헬리콥터의 비행음이 물러나더니 이번에는 더 낮게 뜨면서 다시 날아왔다. ―이렇게 해서 광주시는 이제 떨어졌다고 나는 확신하게 되었다. 이 순간 내몸속의 무엇인가가 부러져 나갔다. 그것은 한국에서 계속 취재하고 싶다는 내 의욕이 깨어져 나간 것이었을까. 아마 그럴지도 모른다. 나는 어느 편에 가담하기를 바라지 않았었다. 그순간 어영부영 그렇게 되고 말았다. 나는 앞날을 어렴풋이 내다볼 수 있었다. 그와 그 비슷한 친구들이 앞으로 몇해 동안 자리에 들어서게 되겠지. 김대중은 처형될 지도 모른다. 나의 최소한의 목표―나는 그 이상의 것은 넘보지도 않았지만―는 서울에서 취재본부를 계속하면서 정의가 마침내 이루어지는 것을 보려는 것이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당국자나 신문기자를 포함한 미국인들은 어떤 역할을 수행하지 않으면 아니되는데.광주는 내게 있어 개인적인 분수령만을 뜻하는 것은 아니었다. 어쩌면 그것은 한국에 있는 미국인들에 대한 갈림길을 뜻하는 것이었다. 앞으로 미래를 만들어나갈 젊은 한국인들은 그들의 가치기준을 찾으면서 결코 맹목적으로 외부인들에게 다시는 눈돌리려 하지 않을 테지. 학생들의 희생(밤의 찬란한 빛의 꽃으로 산화했던 그 목소리들)은 광주사태의 진상을 정확하게 아는 사람들의 극소수일지라도 근본적인 진실이란 파악하기에 어렵지 않다는 것―즉 한국은 한국인들의 것이라는 사실을 뜻하지 않을 수 없을테지. 미국인들은 이때 사태개입에 실패함으로써 이제 그들의 발언권을 상실해버렸던 것이다.아마 이 사태는 이렇게 될 수밖에 없었을 테지. 이제 때가 오면 그밖의 사람들―미국인들이 아닌 한국인들이 全과 대처하게 되겠지. 그렇다. 그렇게 되는 도리밖에 없을 것이다.

헛되지 않은 희생

동이 튼 지 세시간 후, 해가 높이 솟은 후 나는 마침내 여관을 떠나 시내로 걸어 들어갔다. 여관 담벽을 들이받은 군용트럭 한 대가 있었다. 운전병 자리 바로 앞의 유리창에 총탄구멍이 나 있었다. 트럭에는 사람들도 없었고 차는 버려져 있었다. 이제 이 길을 따라 나서면 군인들이 나타나 있을 테지.나는 그쪽으로 발길을 돌렸다. 도청 앞 광장까지는 2백m도 채 안되었다. 김대중의 지지자들이 나를 위해 골라준 여관은 사건현장으로부터 너무 가깝지도, 너무 떨어져 있지도 않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들은 사태의 진전을 지켜보면서도 안전한 곳이 어디인가를 정확히 알아맞췄던 것이다.광장에서 군인들이 집결해 있는 것을 처음으로 보았다. 탱크들도 출동해 있었다. 30명쯤 되는 학생들이 길게 묶여져 머리에 손을 얹고 끌려가고 있었다. 나는 발길을 돌렸다.골목길로 접어드니 군인들이 담장쪽으로 이상스런 한떼의 사람들을 밀어 붙이고 있었다. 카키색 복장의 한 건장한 사나이가 길위에 길게 엎어져 있었다. 한줄기의 피가 그의 몸 중심으로부터 하수구쪽으로 흐르고 있었다. 태양은 이제 중천에 떠 있는데 이 시체는 아마 한동안 여기에 그대로 방치될 것인지. 아마 군의 사진사가 촬영하기 위해 달려오고 있는지도 몰랐다.나는 그의 육중한 어깨를 보았다. 얼굴을 밑으로 하고 있어 어떤 사람인지 분간할 수가 없었다. 아마 그는 학생이었을 것이다. 아마 그는 전날밤 나를 불러내려고 여관에 찾아왔던 그 우람한 몸매의 사나이였는지도 모른다. 여관 주인이 보면 알 수 있을 테지만,

그러나 나는 여관주인을 일부러 여러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거기까지 데리고 나올 수는 없었다.이제 당시를 되돌아보면서 나도 이 희생―그리고 수백명의 다른 목숨들이 헛된 것은 아니었을 것이라고 믿고 있다. 그 판단을 내리는 것은 미국인들이 아니라 한국인들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