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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2007-05-30

[월간지 관련기사] 민화위의 「광주청문회」.한동윤(월간조선, 1988. 3)

본문

民和委의 「光州청문회」

정부측과 광주사태 당사자들의 생생한 현장증언. 8년만에 광주사태를 정식논의한 民和委는 「광주사태에 대한 정부 사과」, 광주사태의 성격을 「광주학생-시민투쟁」으로 재규정해 주도록 정부에 건의했다.韓 東 潤 연합통신 정치부 기자

8년만의 역사적 재평가 작업

국민 모두에게 「어두운 기억」일 수밖에 없는 광주사태가 새롭게 조명되고 있다.광주 사람들에게는 통곡의 진원이었고 운동권에게는 투쟁 이데올로기의 출발점이었으며 제5공화국의 집권세력에게도 끊임없이 제기된 정통성 시비의 업보였던 80년 5월의 대사건이 금기의 벽을 넘어 근 8년만에 다시 그 아픔으로 우리에게 다가오고 있다.盧泰愚 차기 대통령이 선거 와중에 광주 문제의 치유를 약속, 당선되고 구성한 민주화합 추진 위원회가 지난 2월 3일부터 사태 관련 참고인으로부터 증언을 듣고 진상파악과 함께 해결책을 논의함으로써 불법·불온의 딱지가 붙어 희생된 넋과 함께 구공(九空)에 머물던 광주의 비극이 마침내 햇빛 속에서 입을 열게 된 것이다.민화위의 국민화합 분과위(위원장 朴炳權)가 시중에 나돌고 있는 광주사태 관련 비디오를 공개리에 시청하고 피해자인 유가족과 부상자, 그리고 이들이 가해자로 믿고 있는 진압군책임자와 현지 행정책임자들로부터 비극의 현장에 관해 증언을 들은 것은 제5공화국에서 국회도 감히 시도하지 못한 것은 엄청난 것이어서 그 자체만으로 국민의 관심을 모으기에 충분한 것이었다.

민화위의 이번 「광주 청문회」는 우리의 역사에서 언젠가는 재평가되고 해석되어야 할 대사건이 처음으로 조명되고 더 많은 논의를 가능케했다는데서 의미를 찾을 수 있다 하겠다.또 서로 「폭도」나 「살인원흉」으로 매도해온 당사자들이 비록 시차를 두긴 했으나 같은 장소에 나와 각자의 입장을 제시함으로써 광주도 군부도 아닌 일반에게 사태를 재평가할 수 있는 기회를 민화위가 주었다고도 볼 수 있다.민화위가 당초 증언을 듣기 위해 선정한 참고인은 李희성계엄사령관, 尹興禎·蘇俊烈 광주 지역계엄사령관, 鄭雄 광주 지역사단장, 李光魯 광주사태 진상조사단장 등 군관계자와 張炯泰 전남지사, 丁時采 전남부지사, 具龍相 광주시장(이상 당시 직책), 尹恭熙 가톨릭 광주 대교구 대주교, 洪南淳 변호사, 田桂良 5·18유족회장, 金성용 순천성당 신부, 文炳蘭 시인, 裵瑾洙 5·18유족회고문, 李光榮 5·18유족회 부회장, 당시 수습위 대표였던 朴潤鍾·趙亞羅씨 등 16명.

그러나 이 가운데 張炯泰씨는 당시 친상(親喪)을 당해 사태를 파악하지 못하고 있다는 이유로, 金성룡 신부와 朴潤鍾씨는 개인 사정을 들어 증언을 사양했고 洪변호사 文炳蘭·趙亞羅씨는 민화위 광주사태 논의 자체에 이의를 제기하면서 田桂良씨만을 대표로 보내 광주측 입장을 전달했다. 또 李희성씨는 서면으로 증언을 대신했고 尹대주교는 인편으로 의견을 전달해왔으나 광주사태의 발단이 초기의 「과잉진압」으로 좁혀지면서 결정적인 증언이 기대됐던 과잉진압 당시의 광주지역 계엄사령관 尹興禎씨도 전반적인 사태파악이 안돼 있다며 증언을 극구 거절한 것으로 알려졌다. 鄭雄씨의 경우는 군선배인 朴炳權위원장이 수십차례나 중간에 사람을 넣어 연락를 취했으나 회답이 없었다고 한다.

「光州비디오」청취에 民正黨 당황

대신 사태 당시 시위를 주도하다 구속돼 군재(軍裁)에서 실형을 선고받고 복역중 석방된 全春心씨(40·일명 玉珠)와 부상자인 金成洙 朴錫連씨가 자진 출석, 증언했고 韓道熙 전 광주 교도소장 金容相 전 광주 병무청장이 나와 모두 12명이 직·간접으로 참고의견을 제시했다.증언 청취에 앞서 국민화합분과위는 지난 2월 1일 시중에서 은밀히 복제, 판매되고 있는 광주사태 관련 비디오인 조총련 제작의 「원한의 땅 광주는 고발한다」(23분) 일본 한국 문데 크리스천 긴급회의 제작 「광주사태의 전말」(30분) 천주교 광주교구 정평위의 「5월 그날이 다시 오면」(77분)등 3편과 KBS·MBC가 보관중인 필름을 시청, 진상파악을 위한 활동에 착수했다.

사태 당시 계엄군 쪽에서 시민군을 찍은 KBS·MBC 필름 외의 3편은 공수부대가 시민의 시체를 질질 끌고 가는 모습, 시위대를 진압봉으로 가격가는 장면, 군화로 차는 모습 등 충격적인 모습이 간간이 나왔으나 시청을 하고 난 위원들의 얼굴에서는 놀라움이나 충격의 반응은 별로 찾아볼 수 없었다. 위원들은 한결같이 구전(口傳)또는 관련 서적을 통해 파악한 잔혹상을 카메라가 제대로 포착하지 못한 것 같다는 반응이었다.민화위에서 비디오를 입수, 시청을 하자 민정당은 당황했고 지난 85년 소속 의원들의 정신무장을 위해 중앙정치 연수원에서 관람시킨 테이프와 민화위원들에게 보여 준 필름의 내용을 사전에 비교, 별다른게 없다는 판정을 내리고 안도했다는 후문도 있다.

그러나 5·18부상자회 부회장인 李光榮씨의 증언이 시작된 3일부터 민화위에 내외신문의 초점이 맞춰지기 시작했고 盧당선자 주변과 민정당은 물론 전 여권(與圈)이 크게 긴장하기 시작한 것이 사실.참고인들의 증언이 시작되자 종로 4가 옛 전매청 별관 3층에 마련된 민화위 국민화합 분과위에는 증언 내용에 관여할 수 없는 기관의 요원들이 대거 드나들기 시작했고 당시 진압군 대대장으로 있다가 예편 후 현재 정부요직에 있는 한 인사는 하루도 거름없이 출근, 증언을 일일이 메모하는 모습이 눈에 띄기도 했다.휠체어를 타고 참고인석에 자리잡은 5·18부상자회 부회장 李씨의 표정은 단호했고 눈자위에 애써 지우려했지만 약간의 적의(敵意)도 느낄 수 있었다. 증언이 시작되자마자 『악랄한 공수부대의 M16 총탄에 척추를 맞아 반신불수가 된 지극히 재수없는 사람』이라는 서두에 이어 「짐승만도 못한」「치가 떨리는」등의 표현으로 계엄군의 잔혹 행위를 규탄해 나갔다.

『민정당의 들러리…사퇴하시오』

현 대통령과 차기 대통령 이름을 호칭도 생략한 채 무차별 거명, 「발포 명령자」의 처벌을 욕구했다.당시 승려 신분이었다.李씨는 약 1시간에 걸친 증언에 이어 갑자기 「당시 공수부대와 20사단의 행동이 은폐되어 있다」고 전제하고 최근 외국에서 입수한 극비 자료를 공개한다면서 5월 18일 특전사 제 7공수여단이 광주에 주둔한 시간부터 27일 새벽 전남 도청 진압이 완료될 때까지의 군작전 상황을 약 30분 동안 빠른 속도로 낭독, 회의장을 긴장 속에 몰아넣었다. 그의 증언에는 당시 특전사령관이었던 鄭鎬溶국방장관, 공수여단장이었던 崔世昌합참의장, 朴俊炳 당시 20사단장 뿐만 아니라 현재 일선 부대장을 맡고 있는 많은 영관급(당시)장교들의 이름이 포함돼 있었고 군 핵심부의 작전 회의를 마치 엿듣기라도 한 양 병력 이동의 세세한 내용까지 망라되어 있었다.

李씨는 이 자료를 낭독하면서 위원들에게 「진상 규명을 위해 메모를 해두라」도 당부까지 했으나 증언이 끝난 뒤 기자들이 자료공개를 요청하자 「곤란하다」며 끝내 거부해 석연치 않은 구석을 남겼는데 李씨의 증언을 주선한 민화위 朴玉在위원(5·18부상자회 회장)은 『우리도 두렵다』고 군기밀 공개에 관한 우려가 있음을 시사하기도 했다.李씨는 증언을 통해 끝내면서 『광주 사람들은 민화위를 인정치 않고 있으며 내가 나온 것은 광주의 입장을 전달키 위해서 온 것』이라고 전제한 뒤 『민정당의 들러리가 될지도 모르는 여러분들이 광주 문제를 감히 해결할 수 있느냐. 정부·여당이 진상 발표문을 작성해 놓고 민화위의 이름만 빌리려한다는 얘기가 있는데 요식적인 결과를 낼바엔 지금이라도 양심선언을 하고 탈퇴하라』고 고함을 치다시피해 광주측의 정부·여당과 민화위에 대한 시각을 노정시켰다.

李씨의 증언은 그가 민화위에 출석한 어느 참고인보다도 사태의 핵심을 경함한 데서 나왔고 또 가장 의식화되어 있다는 민화위원들의 사후 평가로 미루어 볼 때 광주사태를 파악할 수 있는 중요한 몇 가지의 논점을 제공했다. 그 하나는 광주사태의 확대·악화의 원인이 과연 무엇이냐는 것과 또 하나는 사망자수에 대한 의문이 바로 그것이다.

李희성씨, 「軍의 과잉진압」시인

李씨는 증언과정에서 『처음에는 학생들이 가두에 진출했을 때 시민들은 방관했으나 일부 공수부대의 시위 진압 모습이 정말 눈뜨고 볼 수 없을 만큼 잔혹하고 마치 개·돼지를 다루는 듯한 짐승같은 행위로 비쳐져 들고 일어난 것』이라고 광주측 참고인으로는 처음으로 사태의 발단을 「과잉진압」에 초점을 맞췄다. 그는 또 『저들이 총을 쏘고 부모 형제가 눈 앞에서 죽어가는 모습을 보고 어떻게 무기를 들지 않을 수 있었겠느냐』고 시민들이 무기를 탈취하고 시민군을 편성 대항한 것은 어디까지나 자구책이며 정당방위였다고 강조하고 원죄(原罪)는 계엄군에 있음을 주장했다.

李희성 계엄사령관은 서면증언을 통해 『사태발생 원인은 여러 가지가 있겠으나 계엄군의 과잉진압이 직접적인 원인의 하나임을 부정할 수 없다』고 분명히 과잉진압에 대한 잘못을 시인했다. 또 당시 광주지역 계엄사령관이었던 蘇俊烈씨는 『5월 18일 오전 9시 전남대 앞에서 처음으로 충돌이 생겼는데 최초의 「동인(動因)」은 학생이었고 이에 대한 「반동(反動)」은 군대측이었다. 그 다음에는 반동의 힘이 더 크게 나온 것으로 이해한다』고 말해 학생들의 「투석」에 군인들이 엄청난 기세로 「응징」했음을 시사했으며 그는 5월 22일 광주민란 수습위원들에게 『시위진압 방법이 일부 과격했음을 시인했다』고 털어놓기도 했다고 밝혔다. 蘇장군뿐만 아니라 당시 광주시장이었던 具龍相의원(민정)도 『5월 17일까지 학생시위는 시민들의 반응도 냉담할 정도로 대수로운 것이 아니었는데 18일 각 대학에 계엄군이 진입하면서부터 상황이 악화됐다』고 비교적 솔직히 당시의 상황을 설명했다.양측의 시각이 「과잉진압」에로 대체로 접근하고 있으나 문제는 계엄군의 과잉진압이 과연 「예비」된 것이냐 아니면 「우발적」이 것이었느냐에 아직도 논란이 사라지지 않고 있고 이번 증언과정에서도 이 부분은 명쾌하게 규명되지는 못 했다.

李희성씨는 역시 서면증언에서, 당시 국내외 사정을 장황하게 설명한 뒤 『계엄사가 선택할 수 있는 방책의 폭은 극히 제한된 것이었으며 그 방책은 「최소한의 병력」으로 「최단시간 내에」사태를 수습하는 것이라야 했다』면서 『계엄목표를 달성해야 하겠다는 계엄사의 「단호한 의지」를 표명함으로써 학생들의 가열된 데모 의도를 「억제」할 필요성이 있었다』고 밝혔다. 李씨의 증언에서 볼 때 그가 말한 「최소한의 병력」으로 「최단시간 내에」사태를 수습하기 위한 결심이 정예화된 공수부대의 투입이었고 「단호한 의지」는 다소무리가 있더라도 초기에 시위대의 기세를 꺾기 위해 「과감한 진압」으로 나타나지 않았나 짐작될 뿐이다.

『왜 하필 광주를 선택했나』

특히 5·17계엄 확대와 함께 金大中씨의 연행이 동시에 이루어져 이에 대한 광주의 반응을 충분히 예측할 수 있었다는 게 상식이었다고 보면 「단호한 의지」의 강도(强度)가 짐작되는 것이다.이 부분과 직접 관계가 되는 것은 아니지만 광주측 대표로 나온 田桂良씨(5·18유족회장)는 다른 광주 참고인들이 「과잉진압」으로 시각을 맞춘 데 반해 색다른 주장을 폈다.田씨는 『5·18 서울, 5·18 부산, 5·18 대구 사태가 있을 법한데 왜 하필이면 광주를 선택해 5·18 광주 사태를 일으켰느냐』고 자문한 뒤 『군부세력이 정권탈취를 위해 광주를 선택했고 여기에는 金大中씨라는 매개체가 있어 가장 적합했기 때문』이라는 5공화국 주도세력들이 치밀한 사전계획하에 광주 사태를 유발했다고 주장했다.李光榮씨의 증언으로 또 하나 민화위의 쟁점이 됐던 문제는 사망자수.李씨도 자신이 사태 당시 시민군측의 민간 적십자 대원으로 수많은 희생자를 목도했다면서 정부측의 사망자수 조작의 근거로 어느날 느닷없이 죄명도 모르게 교도소에 수감돼 갑자기 죽었다는 광주구청 청소원 奇정도씨의 경우를 예로 들었다.

그는 『奇씨가 사태 당시 사망자 시체를 그의 청소차에 실어 어딘가에 매장한 뒤 광주 무진교회에서 그 사실을 나에게 얘기한 후 이 얘기가 정보기관에 들어가 교도소에 수감된 뒤 사인도 모르게 죽었다』고 사망자수는 정부가 밝힌 1백98명이 절대 아니며 2천5백명선이라고 주장했다. 李씨는 또 정부 발표의 사망자수는 광주시내 전남대 병원과 기독교 병원 등의 영안실에 안치된 사망자를 합친 것일 뿐 공수부대가 어디론가 차에 싣고 간 많은 사망자가 있었고 또 국군통합병원에서 사망한 수는 포함시키지 않은 것이라고 주장, 자신의 2천5백명 선을 계속 내세웠다.

그러나 사망자수에 대해서는 사태진압의 수습을 맡았던 蘇장군이 奇정도씨라는 사람의 일 자체를 『전혀 모르는 사실』이라고 부인했고 또 통합병원 사망자수도 1백98명 속에 모두 포함된 것이라고 李씨의 주장을 반박했다. 사망자수와 관련, 蘇장군은 「자신의 명예를 걸고」더 이상 없을 것이라고 단언했고 具龍相 당시 시장과 丁時采 당시 전남도지사도 정부 발표의 오차 가능성을 부인했다.

그러나 朴玉在위원은 蘇장군에게 『시민들이 사태 와중에서 시체 발굴반을 편성, 광주 주위의 산을 수색한 결과 상촌동과 전남대 뒷산에서 상당수의 시체를 발견했고, 형체를 알아 볼 수 없어 허리끈으로 부모가 자식을 파악한 사실이 있다』며 현상금을 걸고라도 사망자 재신고를 받아야 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蘇장군은 그러나 사태가 진압된 뒤 그같은 소문을 듣고 현장을 확인한 결과 사실무근으로 드러났으며 당시 공수부대원들을 서울에서 불러 내려 조사했지만 그런 일은 없었다고 반박, 사망자수를 둘러싼 논쟁을 벌이기도 했다.

가장 큰 쟁점은 사망자수

사태가 수습된 뒤 정부조사반을 이끌고 내려왔던 李光魯씨는 시체가 무더기로 발견됐다는 장소를 찾으려 했으나 그곳을 아는 시민은 하나도 없었다고 증언하기도 했다.비록 짧은 기간이었긴 하지만 민화위 증언 과정에서 사망자수라는 문제에 양측 시각이 크게 대립되고 있음을 재확인하는 과정이 되고 말았다. 이 문제는 어차피 한차례 객관적인 검증을 거쳐야 할 때가 왔다는 게 민화위를 지켜본 많은 사람들의 한결같은 의견이었으며 이같은 분위기가 「사망자 재신고」라는 건의로 집약됐다고 할 수 있다.사망자 문제와 관련, 蘇장군은 증언과정에서 민간인 사망자 몸의 탄흔을 조사한 결과 당시 계엄군만이 소지하고 있었던 M16소총에 의한 것이 45명인 것으로 밝혀졌다고 설명, 군인에 의한 사망자수의 「축소」효과를 노렸으며 이를 들은 朴玉在위원은 군인사망자들의 대부분이 5월 21일 전남대 방면에서 퇴진하던 공수부대와 상무대 소속부대가 상호 오인, 접전을 벌이다가 사망한 것이라고 정부의 「시민뿐만 아니라 군인도 죽었다」고 「상살(相殺)효과」를 격하시킨 것 등이 모두 사망자를 둘러싼 양측의 감정을 대변한 것으로 볼 수 있다.이번 민화위의 「광주사태 청문」에서 정부와 군이 초기의 과잉진압을 시인한 대신 얻은 게 있다면 그것은 광주측 증언자들로부터 악성 유언비어가 시민을 크게 자극했음을 들 수 았다.

李光魯 당시 광주사태 조사단장은 『5월 18일 낮부터 「경상도 군인이 전라도 사람 씨를 말리려 왔다」「군인들이 여대생의 유방을 칼로 도려냈다」「임산부의 배를 칼로 잘라 태아를 꺼냈다」「광주시민의 70%가 죽었다」「계엄군에게 흥분제를 먹였다」는 등의 지역 감정을 유발하고 군과 시민을 이간시키려는 악성 유언비어가 나돌기 시작했다』고 시민들의 흥분과 유언비어의 유포를 비슷한 시점에 맞추었다. 또 具龍相의원도 李光魯씨가 열거한 유언비어가 나돌면서 경상도 넘버를 단 트럭 2대가 불에 탔고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유언비어가 나돌며 사태가 극도로 악화되기 시작했다』고 증언했다. 광주시민측에서도 당시 가두방송으로 시위를 주도했던 全春心씨가 2월 8일 증언에서 「여대생 유방 운운」유언비어에 대해 『계엄군이 여자 유방을 도려냈다는 소문이 있었으나 그런 시신은 보지 못했고 그런 소문은 계엄군이 여자의 앞가슴 옷을 칼로 흐트리면서 유방이 「드러났다」는 것이 잘못 전해졌을 것』이라고 자진해서 유언비어를 해명해 주었다.또 裵槿洙씨도 『경상도 군인이 광주시민을 죽이러 들어왔다는 유언비어를 한 두 사람이 아니고 여러 사람에게서 들었다』고 말함으로써 지역감정을 건드리는 악성루머가 계엄군의 과잉진압과 같은 정도는 아니더라도 사태에 상당히 작용했음을 시사해 주었다.

증언 대신 「타도 성명서」발표

蘇俊烈장군은 경상도 군인 부분에 대한 증언에서 『초기에 광주에 투입된 부대는 7공수여단 소속 33·35대대였고 33대대장은 전주 출신, 35대대장은 대구 출신이었으며 투입 병력의 약 40%가 호남사람이었다』는 해명도 했다.민화위의 광주 사태 증언에서 가장 관심을 끌었던 참고인은 田桂良씨와 具龍相의원. 田씨는 민화위에 위원으로 참가한 朴燦奉씨와는 광주에서 또 다른 유가족을 이끌고 있는 사람으로 광주의 운동권을 대표해 참석했기 때문이며, 具의원은 당시 광주시장으로 상당부분을 광주시민과 호흡을 같이 하다 사태가 진압된 뒤 중앙으로 호출되다시피해서 자리를 내놓았던 「광주인」이었기 때문.田씨는 민화위에서의 증언을 거부하다가 광주의 洪南淳변호사 趙亞羅·文炳蘭씨 등 30여명의 재야인사와 회합을 갖고 「광주의 뜻」을 「통보」하기 위해 참석, 증언이라기 보다도 「성명서」에 가까운 의견을 제시했다.

田씨는 앞서의 광주측 참고인들이 현직 및 차기 대통령의 이름을 듣기 거북한 호칭으로지명하는 데 긴장한 朴炳權위원장이 미리 「특정인이나 인격에 관한 것은 참작해 주었으면 좋겠다」고 부탁했으나 『유족의 대표와 광주시민의 입장을 대변하려 왓으므로 합의된 원고의 수정이 불가능하다』고 전제한 뒤 「민화위 활동에 관한 우리의 견해」를 낭독했다.田씨는 민화위를 「盧泰愚정권의 정통성과 기반을 구축하기 위한 협작기구」라고 매도하고 ▲어용집단인 민화위의 즉각 해체 ▲새국회에서 진상조사특별법 제정 ▲진상조사특별위원회 구성, 특별재판소 설치, 가해자 의법처단 ▲폭도로 규정된 광주시민의 명예회복 ▲광주사태에 대한 미국의 묵인·방조·개입 응징 ▲피해자에 대한 정신적·물질적 보상을 요구했다. 田씨의 표정은 광주대표답게 당당했으며 마치 논고하듯 요구사항을 열거했다.田씨는 또 『盧泰愚씨는 미국의 사주에 의해 부정선거로 정권을 강탈한 후 학살자로서의 얼굴에 묻은 핏자국을 지우기 위해 갖은 술수를 꾀하고 있다』면서 『민주화 무드에 편승해 학살원흉의 이름과 만행을 희석시키려는 음모에 대항, 더욱 가열찬 투쟁을 전개해 나갈 것』이라는 제 6공화국과도 비타협정신으로 계속 투쟁해 나갈 것임을 천명했다.

그러나 田씨는 증언과정에서 민화위에 참석한 朴燦奉유족회장을 겨냥, 『자칭 유족회장이 구성원으로 끼어 있다고 하나 이 사람은 80년 이후 지금껏 관제(官制)로서 금권에 매수돼 학살자들의 꼭두각시 노릇을 해왔던 사람』이라고 朴씨를 무자비하게 매도하는 바람에 朴씨와 유족회의 정통성, 망월동 묘지 이장 등을 놓고 한동안 티격태격해 光州사태피해자간에도 마음의 골이 넓게 패어가고 있음을 스스로 폭로하고 말았다.

연산군으로 기록되지 말기를

田씨가 망월동에 안장된 1백26기의 묘가운데 26기가 딴 곳으로 이장된 것은 朴씨가 관권에 매수돼 앞장섰기 때문이라고 비난하자 朴위원은 「똥묻은 X 겨묻은 X 나무란다」고 맞받고 『특수기관과 안기부를 쫓아다니며 사정한 사람이 누구냐』고 퍼붜 이를 지켜보던 주위사람들의 눈살을 찌푸리게 했다. 또 田씨가 朴위원은 유족회원수가 60 대 30이라고 수 우세로 맞서는 식이었다.5·18이라는 비극을 공유한 유족회가 이처럼 2개로 갈라져 반목하는 것은 유족회를 약화시켜 분할조정하려는 정부의 의도도 작용했다고 볼 수 있지만 경위야 어찌됐든 광주사태가 빚은 또다른 불행한 모습인 것만은 틀림없는 모습이다.

田씨의 「성명낭독」이 끝난 뒤 李忠煥위원(전 신민당대표위원)은 「중·일 전때 수백만명의 중국인이 일인에 의해 학살됐는데도 해방이 되자 蔣介石총통은 원수에 덕으로 갚으라 했다」는 옛일을 상기시키면서 『악을 선으로 갚는다는 걸 염두에 둬달라』고 광주의 비타협적 태도에 안타까움을 표시했고 李康勳위원(독립운동가)도 『정권을 뒤집어 엎어야 좋아할 사람은 아무도 없다』며 체제속에서의 최선을 다한 화해를 강조했다.田씨에 이어 증언에 나선 具龍相 전 광주시장은 현재 여당의원이라는 위치에서 중용을 지키려고 애를 쓰면서도 대체로 광주시민을 이해하고 감싸려는 마음다짐에서 당시 상황을 진술해 나갔다.

그는 자신의 판단이라기보다는 당시 광주시장실에 들어온 전화제보를 적은 당시의 메모를 근거로 광주사태의 악화가 계엄군의 과잉행동이었음을 정리해 나갔다. 그도 「19일 낮 11시 한미제과 앞에서 무장군인들이 청년 10명을 구타하고 끌고가고 있다」「19일 낮 11시 10분 제일은행 앞에서 군인들이 젊은 사람들만 지나가면 구타해 이러다간 시민들이 다 일어날 것」이라고 적힌 메모를 읽었고 생필품이 극도로 부족한 상황에서 영세민 구호를 위해 시장재량으로 양곡 도매상들을 불러 양곡후불조건으로 현금 3천만원을 마련, 가구당 5천원씩 6천가구에 지급, 목민관(牧民官)으로서의 역할을 증언했다.

그는 또 『광주시민들은 사태가 계속 되는 동안 그 많은 무기가 나돌았는데도 강·절도 사건 발생률이 평상시와 차이가 없었고 금은방을 습격한 일도 없었다』고 군출신 참고인과는 반대의 증언을 하기도 했다.具의원은 자신이 사태가 진압된 지 3일만인 5월 30일 중앙으로부터 내무부 대기발령을 받고 31일 광주역을 떠날 때 약 5백여명의 시민들이 역으로 나와 그를 눈물로 배웅한 것으로 전해졌는데 그는 이날 증언에서 당시 시민들에게 낭독했던 인사장을 다시 한 번 읽으며 울먹이고 말았다.『사랑과 정성과 존중을 광주시민들에게 남기고 본인은 떠납니다. 어렵고 상상조차 할 수없었던 사태 속에서도 슬기와 질서를 잃지 않고 이웃을 도운 광주 시민들의 시장을 했다는 사실을 평생 잊지 못할 것입니다』具씨는 광주시장을 그만둔 뒤 산림청 등 한직에 근무했으나 지난 84년 丁來赫 당시 민정당대표위윈이 축재문제로 물러나자 그의 출신지인 담양·곡성 지구당위원장을 맡고 12대에 처음 국회에 진출했다.

具 전 시장의 증언에 민화위원들은 한결같이 높은 점수를 주었는데 徐英勳위원(전 홍사단 이사장)은 『정부측 증언 가운데 가장 공정한 것 같다』고 했고 高定勳위원도 『시장이 사태와중에서도 시민과 인간적 긴밀감을 유지하며 일을 처리한 데 높이 평가한다』고 했다.특히 朴玉在위원도 『5월 20일 張炳泰 전남지사가 도청 앞에서 시위군중과 만나주지 않았을 때 具시장은 시위대 앞에 나와 대한민국 만세와 애국가를 부른 사실을 기억하고 있다』며 具시장의 증언이 거짓이 아님을 시민편에서 증명해 주었다. 그러나 朴위원장은 具 전 시장에게 『광주사태 후 정치인의 한 사람으로 진정 피해자 입장에서 정치적으로 해 온 일은 무엇이냐』고 묻고 『具의원은 당시 지도자가 수양대군이나 연산군으로 역사에 기록되지 않도록 정치생명을 걸고 물러나기 전 성의있는 사과가 있도록 진언해 달라』고 여당의원으로서의 「용기」를 주문하기도 했다.

교도소 탈환 기도한 적 없다

具 전 시장에 이어 증언에 나선 참고인은 사태 당시 5월 20일부터 26일까지 가두방송 요원으로 광주도청 주변과 금남로 등을 누비며 시위를 주도하다가 간첩혐의로 시민들에 의해 붙잡혀 당국에 인계됐던 全春心씨. 당시 32살의 처녀였다는 全씨는 광주시민과 취재기자들에게 「청바지를 입은 아가씨」로 더 알려져 있는데 5월 26일 정보기관과 잡혀가 조사를 받고 포고령위반과 소요죄가 적용돼 징역 15년을 선고받아 광주교도소에서 복역 중 약 11개월만인 81년 4월 3일 사면조치로 적용됐다.全씨는 그후 약 7년간 결혼도 하고 숨어살다시피 했으나 정부와 군측 참고인들의 증언에 불만을 느껴 진실을 공개하기 위해 자진참석하게 됐다며 증언을 시작했다.全씨는 참고인으로 나온 韓道熙씨(전 광주교도소장)와 李光魯의 「시위대의 광주교도소 습격기도가 있었다」는 증언을 정면 부인하고 나서 주목을 끌었다.

韓씨는 비공개 증언에서 「5월 21일 하오부터 무장한 시민들의 침입시도가 있었고 5월 22일에도 수차례나 교도소 앞 3백m 앞까지 시위대가 나타나 침입을 시도, 총격전이 벌어졌다」고 밝혔고 李씨는 보다 구체적으로 『21일 낮 12시 20분 광주교도소 습격이 있었고 하오 1시차 3대로 재습격을 기도했으며 저녁 7시 30분에도 시위대들이 장갑차 2대 등 차량 7대에 무기를 올려놓고 총격을 가하여 공격했다』고 증언한 것. 그러나 全씨는 『시민들이 절대로 교도소 탈환을 기도하지 않았다. 이 점을 하늘에 두고 맹세한다』고 반박했다. 全씨는 다만 「연대·고대학생들이 광주시민들과 합세하기 위해 들어오려다 담양쪽에서 막혀못들어 오니 구하러 가자」고 시민들을 분산시키려는 계엄군의 술책에 속아 담양쪽으로 시민이 몰려가다 충돌을 빚은 것뿐이라는 주장이다.

全씨에 앞서 사태와중에서 한가족 3명이 트럭을 타고 가다 계엄군의 M16소총에 맞아 부상당했던 일을 증언한 金成洙씨(5·18부상자회부회장)의 케이스라는 광주사태의 비극성을 한마디로 입증해주는 것이다.金씨는 「6·25때 학도병으로 자원입대 공산군과 싸우다 4년만에 제대한 참전용사」라고 소개한 뒤 5월 21일 광주 북쪽에서 그의 소유인 전남아 7395타이탄 트럭을 몰고가다가 처(金春花)와 딸 그리고 자신이 총격을 받은 사실을 증언했다.金씨는 군인의 무턱댄 총격주장을 의아해한 한 위원이 『군인에게 반항한 것도 아니고 일종의 피난인으로 집에 가게 보내달라고 했는데 총을 쐈다는 말이냐』는 물음에 『나역시 8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이들이 왜 내 가족을 쐈는지 이유를 알 수 없다』고 답답한표정을 짓기도 했다.

사망자수에 의문 제기

蘇장군은 광주사태를 「발생」「확산」「수습」「사후처리」의 4단계로 구분, 자신은 사태가 악화될대로 악화된 5월 22일 상오 10시부터 전임 尹興禎장군으로부터 지휘권을 인계받았다고 소개하면서 자신의 수습노력에 중점을 두고 상황을 설명했다.蘇장군은 『당시 도지사와 시장 경찰 국장이 정위치를 이탈 광주시는 치안, 행정이 마비됐고 시민들이 무장해 완전히 무정부 상태였다』고 지적한 뒤 『그러나 대화에 의한 수습에 역점을 두고 李洪基변호사 독립운동가인 崔漢泳옹 등과 무기회수 등을 위해 협조를 부탁하고 약속을 받았다』고 강조했다.그는 그러나 『도청 시위대본부에서도 강온파가 갈라져 있었고 회수된 무기가 다시 나눠지는 등 대화를 통한 수습이 불가능한 상황으로 치달았고 거리에도 소년원을 탈출한 머리를 박박깍은 똘마니들의 행패가 심해 도저히 안되겠다는 판단을 내렸다』고 설명하면서 『광주시민들도 계엄군이 빨리 들어와야겠다는 여론이었다』고 작전의 불가피성을 누누히 역설했다.

또 李光魯 당시 조사단장도 『무장시민군 34명이 계엄군에 투항하고 민간수습위가 무기를 반납하는 등 수습분위기가 모색됐으나 강경파들은 계엄군의 진입설을 퍼뜨리며 재무장하기 시작했고, 목포가 함포사격으로 불바다가 됐다며 「사태가 유리하다 6일만 기다리자」는 등으로 선동이 있었고 그속에서도 시민들은 자숙의 기대를 보이며 수습을 갈망했다』고 蘇장군의 최후 진압의 타당성에 동조했다. 실제로 27일 새벽 도청진입 과정에서 시민군과의 총격전으로 시민군 17명과 계엄군 3명이 죽었을 뿐 시가지에서는 시민들의 저항이나 공격이 전혀 없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蘇장군은 최후진압 작전에서 『순수한 민간인의 피해로 여자 한사람이 앞정강이에 찰과상을 입은 것뿐』이라고 단언하기까지 했다.민화위는 지난 2월 8일 모두 14명의 참고인으로부터 직·간접의 증언을 듣고 盧대통령에게 광주사태 치유를 위한 건의문을 채택했다.민화위의 활동은 앞서 지적한대로 지난 8년간 광주의 응어리가 어느 정도 인가를 확인하는 과정이었긴 하지만 처음으로 한과 원풀이 아닌 용서와 화해로 풀어나갈 수 있는 실마리를 찾은데서 그 역할이 평가돼야 할 것 같다.

당사자 증언록

「사태」아닌 「광주의거」로 해야

▲李光榮(5·18 부상자)=광주사태 당시 악랄한 공수부대의 M16에 척추를 맞아 반신불수가 되어 버린 지극히 재수없는 사람이다. 나는 사람들이 말하는 폭도나 불순분자가 아니다. 정부측에서는 폭도나 불순분자라고 지칭해 왔지만 나는 당시 민간 적십자 대원으로 인도적인 구호활동에 나서다가 중상을 입었다. 결론부터 말하면 이제 광주문제는 사태 아닌 의거로 개념을 정리해야 한다. 나는 그때 광주시민의 행위가 불의에 항거하는 대중항쟁이었다고 확신한다. 당시 시위는 학생이 주도했고 시민은 방관자였지만 경찰과 공수부대의 진압방식이 잔혹했으며 어느 누가보더라도 그냥 넘길 국면이 아니었다. 80년 5월 19일 전날 학생들의 희생을 목격한 시민들은 자연발생적으로 시내에 집결 시위를 벌였다.

진압군은 1만여명의 시위대 앞으로 돌을 맞으면서도 의연하고 위력적으로 포위해왔고 결국 시민과 충돌, 수많은 부상자와 연행자를 낳았다. 나는 주변 건물에 숨어있다가 잡혀나오면서 거리를 보는 순간 아연했다. 잡혀오는 사람중에는 한치의 보탬도 없이 머리와 허벅지가 찔린 듯 피투성이었고 얼굴을 짓밟혀 알아볼 수 없는 중상자도 있었다. 우리는 군용트럭에 실려 몇 분후면 죽을지 모른다는 공포분위기 속에서 어디론가 이송되었는데 동구청 앞을 지나던 중 많은 시민들이 달려와 「내자식이니 제발 좀 살려달라」고 애원하는 모습도 있었다.

이때 전투복 차림의 경찰관이 피투성이가 된 채 연행되는 한 사람을 가리키며 『이 사람은 응급조치가 필요하다』고 군인들에게 항의해 나와 몇 명이 그사람을 인근 병원으로 옮기게 됐다. 부상자를 감시속에 병원으로 옮기던 중 경찰관이 나에게 『빨리 도망치라』고 속삭여 나는 몇 명과 함께 동구청 사무실로 도망쳤다. 거기서 나는 공무원들의 도움으로 사무복으로 갈아 입은 뒤 사무원으로 위장해 뒤늦게 잡으러 온 계엄군의 손아귀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이날 하오 잠시 계엄군이 철수한 후 금남로는 시민들의 물결로 땅이 안보일 정도였다. 이때 시민들은 가톨릭센터 앞에서 안에 있던 7명의 공수부대원을 내놓으라고 항의하고 있었는데 가톨릭센터측이 불응하자 셔터문을 부수고 들어가 7층에서 떼밀려고 했고 많은 사람들이 만류해 포박만에 끌고 나왔다.이에 계엄군이 다시 진격해와 시위대는 물러났는데 건물 안에 있던 시위대들은 결국 잡혔고 나중에 12구의 시체가 발견되기도 했다.

나는 공용터미널로 가 소변을 보려고 변소에 들어가니 얼굴을 알아볼 수 없는 사람이 죽어 있었다. 도저히 무서워서 광주에 있을 수가 없어 나주로 피신했다.나는 20일 세무서와 KBS가 불탔다는 소식을 듣고 21일 일찍 광주로 출발했다. 도로가 차단하고 차가 다니지 않아 걸어서 들어왔다.검은 연기가 솟았고 시민들은 탈취한 군용트럭에 분승, 애국가와 반정부구호를 외치면서 시위를 했다. 시내에 공수부대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나는 기뻤다. 이날 하오 2시경 군용지프에 타고 시내를 순시하던 중 갑자기 헬기가 나타났고 총성이 울리면서 가로수 잎들이 떨어졌다. 그때 길가의 학생이 쓰러졌다.

통합병원의 사망자수는 안 밝혀졌다.

나는 그 자리에서 민간인 적십자대를 구성, 6명이 차를 타고 활동을 시작했다. 약국·개인병원 등을 돌아다니면서 의약품을 구해왔다. 의사가 써준대로 약을 구해왔고 헌혈된 피를 갖고 기독병원으로 가는 데 어떤 여자중학생이 자기도 헌혈할 수 있느냐며 간청해 기독병원까지 데려다 주었다. 전남대 병원의 환자가 넘쳐 다른 곳으로 오는 데 죽은 사람 하나를 싣고 있는 차가 보였다. 병원의사들이 울어서 가보니 바로 그 여중학생이었다. 헌혈을 마치고 돌아가던 중에 총에 맞아 죽은 것이다. 나는 내가 그 아이를 죽였다는 죄책감에 아직도 사로 잡혀있다.

하오 6시 30분쯤 금동 구시청 4거리에서 많은 시민들이 우리에게 구시청 4거리에 시민들이 쓰러져 있는데 구하러 갈 수 없다고 했다. 지금 데려오면 살릴 수 있다는 것이다. 멀리 4∼5명이 쓰러져 허우적대며 손을 흔들었다. 차를 세워놓고 내가 두 손을 잡고 다른 두사람이 양팔을 잡았다. 내가 먼저 차에 올라 끌어당기려는 순간 총소리가 났고 나는 쓰러졌다. 척추에 총알이 박혔다. 연발로 총소리가 들리고 비명도 들렸다. 다행히 운전사가 다치지 않아 기독교병원으로 후송돼 치료를 받았으나 반식불수가 되었다.기독교병원에서 입원한지 1년3개월만에 병원에서 쫓겨났다. 그때까지 중환자 33명을 포함 총환자수는 1백86명이었다.정부당국은 치료비지급을 중단하고 기독병원에서 끌어냈다.

내가 겉으로는 건강하게 보이나 속으로 곪아 찌들었다. 나는 다리가 어떻게 아픈지 견딜 수 없어 마약주사를 맞고 있다. 기독병원에 가 통사정을 했다. 여기도 주사를 맞고 왔다. 이것은 비단 나만의 모습이 아니다.정부는 사망자가 1백89명이며 부상자가 1천여명이라고 발표, 국민을 호도하고 있다.광주에 奇정도씨라는 분이 계셨다. 구청 미화요원으로 청소차를 몰고 다녔는데 5·18후 광주교도소에 수감됐다가 그 곳에서 죽었다. 그 사인은 안 밝혀졌으나 그는 그가 알고 있던 비밀을 누군가에게 얘기해 죽은 것 같다. 그는 죽은 사람을 청소차에 실어 어딘가에 매장했던 사람이다. 그 얘기가 수사기관에 들어가 그는 교도소에 들어갔다. 나는 무진교회에서 그분에게 그 얘기를 직접 들었다.사망자 숫자는 각병원에 안치된 숫자다. 사망자는 어디론가 차에 싣고 데려갔다. 기독병원, 적십자병원, 전남대병원 영안실의 숫자지 그나마 통합병원에서 죽은 숫자는 안 밝혀지고 있다.당시 행불자나 부상자를 접수받고 있다고 하나 접수가 안된다. 다친 사람의 경우 다치게 한 사람의 관등성명을 대라고 하고 못대면 받아주지 않으며 국민을 호도하고 있다.

국회 국정조사권으로 진상조사해야

당시 광주는 모두 하나였다. 군관민, 남녀노소 똘똘 뭉쳐 해냈다. 도난 사건 하나 없었다. 완전 치안부재의 상황에서 광주시민의 의식을 보여준 것이다. 금융기관도 금은방도 털린 곳이 없었다.왜 총을 들었느냐고 물으며 저들이 총을 쏘는 데, 우리 처·자식이 죽어가는 데, 눈앞에서 퍽퍽 쓰러지는 데 안들 수 없었다. 그것은 자구책이고 정당방위였다. 광주사태는 광주의거로 규정지어야 한다. 이런 몸으로 일생동안 처자식을 거느려야 하는 지금 보상금이 시급하다.

그러나 보상보다 더 중요한 것은 광주진상이 온천하에 공개되고 당시 책임자는 법에 의해 응징돼야 한다는 것이다. 서울이나 경상도에 가면 우리를 폭도로 아는 데 피를 토하고 죽을 일이다. 진상규명에 의한 명예회복이 이뤄져야 하고 그 뒤 법에 의한 응분의 보상이 이뤄지고 치유책이 마련돼야 한다.미국을 응징하지 않을 수가 없다. 미국은 사태의 배후조종자나 방조·협조자이다. 미국이 적어도 방조했다는 사실이 미국무성발표에서도 드러났으니 미국을 직접 개입자로 규정, 상응하는 응징이 따라야 할 것이다(李씨는 또 하나 공개되지 않은 사실이라면서 당시 광주에 투입된 공수부대와 20사단의 활동과 지휘관들의 움직임을 기록한 자료들을 낭독).이 자리에 모인 여러분들은 만약 광주사태를 잘못 처리할 경우 역사의 죄인이 된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후손에게 떳떳하기 위해서는 외부압력에 굴복하지 말고 진정한 소신으로 임해야 하며 그럴 때 길이 의인으로 추앙받을 것이다.

그러나 광주사람들은 민화위를 인정하지 않고 있으며 오늘 내가 나온 것도 이 기구를 인정해서가 아니라 광주의 입장을 전달키 위해서이다. 우리는 8년간 현정권을 거부해왔다. 자칫 민정당의 들러리가 될지도 모를 여러분들이 광주문제를 감히 어떻게 해결할 수 있으며 여러분의 결정이 설득력을 가질 수 있겠는가, 가해자인 민정당이 만든 기구가 아닌가, 일부에서는 이미 정부·여당에서 진상발표문을 작성해 놓고 단지 민화위의 이름만 빌리려고 한다는 소문도 있다. 광주시민들의 의견은 광주사태의 진정한 해결을 위해 국회가 국정조사권을 발동, 당시의 부상자·유족·인권단체·재야·종교계 등 각계와 만나 명실상부한 진상조사를 실시하고 이에 따라 성실한 치유책이 마련돼야 한다는 것이다. 5·18이 역사속에서 올바로 위치지워지지 못하고 각본에 따라 요식적인 결과를 낼 바엔 위원들은 지금이라도 양심선언을 하고 탈퇴해야한다. 위원회가 16명의 증언자들을 채택했는데 반수 이상이 당시 핵심책임자였다. 이들이 얼마나 양심적인 증언을 할지 몰라도 이 사람들의 말을 토대로 해소방안을 마련한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비공개

5·18이전, 평화적 시위만 했다.

▲韓道熙(당시 광주교도소장)=광주사태당시 교도소안에는 2천6백47명이 수감돼 있었다. 이중 기결수가 1천6백16명, 미결수가 1천31명이었다. 10년이상 장기수가 1백14명, 보안관계상 중요수감자가 5백3명이었고, 이중 소위 사상범은 1백80명이었다. 교도소의 관리인원은 3백26명(보안요원 2백42명 포함)이었다. 교도소의 특성상 주야로 4교대 근무를 하기 때문에 60명정도가 수감자를 관리하고 있었다.광주사태가 일어나자 통상적인 정보수입원인 검찰과 경찰이 부재상태여서 직원 몇 명을 시내 요소에 배치하고 시내에 있는 가족들로부터 전화를 통해 우리 나름대로의 정보를 수집하고 있었다.5월 20일 하오 8시 40분 31사단에 직원을 보내 병력지원을 요청했으나 장군에게 전화를 걸어 다른 기관은 모르나 교도소만큼은 지켜야한다고 말했더니 鄭장군은 병력지원을 약속했다.

21일 새벽 2시 20분 지원병력의 선발대가 왔고 이어 3시 10분쯤 4백66명의 지원병력이 도착했다. 교도소 내부는 교도관이 지켰고 외부는 군이 지켰다.21일 하오 31사단병력이 공수단병력으로 교체됐는데 교체된 병력수는 1천4백44명이다.▲질문=시민들이 교도소를 습격한다는 정보가 있었나.▲韓道熙=시내에 배치된 직원과 가족들로부터 그런 정보가 들어왔다. 21일 하오부터 그런 정보가 들어왔다. 21일 하오부터 무기가 등장했고 22일에도 수차례에 걸쳐 교도소앞 3백m부근까지 나타나 침입을 시도했다. 이로 인해 시위대와 군병력간에 수차례 총격전이 벌어졌다.▲李忠煥(변호사)=안에서의 소요는 없었는가.▲韓道熙=교도소안은 다소 혼란스러운 분위기었고 소요의 기미를 보였다.▲李忠煥=총격전이 벌어졌을 때 교도소의 피해는.▲韓道熙=교도소벽에 탄환자국이 남아 있으나 교도소에 시민들이 들어온 일은 없었나.▲裵瑾洙(5·18유족회고문)=광주의거가 발생한 지 벌써 7년이 흘렀지만 항쟁의 역사적 정당성과 개념의 규정은 제쳐놓고 사건의 진상조차 밝혀지지 않았다.80년 5월 18일 이전에는 학생들이 평화적인 시위만했고 경찰이 오히려 보호했다.

그런데 18일 오후 얼룩무늬의 공수부대원들이 몰려들어와 젊은이만 있으면 무조건 곤봉으로 때리고 구두 발로 차고했다. 군화를 신고 우리들이 자는 방으로 들어와 잘못도 없는 학생들을 끌고갔다. 시민들도 공산당이 아니고야 이렇게 할 수 있느냐고 흥분해 학생들과 합세했다. 또 거리에서는 광주시민 다죽었으니 도청앞에 모두 모이라고 했고 우리는 삽과 곡괭이를 들었고 여인들은 부지깽이까지 들고 나갔다. 21일인가 도청앞 광장이 꽉 들어찼고 오후에 공수부대원들이 들어갈 수 없으니까 옥상에서 쏴대 이날 가장 많이 죽었고 내 사위도 그날 죽었다. 그날 저녁 철수명령이 내려져 군인들은 모두 나갔고 그틈에 시민들은 곡괭이로 충장로파출소와 도경무기고를 깨고 시민들에게 무기를 나눠줬다. 경찰은 모두 달아나 버렸다.

그 당시 퇴각하던 공수부대가 진월동 개울에서 멱을 감고 있다가 놀라 길로 올라가려던 2명중 14살짜리 소년에게 총을 쏴 죽였다.내 사위가 21일 도청앞에서 죽어 시체를 찾으러 갔는데 학생들은 사위의 다이아반지 시계 혁대를 빼주더라. 광주시민들은 그 정도로 착실했다. 희생자장례관계로 유족인 朴燦奉씨와 도청에게 丁時采부지사를 만나 1백24구의 시체를 인계받았다.

소년도 사살당했다.

무명의 시체 12구도 도청에 있었다.그외에 사방에 있는 시체도 얼마가 되는지 모른다. 시체를 상무원에 안치 시켜놓고 낮에는 시민들 보라고 밖에 내놓고 밤에는 들여놓으며 분향소도 설치했다. 시체에서 핏물이 흘러 丁부지사와 장례를 협의했는데 우리는 도민장으로 丁지사는 시민장으로 하자했다. 결국 도민장으로 결정이 돼 광주시청으로 가 보사국장에게 장지를 달라고 했고 시측도 망월동공원묘지가 어떻겠느냐고 해 좋다고 했다.

그런데 이튿날 장례를 치르려고 하니 트럭에 유가족도 안 태우고 관을 짐 싣듯 한꺼번에 실으려고 반대했다. 결국 트럭 1대에 4구씩 싣고 유가족을 태워가서 안장했다.유족의 일원으로 치유방안을 제시하겠다. 첫째 철저한 진상규명을 해야한다. 둘째는 광주시민의 명예와 권리를 회복시키고 피해자를 국민유공보훈대상자로 예우해야 한다. 셋째 7년간 폭도니 불순분자니하면서 감시·연금·탄압한 정신적 육체적 보상도 있어야 한다. 넷째 5·18당시의 목격담은 빙산의 일각이다. 더욱 공정하게 조사하기 위해서도 각계각층으로 5·18진상조사단을 구성, 진상을 규명해야 한다.▲李炳勇(변호사)=시민들이 무장해 교도소를 습격한 일이 있는가.▲裵=있다고 들었다. ▲李炳勇=경찰서 무기고를 습격할 때 경찰과 충돌은 없었나.▲裵=없었다.▲李忠煥=5월 21일 공수부대가 옥상에서 총을 난사, 사상자가 가장 많이 났다고 했는데 그후에도 충돌이 없었나.▲裵=21일 새벽 3시 계엄군이 도청을 탈환할 때 지키던 애들은 다 죽었다.▲金泰淸(변호사)=도청탈환시 무기 버리고 자수를 권유했는가▲裵=헬기가 이틀동안 도청상공을 돌며 다 죽으니 나가라고 했다.▲金在淳(샘터사 이사장)=경상도 군인이 광주시민을 죽이려 왔다는 유언비어를 들었는가.▲裵=한두사람이 아니라 여러사람에게서 들었다.▲金成洙(5·18부상자회부회장)=80년 5월 차를 몰고가다 일가족 3명이 총에 맞아 지금도 어려움속에 진도에서 살고 있다.

사태당시 화물차로 채소를 싣고 서울을 오르내리며 생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5월 21일 광주에 있는 처와 딸이 걱정이 돼 둘을 데리고 진도로 가려 했으나 계엄군이 외곽을 차단해 남쪽으로 가려다 북쪽의 담양쪽으로 나가려했으나 계엄군이 막았다. 처(金春花)가 울면서 사정했으나 군인들은 처에게 발길질하고 권총을 빼들고 돌아가지 않으면 죽이겠다고 폭언을 했다. 그래서 화물차를 타고 출발하는 순간 M16으로 무차별 난사해 세사람이 쓰러졌다.

『군인도, 민간인도 죽었는데…』

나는 옆구리에 처는 어깨와 머리에 무수히 총을 맞았고 딸(來香·13)은 척추에 맞았다. 처와 딸을 살릴 생각으로 그 와중에도 차를 몰고 3백m쯤 가다가 나도 쓰러졌다. 일어나보니 전남대부속병원응급실이었다. 처와 딸은 계속 혼수상태였다. 나도 실탄제거수술을 받고 기어 다니며 딸과 처를 살려달라고 하소연했다. 처는 뇌수술을 3번이나 했고 딸은 정신이상증세를 보였다. 처는 85년 12월 7일 하반신불수가 된 딸의 휠체어를 밀고 가다 오토바이에 받혀 죽었다. 그전에 나와 처, 딸은 전남대병원에서 1년2개월만에 강제 퇴원당했다. 딸은 나도 없는 사이 침대에서 내려놔 원장책상에 올려놓아, 이럴 수 있느냐고 했다. 청와대와 내무부·국방부·안기부·도에 청원과 탄원을 냈다. 그러나 모두 냉담했다. 추석과 음력설에 연탄과 쌀 몇 말이 고작이었다.▲朴錫運(5·18부상자회지도위원)=나도 초파일인 5월 21일 도청옆에 있는 원불교회관으로 가다 총을 맞았다. 오후 한시께 도청앞에서 시민들이 도망오기에 뒤돌아서는 순간 쓰러졌다. 사람살리라고 소리를 지르니 시민들이 끌고 갔는데 또 총을 쏘려했고 시민들이 환자라고 사정하는 소리가 들렸다. 기독병원에 8개월간 입원해 수술을 3번 받았고 다리를 12㎝ 절단했다.그후 생계가 막연해 국방장관을 상대로 손해배상청구소송을 냈는데 전교사계엄군법회의 검찰관이 출석요구를 해 나갔더니 민주국가에서 소송한 것은 잘 했다고 했다.

그러나 이 시기에 포기하라고 하더라. 그 자리에는 별 셋도 있었다. 나도 안된다고 했다. 그들은 나를 지프에 싣고 보안대에 데려가 보안과장실에서 면담을 시켰다. 군인도 죽고 민간인도 죽었는데 당신 혼자 어떻게 주느냐고 했으나 나도 버티었다. 그런데 변호사인 朴찬씨가 찾아와 취하하라고 해 취하했다. 그때 배상청구액은 1억3천7백만원이었다. 취하하면 지원한다 해놓고 말뿐이다.▲蘇俊烈(전 광주지역계엄사령관)=본인이 지휘권을 행사한 것은 5월 22일 오전 10시부터였다.당시 시위진압을 위해 왔던 부대는 제 3, 7, 11공수단과 보병 20사단이었다. 지휘권을 담당하면서 광주지역 수습위원들과 M1, 카빈소총, 기관총 등 화기 5천8백여점의 회수를 위해 대화노력을 했다.

그러나 도청 시위본부의 강온 양파간에 격론이 벌어졌고 회수된 무기가 다시 시민들의 손으로 들어가 대화를 통한 수습이 불가능하다는 판단을 했다. 공수사령관 鄭鎬溶장군에게 20사단과 공수부대위치를 바꾸자고 제의 공수부대들이 빠져나갔고 그로부터 시민들의 감정도 많이 누그러졌다. 그러나 과격파와 똘만이들의 횡포가 커져갔다. 林憲杓계엄사 교육부장에게 첩보수집업무를 주어 요소인 도청과 사직공원 전일빌딩의 상황을 점검하고 시민들의 여론을 파악했다. 25일 崔圭夏대통령이 내려와 작전의 불가피성을 보고했고 崔대통령은 상당한 피해가 예상되니 신중을 기하라며 걱정을 많이 했다.시민들의 여론은 계엄군이 빨리 들어와야겠다는 것이었다고 그래서 작전 성공에 확신을 가졌다. 26일 상오 2시 작전회의를 열고 도청과 전일빌딩·사직공원에 공수부대 특공조 30명씩을 투입하고 20사단의 3개연대 31사단이 외곽에서 동시에 진입하는 계획을 세웠다. 또 전투경찰출신의 폭약전문가에게 도청내에 있는 수류탄 뇌관을 야간에 뽑도록 조치하는데 성공했다.작전개시전 특공조에게 사람은 절대 죽이면 안된다고 했다. 당시 적색분자가 있는 것으로 판단했고 독침사건도 있어 생포해야 된다고 했다. 작전이 시작된 후 당초 도청에는 1백15명∼1백30명정도의 시위대가 있을 것으로 예상했으나 실제로는 3백60명이나 돼 당황했다.

다행히 전일빌딩 작전이 순조롭게 끝나 그쪽 병력을 보강, 27일 새벽 5시 10분 작전을 성공시킬 수 있었다. 이 작전에서 공수부대원 3명이 죽었고 끝까지 도청에서 저항한 17명이 죽었다. 그후 사망자만은 명예를 걸고 밝혀야 되겠다는 생각으로 신문에 신고를 받는다고 광고했다. 발표된 이상은 없을 것으로 확신한다. 시체의 탄흔을 조사한 결과 군인만이 가지고있는 M16에 죽은 사람은 45명이었다.▲李炳勇=통합병원에 있는 사망자도 모두 포함된 것인가.▲蘇=사망자가 있었고 그들도 다 포함된 것이다.▲李炳勇=청소원이 시체를 싣고가 묻은 뒤 끌려가 죽었다는데.▲蘇=전혀 모르는 일이다.▲朴玉在=사망자의 4분의 1만 군인에 의해 죽은 것이고 나머지는 자기들끼리 쏴 죽였단 말인가.▲蘇=그렇다.▲朴玉在=시민군 시체발굴반이 전남대 뒷산 등에서 상당수 시체를 발굴했다. 얼굴에 잉크를 뿌린 형제를 알 수 없는 시체가 있었고 허리끈으로 가족을 파악한 예도 있다. 똘만이 폭도가 있었다면 보석상과 은행강도가 있었어야 했는데 없었다.▲韓=금은방을 턴 사실이 책에 나와있다.조선대 뒷산에 시체가 무더기로 있다고 해서 확인했으나 사실이 아니었다. 공수부대를 서울서 불러 다시 탐색도 했다. 전쟁때 겪은 경험으로는 시체에서 독특한 냄새가 난다.

실종자신고광고를 냈는데 있다면 왜 신고를 안했는지 의심스럽다.▲朴玉在=21일 오후 공수부대가 퇴진하면서 상무대소속부대와 오인해 접전, 군인사망자가 있었던 것을 아는가.▲韓=다 알고 있다.▲尹恭熙대주교(張德鎭위원을 통한 간접증언)=광주사태에 대한 진상규명이 앞서야 될 것이다. 그 규명팀은 객관적이고 권한이 있는 팀이 되어야 한다. 국민이 납득할 수 있는 공정한 선거로 구성된 다음 국회에서 국정조사권을 갖고 광주문제를 정확하고 진지하에 조사해야 한다. 그 국회의 조사결과가 나오면 성격 재규정 명예회복·보상 등의 문제는 자동적으로 해결되지 않겠는가.

『民和委는 盧정권의 협작기구다』

▲田桂良(5·18유족회장)=盧泰愚씨가 부정선거로써 정권을 획득했다고 해서 반제 반독재 투쟁은 절대로 멈출 수 없는 것이다. 여고생의 젖가슴을 도려내고 일가족을 학살하는 등의 천인공노할 학살만행은 그 어떤 형태의 타협도 철저히 배제한다.盧泰愚씨는 미국의 사주에 의한 부정선거로 정권을 강탈한 후 학살자로서의 자신의 얼굴에 묻은 핏자국을 지우기 위해 갖은 술수를 꾀하고 있다. 민화위는 이러한 차원에서 盧泰愚정권의 정통성과 기반을 구축하기 위한 대표적 협작기구이다.5·18광주의거 유족회는 다음 몇가지 측면에서 볼 때, 민화위는 명백하게 광주학살에 대한 원칙적 치유방안을 모색할 수 없다고 보는 것이다.

첫째 민화위는 盧泰愚씨가 대통령이 되기 위해 구성한 기구로써 광주학살로 등장한 민정당의 한 위원회에 불과하다.

둘째 국가적 차원에서 법적해결 방안을 모색하기 보다는 盧泰愚씨의 선심에서 비롯된 양 선전되고 있으며 민화위라는 기구 자체가 법적 지위나 성격을 전혀 갖지 못한 임시 자문기구에 불과하므로 설령 해결 방안이 모색한다 하더라도 차기 정부에 모두 반영된다는 보장이 없는 것이다.

셋째 문제의 원천적 해결은 군에 의해서 빚어진 것이므로 국가적 차원에서 그 해결점이 모색 되어야 하고 민족자주화와 민중이 주체가 되는 민주주의를 쟁취하기 위한 5·18을 올바른 성격규정의 측면에서 볼 때 법적 제도적 보장을 받을 수 없는 민화위는 그 기능을 충분히 해낼 수 없다.

넷째 민화위는 관련피해당사자들이 제외한 구성체로서 학살 만행을 은폐하고 항쟁 정신을 희석화 하려는데 그 목적이 있다는 점이다. 朴燦奉 자칭 유족회장이 구성원으로 끼어 있다고 하나 이 사람은 80년 이후 지금껏 관제(官製)로써 금권에 매수되어 오히려 학살자들의 꼭두각시 노릇을 해왔던 사람이다.

다섯째 문제 발생의 근원에 대한 객관적 검토 과정이 너무 미흡할뿐더러 全斗煥씨나 특히 盧泰愚씨에 의해 저질러진 학살만행에 대한 배경의 진상은 완전히 은폐되고 있다는 점이다.

여섯째 미국의 개입에 대한 문제점은 아예 설정조차 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이러한 민화위의 계속된 협잡은 역사의 주체인 전 민중의 철퇴를 받게 될 중요한 역사적 죄악을 범하고 있다는 사실을 인식해야 할 것이다.학살의 원흉들은 지난 7년 동안 자신들이 저지른 죄악상을 은폐하기 위해 학살만행을 모두 유언비어로 파묻었다. 그리고 이제는 盧泰愚씨가 권좌에 앉기 위해 가시적으로 돈을 가지고 해결하려는 가증스러운 작태를 보이고 있다.80년 5·18당시 광주 민중을 학살한 원흉에 의해 선정된 어용집단이므로 이제 더 이상 기만적인 국민우롱의 작태를 청산하고 즉각 해체되어야 한다.

지금 일부 야당에서 새국회에서 진상조사 특별법을 제정하고 국회의원과 피해당사자로 객관적이고 공정한 진상조사 특별위원회를 구성, 그에 의해 진상규명이 선행되어야 하며 그 결과에 따라 가해자처벌을 위한 특별재판소를 설치하여 의법 처단해야 한다.5·18광주 민중항쟁 당시 폭도로 규정된 광주시민의 명예 회복이 전제되어야 한다.미국의 묵인·방조 개입에 대한 외교적 조처를 단행해야 한다. 사망자 및 부상자와 당시 무고하게 구속된 피해자들에게 대한 정신적·물질적 보상과 민족차원의 보훈 대상자로 예우해야 한다.▲李炳勇=미국이 광주사태에 결정적 요인이라고 했는데 근거는.▲田=국군의 지휘권을 가진 미국이 지휘권내의 부대이동을 승인한게 간접적 개입이 아니겠는가.▲李炳勇=全斗煥·盧泰愚씨가 결정적으로 관련됐다는 구체적 증거는.▲田=10·26이후 12·12쿠데타가 있었다. 그후 12·12세력의 권력화로 구체화됐다. 광주문제에도 적어도 두사람외에 책임질 사람이 없다.▲李康勳(독립운동가)=나도 광주의 불쌍한 동포들에게 도움되려는 일하려고 참여했다.

그러나 정권을 뒤집어 엎는다면 누가 좋아하겠는가. 고통은 민족이 받는다. 격분한 마음 누그러뜨리고 자중자애해달라.▲具龍相(전 광주시장)=사태기간 중 광주시청은 정상에 가까운 근무를 했다. 17일까지의 광주시위는 시민들도 냉담한 반응속에서 악화되지는 않았다. 그러나 18일부터 악화되기 시작했다. 당시 시장실에는 계엄군의 격렬한 행동에 놀란 시민들이 학생편에 가담할 우려가 있다는 전화제보가 상당수 있었다.19일 시내분위기는 살벌했고 계엄군이 시민과 학생을 구타·연행에 고등학생도 동요하기 시작했다. 군인이 학생을 쫓다가 시민에게 잡혀 구타를 당하고 충돌이 격화되기 시작했다. 경상도군인이 전라도사람의 씨를 말리려고 왔다느니 여자의 옷을 벗겨 가혹하게 다룬다느니하는 상상을 초월한 유언비어가 나돌아 사태가 악화됐다. 20일 계엄사대책회의에 나가 연행자조기석방과 명단공개, 담화형식의 실태발표를 건의했다. 21일에는 최악의 충돌이 발생했고 시위대는 소방차와 장갑차를 앞세웠고 화순탄광에서 TNT를 입수했다.24일부터 26일까지 시외곽에서 계엄군과 학생이 계속 대치, 교전을 벌였고 인명피해가 증가했다. 24일부터 시에서는 무기회수에 나서 모두 6천4백65점을 회수했다. 상무관에 처음으로 시체영안실을 마련 32구를 안치했으나 수는 계속 증가했다.

그러던 중 27일 새벽 군인이 도청에 재진입했다. 28일까지 상무관에 운구된 1백11구의 시체중 16구는 연고지가 인수했고 나머지는 망월동에 묘지를 만들어 합동장례를 치렀다. 본인은 30일자로 내무부 본부대기발령을 받고 31일 광주를 떠났다. 광주시민을 대변한다는 입장에서 과잉행동에 시민이 분격했고 학생들을 자극할 소지가 다분히 있었다.더욱 지역감정을 자극하는 유언비어가 시민을 분노시키고 사태를 악화시켰다. 광주시민은 생필품을 나눠쓰며 참으며 이웃돕기 정신을 잘 실천했다. 평화적으로 사태를 해결하기 위해 기울인 광주 시민의 노력은 기억돼야할 것이며 무기자진반납에 적극 협조한 것은 명예회복에 기여할 것으로 본다.23일부터 사망자 부상자 행불자 신고를 받았고 가정방문 조사를 했다. 정부의 발표가 맞는 것으로 생각한다.

『나는 결코 간첩이 아니다』

▲全春心(광주시민·당시 가두방송요원)=나는 연행당시 간첩혐의로 잡혔다. 나는 결코 간첩이 아니다. 나는 49년 12월 10일 전남 보성경찰서 사택에서 태어났다. 지난 81년 5월 10일부터 지금 남편과 동거를 시작 결혼한지 3년이 되었다. 일부에서는 아직도 내가 간첩이나 불순한 집안에서 출생하지 않았는가 생각하고 있는 것 같으나 나의 가정배경을 알면 그렇지 않다는 것을 이해할 것이다. 나의 아버지는 6·25때 전남 보성군 유로면 지서장을 지냈다.나는 이모님 심부름으로 서울에 왔다가 5월 19일 새마을야간열차를 타고 송정역에 내렸다. 송정역에 내렸으나 통행금지가 되어 광주에 갈 수가 없었다. 사람들이 아가씨가 광주가면 무참히 죽으니 가지 말라고 했다. 그래서 왜 군인이 민간인을 찌르고 죽여야되는가 반발했고 조금은 호기심도 있었다. 또 집에도 가야했다. 나는 지나가는 트럭을 잡아 5천원을 주고 집까지 갔다. 나는 친구하고 약속이 있어서 시내로 나갔다. 차마 볼 수 없는 참경이었다. 수많은 학생들이 어디로 끌려가고 있었다. 계엄군과 학생들이 대피하려고 있는 데로 가서 처음에는 물을 떠다줬다. 나는 마이크가 있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5분간 모금을 했더니 45만원이 거둬졌다. 그 돈으로 앰프를 빌려왔으나 최루탄에 맞아 고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