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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2007-05-30

[월간지 관련기사] 광주주역 36인의 증언/내가 겪은 80년 5월의 광주.홍남순외(월간조선, 1988. 3)

본문

「光州」주역 36人의 증언

내가 겪은 80년 5월의 光州

「光州」를 어떻게 풀까. 80년 5월, 세계를 진동시킨 그 엄청난 사건은 「義擧」일까, 「抗爭」일까…. 6共和國의 출범을 가로막고 있는 이 難題를 풀기 위해서는 우선 眞相부터 알아야 할 것이다. 이에 月刊朝鮮은 당시 이른바 「市民軍」의 대표, 수습위원, 총을 들고 싸웠던 학생, 전투경찰관, 간호원, 시민등 36명으로부터 생생한 증언을 채록했다.이 증언은 85년 5월 월간조선 특별취재반이 광주에 특파돼 취재한 것으로, 증언자들의 나이와 직책등은 당시의 것이다.

月刊朝鮮 특별취재반

吳효鎭 趙甲濟 趙南俊 李春三 權榮基

言해 주신 분들

洪南淳 曺喆鉉 宋基淑 박효선 위인백 윤석루 김종배 전용호 李梁賢 鄭海直 김효중 우동진 김윤기 박옥재 전계량 박복남 문건양 박순례 權根南 박명민 이광영 이세영 문명호 鄭在熙 金容完 南東成 김상집 정동년 金相允 문광식 양창률 安聖禮 外 4人(無順)

■ 공수부대 시내진입 순간

■ 뒤통수 아랫배, 무릎을 구타

■ 천진한 중학생도 분노의 총을 들고

■ 멱감다 총맞은 여고생

■ 매맞고 고문 받아 5명이 정신 이상

■ 임신 8개월 부인도 총맞아 사망

■ 부처님 오신날의 처참한 주검들

■ “살아서 증언이라도 남기자”

洪南淳(70·변호사·당시 수습대책위원)

「談判」위해 上京하려다 연행 고문

18일 사태가 심각해지자 한 친구가 찾아와서 『광주도 예비검속을 할 것 같다』면서 피신을 하는 게 좋겠다고 했다. 내가 『예비검속은 일제시대나 있었지 지금은 그런 게 없다』고 했더니 그 친구가 『지금은 난시니 법은 아무 소용이 없다』고 하면서 피신할 것을 종용했다.19일, 사태가 더욱 심각해지자 친구와 가족들이 『고집 피우지 말고 피신하시라』고 했다. 주위에서 하도 강권해서 오후 3시에 내자와 함께 서울로 떠났다. 3남과 막내가 머물고 있는 창천동 집에 도착한 것이 오후 7시였다.그날밤 연대 다니는 아들이 친구를 만나고 들어와서 『광주가 불바다가 됐고, 전화도 불통이랍니다. 차도 내일부턴 안다닌답니다』했다.

그날밤 이 생각 저 생각으로 잠을 이루지 못했다.『들어가면 사지에 가는 거고, 안 들어가면 안전이야 도모되지만…』아무리 생각해도 판단이 안 나왔다. 내자도 잠을 못 자는 것 같았다.이튿날이 20일, 아침 먹고 「광주로 갈 것인가 말 것인가」를 놓고 가족회의를 열었다.내자의 의견은 분명했다.『돌았소? 뭐하러 피신왔소? 생명보존 위해 피신하고 왜 맘이 변했소? 당신 들어가면 죽소! 가고 싶으면 혼자 가시오. 나는 여기서 자식들과 살겠소』이이들 둘은 묵묵부답이었다.한참 후에 내가 결정했다.『나는 광주 갈란다. 내가 한일협정 반대 때부터 투신해서 몸을 지켜왔는데, 이 난동을 당해서 나 혼자 안전 위해 피신하고 있다가, 이담에 광주 갈 때 무슨 면목으로 시민들을 대하겠나. 또 다른 데 가서 산다한들 육신만 살고 정신이 죽은 사람된다. 그러니 산 게 산 것이냐? 나 갈란다』

가방을 들고 일어나서 막내 영훈이가 따라 나서며 배웅해 드리겠다고 했다. 둘이 강남 터미널에 도착하니 과연 광주표를 팔지 않았다. 할 수 없이 정읍표를 사놓고 점심을 먹으러 가는데 내자와 기훈이를 만났다. 내자가 『영감쟁이 영영 이별하려고 했다가, 불쌍해서 같이 가려고 왔소』했다. 『제기, 그래도 마누라가 좋구만!』표를 한 장 더 사오라고 했더니 애들이 석 장을 더 사서 모두 함께 가지고 했다.『아니다. 난시에는 분산해야 종자 남는다』따라오려는 애들을 말리고 우리 둘이만 정읍으로 내려왔다. 정읍에서 택시를 타고 장성가서 하룻밤 자고, 택시도 타고 걷기도 해서 21일 12시쯤에 집에 돌아왔다.

집에 오면서 역전에서 보니까 파출소 유리가 부서져 흰눈처럼 널려 있었고, 시민들이 총을 들도 휘휘 다니는데 『저 애들을 어떻게 살릴까』히고 걱정이 태산 같았다. 집에 와보니 바로 우리집 옆에 있던 광주 MBC가 불탄 채로 서 있었다.22일 아침, 남동성당 김석용 신부한테서 전화가 왔다. 지금 몇 분이 얘기하고 있는데, 10시까지 나와 달라는 것이다.10시에 남동성당에 가니, 신부, 목사, 정당인, 교사 등 70∼80명이 모여 있었다. 김신부 주재로 사태를 수습하기 위한 회의를 하는데 몇 시간이 지나도 방안이 안 나왔다. 또 나올 수도 없었다.

그러나 내용은 간단했다. 「무기를 회수해서 반납할 테니 처벌을 말라」는 것이었는데, 그걸 누가 어떻게 하는가가 문제였다. 그래 내가 사태를 수습하자면 ▲군의 절대적 지원을 받아야 하고, ▲전남지사를 중심으로 한 공무원이 중심이 돼야 하며, ▲시민도 여·야를 초월해서 합심해야 한다고 했더니 다들 좋은 생각이라고 했다.도청에 가니 정시채 부지사만 있다가 반가이 맞았다. 우리가 결의한 수습방안을 얘기하니 『좋은 방안입니다. 지사한테 연락해서 보고할랍니다』했다.부지사실에서 나오는데 1층 복도에서 젊은 사람들을 만났다. 회의실에서 수습대책위원회를 하고 있으니 들어가자는 것이었다. 남동성당에서 모였던 사람들은 여기서 가자, 말자 하고 두 파로 나뉘었다. 그러다가 가실 분만 옵저버로 참가하자고 의견이 모아졌다.7∼8명이 들어가 보니까, 사회를 이종기 변호사가 보고 있었는데 거기서도 수습방안을 마련하고 있었다. 이렇게 처음엔 시민측 수습위원회가 여러 개였다. 하나는 도청에서 모인 것이고, 나를 포한한 또 하나는 남동성당에서 모인 것이다. 그리고 다른 하나는 중앙교회에서 모인 예장중심의 수습위원회였다.

어떻든 도청회의실의 수습회의가 끝나고 나서 그 사람들이 계엄사에 대표로 가자기에 나는 싫다고 하고 집으로 돌아왔다.23일 아침 10시, 부지사한테서 전화가 왔다. 도청에서 수습대책위원회가 열리니 참석해달라는 것이었다. 남동성당을 다녀서 거기 모여 있던 사람들과 함께 12시쯤 도청에 갔다. 정시채 부지사, 교육자 등 2∼3백명을 모아 놓고 회의를 진행하고 있었다. 모두들 갑론을 박하는데, 정시채 부지사가 『시민주도가 돼야 한다. 나는 나가겠으니 시민 가운데서 대표를 뽑아 진행해달라』면서 밖으로 나갔다. 우리는 최한영씨를 의장으로 뽑아 회의를 속행했다.얘기는 언제나 마찬가지였다. 무기를 회수해야하고 회수된 무기를 반납해야 하는데 그게 잘 안된다는 것이었다.그때 내가 일어나 벌언했다. 『이게 잘 안되는 것은 무기는 시위대와 학생이 가지고 있는데 그들이 말을 잘 듣지 않기 때문이다. 학생들을 설득하자면 교수들이 있어야 한다. 그러니 교수, 학생, 시민들도 이 자리에 참석시켜서 같이 합의하자』는 내용이었다. 내 제안이 받아들여져 학생, 시민, 교수 등과 함께 회의를 했는데, 그들도 무기를 반납하고 싶지만 보복이 두렵다는 것이었다.

그러면서 보복않는다는 보장을 해달라고 했다. 문제는 거기에 있었다. 24일은 그럭저럭 보내고 25일 수습위 세 개를 하나로 통합했다. 이 날리터에서 누가 보면 세력다툼한다고 할까봐, 우리는 밑에서 일만 하자고 했다. 6시 도청에서 나오는데 시위대가 화순에서 가져온 TNT가 이리 사고 때의 폭발력보다 커서 터지면 도청 주위 4㎞가 불바다가 된다고 했다. 그 소리를 들으니, 겁이 덜컥 났다.학생들은 그러면서 같이 있어 달라고 사정했다. 할 수 없이 이종기, 김석용, 이기홍, 김천배, 김재일, 나 등등해서 모두 40∼50명이 도청 지사실에서 날새기를 했다. 26일 새벽 2시쯤 부지사도 들어왔다.

그런데 새벽 3시쯤 『비상!』하더니 도청에 난리가 났다. 계엄군이 쳐들어온다는 것이었다. 화정동에서 밀고 온다고 했다. TNT생각을 하니 겁이 났다.부지사가 여기저기 전화를 하더니 계엄군 진주설이 낭설이라고 했다. 우리는 『광주에 들어오지 말라』면서 계엄군과 협상을 하자고 했다. 새벽 5시에 계엄군한테서 답이 왔다. 『대표자 2∼3명만 보내라』는 것이었다.26일 새벽 5시, 수습위원 40∼50명이 상무대로 떠났다. 떠날 때도 말이 많았다. 시위대가 버스를 내주겠다고 했지만, 정부에서 폭도로 규정한 사람들이 내준 차를 어떻게 타느냐고 해서 사양하기로 했다. 계엄군이 차를 주겠다고 했지만 그것도 탈 수가 없었다.할 수 없이 우리는 4열 종대로 서서 20리를 걸어서 갔다. 가기는 가도 대포앞으로 가는 것이라 겁도 났다. 외신기자들이 우리보다 더 많이 따라오면 취재했다. 그때 우리가 걸어간 걸 「죽음의 행진」이라고 했다고 한다.

우리는 이른바 화정동 「판문점」을 지나 상무대로 갔다. 계엄군측에서 3∼5명만 와 달라고 했는데, 우리 중에서 그렇게 대표를 뽑을 수가 없어서 결국 20여명이 들어갔다.소준열 준장이 자리를 만들어 놓고 있었다. 그가 중앙에 앉고 좌측에 참모들, 우측에 우리들이 앉았다. 우리는 ▲계엄군이 오늘 새벽 진주한 것은 약속위반이니 원상으로 돌아갈 것, ▲무기를 회수해서 반납할 테니 보복하지 말 것, ▲보도를 공정히 할 것 등을 요구했다. 그러나 오전 10시부터 오후 2시까지 입씨름을 했으나 하나도 합의되지 않았다. 소 준장은 군의 작전명령을 이미 받아놓고 있어 26일 자정까지는 연기할 수 있지만 그 이상은 양보할 수 없다고 했다.

우리는 『군인은 국민을 보호하자는건데, 진주하면 광주시민 많이 죽는다. 지금까지도 많이 죽었는데 또 죽이면 어떻게 하느냐. 1주일만 연기해주면 우리가 무기 회수해서 모두 반납하겠다』고 아무리 사정을 해도 안됐다. 소준장은 나중엔 마지못해 『보도만은 공정히 하겠다』고만 말했다.나는 『만사휴의(萬事休矣)로구나! 이제 끝났다. 나머지는 운명이다』하고 생각했다.우리는 아무런 성과없이 바리케이드까지 차를 타고 와서 뿔뿔히 흩어졌다. 일부는 도청으로 갔다. 나는 김석용 신부와 YWCA에서 만나 앞으로의 대책을 상의했다.나는 김신부에게 『중앙으로 갑시다. 김신부는 서울가서 김수환 추기경을 만나시오. 그래 가지고 군이 진주하지 못하도록 하시오. 나는 곧 뒤따라가서, 윤보선 선생한테 지도받겠소. 거기서 대책 강구하고 그 길로 여기 출신인 정래혁, 전부일 장군 만나 담판하고 협조받겠소. 또 박충훈 총리도 만나고 그래서도 안되면 최규하 대통령이라도 만나겠소』하고 말하고 서로 헤어졌다.26일부터 송정리에서 기차가 떠나, 내자하고 아들녀석 하나하고, 오후 3시반에서 4시 사이 택시를 타고 송정리로 떠났다. 중간에 있는 장엽이 다리에 바리케이드가 쳐져 있었다. 군인이 검문을 했다. 신분증을 보였더니 잠깐 내리라고 했다. 나느 그 길로 잡혀가서 곤욕을 치렀다.

曺喆鉉(47·신부·당시 수습대책위원)

무릎 꿇고 무기 반납 호소

5월 22일 광주시내가 시민들에 의해 장악된 날 다른 위원 10명과 함께 시민수습대책위원으로 뽑혔다. 독립운동가 최한영씨가 위원장이 됐고, 나는 천주교대표로 뽑힌 격이었다. 우리는 7개항의 요구사항을 가지고 이날 상무대의 전남지역 계엄분소로 갔다. 가는 길에 나는 깜짝 놀랐다. 계엄군이 시내를 데모대에게 물려주었지만 외곽은 철통같이 봉쇄하고 있는 것이 보였다. 길 양쪽에 매복한 계엄군의 철모들이 살벌했다. 탱크도 여러대 보았다.전날 저녁에 도청을 접수한 시민들은 승전 분위기에 젖어 있었는데 나와 보니 딴판이었다. 그때 광주시민들은 다른 지방 사람들도 호응하여 들고 일어날 것이고, 미국 등 우방국가에서도 한국정부에 압력을 넣어 사태가 바람직한 방향으로 전개될 것이라고 믿고 있었다.계엄사령부에서 우리는 6명의 지휘관들과 이야기를 나눴다. 계엄사령관 소준열 장군은 동석했다가 금방 나갔고 부사령관 金모 장군이 그쪽의 대표 격이었다. 우리는 7개 요구사항을 제시했다. 『공수부대의 과잉진압을 인정하라』『구속학생 석방하라』『계엄군의 진입을 금지하라』『인명·재산피해을 보상하라』『수습된 뒤 보복을 일체 하지말라』등등이요구사항이었다.

이 자리에서 나는 이번 사태의 책임이 공수부대의 잔혹한 진압행위에 있다고 반론, 말다툼이 오고갔다. 나는 『시민들을 남녀노소 가리지 않고 학살하니 이판사판으로 들고 일어난 것이다』고 주장했다.이 자리에서 계엄군측의 연행 학생들은 주모자를 제외하고 모두 석방하겠다고 했다. 우리는 회수해간 1백60자루의 총기를 건네주었다. 그날 아마도 8백여명이 석방됐을 것이다.(편집자 주 : 22일에 8백48명, 23일에 34명 석방)계엄사측에선 시민들이 먼저 발포하지 않으면 시내진입을 않겠다는 것도 약속했다. 나는 『우리의 약속을 녹음해두자』고 했으나 『서로 믿자』고 녹음은 하지 않았다.

23일에 동구 남동 소재 남동 천주교회에서 별도의 수습위원회가 구성됐다. 이 모임에도 참석했는데, 홍남순·이기홍·김성룡·조아라·이애신·유인백·이영상·조봉환·김천배·장기언씨 등이 참석했다. 종교계 인사들이 주축이 된 이 수습위원회가 도청 수습위보다도 시민들로부터 더 폭넓은 지지를 받았다.나는 양쪽 수습위의 회합을 요구, 양쪽이 모였는데 분위기는 얼음과 석탄이 섞인 격이었다. 관변측에서 추천하여 조직된 도청수습위 사람들은 그 뒤 불참하거나 은신하여 저절로 남동성당 수습위가 주도권을 잡게 됐다. 나는 도청에 며물면서 사망자 확인과 무기회수에 나섰다. 민간인 병원들을 다 훑고 국군통합병원을 방문, 17구의 민간인 시체를 확인했다.통합병원장은 다치 공수부대 장병들 76명이 치료받는 모습도 보여주었다. 우리는 『헬리콥터로 시민시체를 이곳으로 날랐다고 하는데…』라고 물으니까 병원장은 『그건 유언비언요』라고 했다. 그 병원장이 이런 이야기를 했다.

『광주농아학교 학생 하나가 죽어 여기 실려 와 있어요. 이름표까지 달려 있는데 머리가 몽둥이 일격에 깨져버렸더군요』그 벙어리 소년은 금남로에서 계엄군의 경고를 못 알아듣고 손짓으로 수화를 하다가 얻어맞았다는 목격담을 그 뒤에 들은 적도 있다.광주시 외곽의 요소요소에선 이른바 「시민군」과 계엄군이 대치하고 있었다. 아세아자동차 공장부근, 교도소 부근, 무등산 입구, 백운동, 학동, 고속도로 진입로 부근 등등이 대치점이었다. 이런 곳에는 「시민군」이 30∼50명씩 카빈으로 무장, 배치되어 있었다. 구성원은 제대병이 많았고, 음식점·구두방 등 영세업체 종업원들도 상당수 있었다. 책임자는 총기를 다룰 줄 알고 각개전투의 원칙 정도는 아는 이들이었다.이들을 찾아간 우리 회수반(나, 장세균 목사, 이종기 변호사, 남재희 신부 등)은 무기반납을 사정했다.

그들은 상당히 강경했다.『당신들은 우리가 흘린 피를 보상받게 해 줄 수 있나』『그럴 자신은 없다. 그러나 무기를 반납해야 앞으로 희생을 줄일 수 있을 것이다』『그러면 못한다. 죽으면 죽었지』흥분한 「시민군」은 우리에게 총부리를 들이대고 험악한 욕설을 하곤 했으나 별다른 사고는 없었다. 우리는 대치점을 2∼3번씩 방문하여 끈질기게 설득했다. 24일 오전으로 기억하는데 화순쪽으로 통하는 학동의 대치점에 갔더니, 중간지역에 민간인 한 사람이 저쪽 계엄군의 총격을 받고 쓰러져 있었다.대치선을 건너다가 맞은 것이었다. 그사람은 죽은 것 같았는데, 시체도 끌어낼 수가 없었다. 우리들의 끈질긴 설득으로 25일 오후까지는 대부분의 대치점에 있던 「시민군」이 무기를 도청에 반납했다. 당시 도청엔 「시민군」지휘부가 있기는 했으나, 대치점의 「시민군」은 이들의 명령을 잘 듣지 않는 독립부대들이었다.

끝까지 무기반납을 거절한 곳은 국군통합병원쪽의 「시민군」이었다. 우리 수습위원 10명은 그들 앞에 가서 무릎을 꿇고 빌었다.『제발 우리 시민들을 살려다오』결국 그들도 설득이 됐는데, 총을 직접 도청까지 들고 와서 반납을 했다. 총을 내어준 사람들 가운데 일부는 도청에 남고 일부는 돌아갔다.도청을 점거하고 있던 「시민군」내부에선 강온파가 갈등을 빚고 있었다. 강경파는 「선(先)보장(보상이나 사과 및 보복금지의 보장), 후 무기반납」을 주장했고, 온건파는 「선 반납, 후 보장」을 주장하고 있었다. 강온파의 감정이 격해지면 서로 총을 겨누기까지 했다. 그들은 다투다가도 서로 답답하여 울음보를 터뜨리기도 했다. 이 갈등을 말리느라고 진땀을 뺐다.내가 목격한 가장 많은 시체는 계엄군의 시내 철수 뒤 금남로 지하도 공사장에서 발굴한 12구였다. 이들은 계엄군의 추격을 피해 숨어들었다가 집중사격을 받고 죽은 것이라 했다. 「시민군」에 대해서 바깥에선 오해가 많지만 그들은 극한상황에서도 양식을 지켰다. 경찰관과 군인을 한 명씩 잡아와서도 일체의 가혹행위 없이 옷을 갈아 입혀 풀어주기도 했다. 독침사건도 사실과 다르다. 강온파간의 대결에서 빚어진 것이라느니, 오열의 소행이니 했지만 그것은 쇼였다.

나는 그 장면을 똑똑히 봤다. 1층 현관에서 한 청년이 『독침이다!』고 부르짖으며 쓰러졌다. 다른 청년이 달려 들어 오른 팔뚝인가를 빨더니 또 쓰러졌다.「시민군」이 두 사람을 전남대학 병원으로 옮겼는데, 진짜 독침이면 정신을 잃었을 텐데 멀뚱멀뚱했다. 수상하게 여긴 「시민군」이 그들을 붙들어 와 감금시켜 놓았다가 5월 27일 새벽을 맞았던 것이다.26일 새벽 계엄군이 외곽대치선을 넘어 시내로 일시 진입한 적이 있었다. 이 소식을 듣고 17명의 수습위원들이 총알받이가 되자고 전남 농촌진흥원쪽으로 걸어갔다. 나와 홍남순, 조아라, 이기홍, 김석용씨 등이 따라왔다. 계엄사쪽에서 金모 장군이 차를 타고 마중나왔다. 수습위원은 진입을 중지해 줄 것을 요구했다.金장군은 오늘은 더 진입하지 않겠지만 D데이는 내일이란 뉴앙스를 강하게 풍겼다.나는 도청으로 돌아왔는데 이미 내일 새벽에 계엄군이 진입한다는 이야기가 쫙 퍼져 있었다. 이 소문은 계엄군들이 시내의 가족들에게 『내일 작전이 있으니 조심하라』고 귀뜸해 준 것이 퍼져나간 듯 했다. 도청의 청년·학생들에게 『이렇게 되면 다 죽게 된다. 그들이 들어오기에 앞서 우리가 먼저 무기를 돌려 주어버리고 평화적으로 도청에서 물러나세』하고 설득을 했다.

어느 청년이 『신부님 죽는 것이 그렇게 아깝습니까. 우리가 무릎꿇고 꼭 살아야 합니까. 여기서 옥쇄해야 합니다』고 울부짖듯 말했다. 그때의 심정은 무어라고 표현할 수 없는 것이었다. 이날 「시민군」은 강경쪽으로 선회했다. 새벽의 계엄군 일시 진입이 자극을 준 때문이었다. 반납받았던 무기를 다시 내어주며 무기시키게 했다. 결사대가 되겠다고 자원하고 나서는 이들도 있었다.나는 밤9시까지 있다가 도청을 떠났다. 내가 시무하는 계림동의 성당에서 그날 중요한 축일 미사가 예정돼 있었다. 신도들이 모여서 나를 부르러왔다. 밤늦게까지 미사를 올렸는데 온통 눈물바다가 됐다.미사를 마치니까 그 동안 밀렸던 허기와 피로가 한꺼번에 쏟아져 몸을 꼼짝 못하게 만들었다. 스르르 잠이 들었다. 나를 깨운 것은 『광주시민 여러분! 계엄군이 들어오고 있습니다. 나와서 같이 싸웁시다』라는 여자의 마이크소리였다. 이 마이크소리는 시내를 한 바퀴 돌고 두 번째로 상당 가까이에 왔다. 그러자 드르륵 하는 사격소리가 들리고 마이크소리는 뚝 그쳤다. 벽시계를 보니 새벽 3시30분이었다.

5분쯤 지났을까, 콩볶듯 하는 총성이 도청 근방에서 들려왔다. 『이이구, 전라도의 똑똑한 사람 다 죽는구나』고 나는 소리쳤다. 새벽 4시40분쯤, 누가 성당문을 두드렸다. 신부복차림의 내가 열어주니 완전무장한 군인들이 밀려 들어왔다.『여기 학생들 숨어 있지요』라면서 성당 구석구석, 심지어 천장·고백실·수녀원까지를 샅샅이 뒤졌다. 장교가 『숨어 있다던데 없군』이라고 중얼거리며 『광고(光高)로 가자. 저항하면 무조건 사살해!』라고 명령했다.『왜 사살해! 당신은 동생도 형제도 없어? 그 사람들이 공산주의자야? 사로잡도록 하시오』홧김에 이렇게 내뱉었다.『당신 사상이 의심스럽군』그 장교의 말에 『나는 사상은 당신보다 몇배나 철저한 민주주의 신봉자야!』라고 반박, 한참 말다툼이 진행됐다. 나는 그를 잠시 앉히고 공수부대의 과잉진압에 의한 사건의 발단을 설명해 주었다.장교는 『허, 참』하면서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일선에서 들고온 이야기와는 사뭇 다르다는 표정이었다. 나는 며칠 뒤 계엄사에 연행되어 내란중요임무종사 방조죄로 기소돼 실형을 선고받았다가 여섯 달만에 풀려 나왔다.

宋基淑(전남대 교수·수습대책위원)

수습의 길은 막혀 있었다.

5·17비상계엄이 전국으로 확대된 후 18일부터 벌어진 상황을 이야기하기 전에, 전남대생들이 처음으로 도청앞에 진출했던 5월 14일로부터 이야기의 실마리를 풀어나가야 하겠다.그날 도청앞 학생 시위대는 전남대생 8천여명외에 전남대 교수 2백여 명도 참석했다. 당시 전남대 교수는 모두 4백여명이었지만 의과대학 교수 1백여명을 제외하면, 2백여명의 교수가 학생집회에 참석한 것은 이례적인 것이었다. 이렇게 많은 교수가 참석하게 된 데는 그 해 4월 20일에 구성된 교수평위원회(의장 정익섭 교수, 부의장 영문과 명노근 교수)에 관여했던 교수들과 교무처장을 비롯한 보직교수들 다수가 앞장섰기 때문이었다. 또 한가지 중요한 이유는 대다수의 교수들이 78년 6월에 내가 작성, 발표했던 「오늘의 교육지표」사건으로 해직됐던 교수들에 대한 죄의식 비슷한 감정을 느끼고 있었기 때문이라고 생각된다.어쨌든 도청 앞에 모인 학생 집회는 그 열기가 대단했다.

오후 3시부터 비가 내리기 시작했으나 학생들은 물론, 교수들도 자리를 뜨지 않았다. 경찰은 주위에서 지켜보고 있었을 뿐 전혀 제지하려는 기색을 보이지 않았다. 오후 6시부터 빗줄기는 굵게 변해 억수같이 퍼붓기 시작했다. 주위에 어둠이 찾아 들기 시작하자 학생들은 학교로 되돌아 가기로 결정했다. 여학생 12명이 든 대형 태극기를 앞세우고 교수와 학생이 8열 종대로 늘어선 행렬은 거의 1㎞에 달했다. 경찰과는 미리 서로 무력을 쓰지 않고 평화적인 시위가 될 수 있도록 요청해 합의를 보았기 때문에 시위행렬은 빗속을 뚫고 아무 탈없이 학교로 돌아갈 수 있었다.나중에 들은 이야기지만, 교수들이 앞장선 이 시위행렬을 본 많은 시민들은 4·19때의 교수단 데모를 연상했었다고 한다. 5월 15일은 전남대생 외에 조선대학, 전남교육대, 전남고, 대동고 학생들이 도청앞에 모였고, 5월 16일 밤에는 3만여명이 대규모 집회를 벌이고 횃불데모로 광주 시가지를 누볐다.

16일 밤의 횃불시위가 끝나 해산하며 학생들은 17일은 일단 시위를 하지 않고 관망하기로 결정하고 만약 휴교령이나 계엄령이 선포되면 학교 앞과 도청 앞 광장으로 집결하자는 약속을 했다.계엄령이 확산되고 계엄군이 학교에 진주하고 난 후 5월 18일에 벌어진 상황을 나는 직접 체험하지 못했다. 5월 19일은 통근버스가 정상 운행되어 9시경 학교에 출근했다. 물론 교수와 학교직원들만 학교에 들어갈 수 있었다. 10시가 좀 넘어 본부건물에서 교문쪽을 바라보니 교문앞에서 계엄군이 학생 6명을 팬티만 입힌 채 마구 때리고 있었다. 이미 이때는 수많은 학생 시민이 부상당하고 연행되었다는 이야기가 펴졌을 때였다. 또 여러 명이 죽었다는 소문도 나돌았다.학생들이 맞는 광경을 직접 눈으로 확인한 우리 몇몇 교수들은(명노근, 김동원 등 6명)서동에 있는 총장집으로 閔俊植총장을 찾아가기로 했다. 민총장은 「어용교수」라고 학생들에게 규탄당하자 그해 5월 들어서면서 칭병한 채 출근하지 않고 있었다. 우리는 총장을 찾아가 『총장께서 직접 나서서 수습하지 않으면 사태가 계속 악화될 것 같으니 학교에 나가 사태를 수습해달라』고 건의했다. 민총장은 『나는 몸도 아프고 내가 나선다해도 무슨 뾰족한 수가 있느냐』고 말했다. 이에 분개한 우리는 『아니, 학생들이 군인들에게 맞거나 죽어가고 있는 판국에 총장이 칭병만하고 있으면 어쩌란 말입니까. 총장이 나서서 말리기라도 해야 할 것 아닙니까』고 총장의 출근을 강력히 주장했다.결국 민총장은 우리의 강권에 밀려 그날 오후 학교에 출근했다.

그러나 우리 교수들도 학생·시민 데모가 점점 확산되는 데 속수무책이었다. 더구나 사태가 악화되자 겁이나 도저히 광주에 더 이상 머물수가 없었다.20일 새벽 우리 교수 6명은 승용차 두 대를 구해 나눠타고 광주를 빠져나왔다. 기차를 갈아타고 대전으로 가 대전서 하룻밤을 지냈다. 21일 서울에 도착해 중구청 부근 여관에 숙소를 정했다. 바로 그날 저녁 「광주사태」를 처음으로 알리는 TV보도가 있었다. 오후 6시경 여관에서 이 보도를 본 우리는 도저히 그대로 앉아 있을 수 없었다. 『광주가 초토화되고 있는데 우리만 살겠다고 여기에 있을 수 있느냐. 광주를 빠져나온 게 부끄럽다』는데 의견을 모은 우리는 죽더라도 광주로 되돌아가자고 결정했다.안진오, 김정기, 노희관 교수는 다음날인 22일 오기로 하고 명노근, 김동원 교수와 나는 곧바로 기차를 타기위해서 서울역으로 나갔다. 이미 호남선은 불통이고 전라선만 다니고 있었고 그것도 곡성까지밖에 못간다는 것이었다. 기차를 타고 다음날 새벽 4시 곡성에 도착한 우리 세명은 택시를 대절, 광주로 향했다. 담양에서 처음으로 계엄군과 접한 우리는 『서울서 사업하는 사람들인데 광주에 있는 가족들이 걱정돼 가는 길』이라고 속여 겨우 통과할 수 있었다. 무등산 뒷편 창평에서 택시를 내린 우리 세명은 무등산 고개길을 걸어서 넘었다.

잣고개를 넘기 전 우리는 어색한 옷차림에 가방을 하나씩 든 사람 10여명을 만났다. 어떤 사람은 추리닝을 입기도 했고 옷이 몸에 맞지 않은 사람이 대부분이었다. 『광주가 어떻게 됐는가』물어도 아무 대답이 없었다. 얼마쯤 가다가 같은 차림의 사람을 5명, 얼마후 또 10여명을 만났으나 이 사람들도 아무말이 없었다. 나중에 알고보니 광주에서 도망치는 전경들이었다. 광주 전망대에 도착한 것이 9시경. 조선대 뒷산으로 후퇴하는 공수부대와 학생·시민군이 교전하는 모습이 눈에 들어오고 총소리가 콩볶듯 했다.전망대에서 내려와 광주시내 지원동으로 들어서니 열서너 살밖에 안된 어린애들이 카빈총을 들고 돌아다니고 있었다. 자동차는 숲속에 감춰져 있었고 가끔 애들이 장난으로 총을 쏴대는 광경이 목격되기도 했다.김동원교수집에 도착한 나는 우선 집으로 전화해 아무일이 없는가 물었다. 그동안 학생을 비롯해 여러곳에서 찾는 전화가 왔다는 것이었다. 명노근교수와 나는 우선 홍남순 변호사댁에 들렀다. 홍변호사는 우리가 들어서자마자 일어서며 같이 나가자는 것이었다. 어리둥절해진 우리는 『어디로 갑니까?』하고 물었다. 홍변호사는 오히려 『나를 데리러 온 것 아니냐』고 반문했다. 알고 보니 이미 구성되어있던 시민대표수습대책위원회(위원장 최한영)에서 여러번 홍변호사를 모시러 왔었다는 것이었다. 홍변호사는 관청에서 주도한 수습위원회에는 못 나가겠다고 버티다가 명노근교수와 내가 들어오는 것을 보고 우리도 수습위에 참여한줄 알고, 그렇다면 자기도 나서겠다고 일어선 것이었다.

우리는 오전 11시경 도청을 방문하여 시민수습대책위원회가 계엄당국에 건의할 7개항 수습안이 결의되는 것을 지켜보았다. 그곳서 돌아온 우리는 오후 1시경 남동성당에 따로 모여 별도의 수습대책위원회를 만들기로 합의했다. 도청에 모인 수습대책위원으로서는 진정한 수습이 이뤄질 수 없다고 판단했기 때문이었다. 남동성당에 모인 사람은 홍남순 변호사, 명노근 교수, 김성용, 조철현 신부, YWCA의 조아라, 이애신 여사, 이기홍 변호사 등이었다.우리는 도청에서 결의된 7개조항에 그대로 따르기로 하고 사망자들의 장례문제를 논의하고 헤어졌다. 나머지 문제는 계엄 당국의 반응을 봐서 다시 논의하기로 했다.친구집에서 점심을 먹고 명교수와 나는 그대로 앉아 있을 수는 없다고 생각, 도청앞 광장으로 나갔다. 많은 학생과 시민들이 도청을 점령하고 있었으나 전혀 질서나 지휘체계가 잡혀져 있는 것 같지 않았다. 우리들은 실제 싸운 사람들도 수습에 참여시켜야겠다는데 의견을 모았다. 명노근 교수가 핸드마이크를 잡고 전남대와 조선대 학생들을 불러모았다. 도청앞 남도 예술회관앞에 모인 학생이 1백여명이었다.

명노근 교수는 정시채 전남부지사를 만나야겠다고 갔고, 나는 전남대 10명, 조선대 10명, 모두 20명의 학생을 데리고 도청 안으로 들어갔다. 도청 현관에 들어서서 왼쪽으로 큰 방이 두 개 있었는데 도청 점령군의 본부격이었다. 한쪽옆에는 김밥이 쌓여 있었고 공수부대원 한명이 잡혀와 한쪽에 앉아 있었다. 구석에 놓인 무전기에서는 군인들간에 교신하는 소리가 소란스럽게 들려왔다. 또 하나 재미있는 일은 사람이 20여명이나 된다는 사실이었다. 지나친 과격발언이나 행동을 하다가 잡혀 온 것이었다.나와 학생들이 방에 들어서자 방안에 있던 사람들이 『누구냐?』고 물었다. 전남대 학생들이 『전남대 교수로 유신정권때 해직됐다 복직된 송기숙 교수』라고 내 소개를 하자, 다시 『뭣 때문에 왔느냐?』고 다그쳤다. 나는 『더이상 사태가 악화되어서는 안된다. 모두 한발짝씩 물러서서 수습의 길을 찾자』고 사람들을 설득했다.

그러자 그중 한명이 나서서 『사람이 이렇게 많이 죽었는데 수습은 무슨 수습이냐』며 내 목에 총을 들이댔다. 두눈이 붉게 충혈되어 있었다. 나는 『야, 이 자식아. 그러면 이렇게 개죽음을 당해도 좋단 말이냐. 이제 개죽음은 그만하고 살아야 할 것 아니냐』고 소리쳤다. 한참 설득 끝에 간신히 사람들을 진정시켜 자리에 앉혔다. 조금 있다 보면 또 다른 사람이 들어와 비슷한 말을 하며 총을 들이댄곤 했다. 그 방에 있던 세시간(6시∼9시)동안 서너차례 그런 곤욕을 치러야 했다.밤 9시경에 가서야 학생수습대책위가 구성됐다. 위원장에는 전남대의 김창길이, 부위원장 겸 장례위원장에는 조선대 김종배가 지명됐다. 그날 밤은 12시가 다돼서 귀가했다. 다음날 새벽 나는 민총장댁으로 전화, 어제 저녁 학생들이 임시수습위원회를 만들었으니, 총장을 비롯한 보직교수들이 도청에 나와 추인을 하고 교수들이 나서서 수습을 주도해 나가야 할 것이라는 요지의 건의를 했다.나는 총장 외에도 여러 교수들에게 전화를 해 같은 요지의 말을 하고 연락이 되는대로 전부 도청으로 나와 줄 것을 요청했다. 이렇게 해서 23일 오전, 도청에 모인 교수는 교무처장 등 50∼60명이 됐던 것으로 기억된다. 교수들은 22일 밤에 결성된 학생수습위를 그대로 인정하고 헤어졌다.

23일, 24일 양일간은 상당히 평온을 되찾았지만, 수습책에는 별 진전을 보지 못하고 여러 의견이 오고 갔다. 25일이 되자 수습분위기가 강경한 노선으로 바뀌었다. 25일은 비가 무척 많이 쏟아진 날이었다. 오전 11시경 YWCA 2층 총무실에서 홍남순 이성학(기장 장로)조아라 이애신 이기홍 박석무 명노근씨 등과 내가 모였다. 학생을 대표해서 이 자리에 참석했던 정상용(전남대 제적학생)이 『계엄당국이 우리의 수습조건을 받아들이지 않으니, 죽음을 각오하고 싸우는 수밖에 없다』고 말했고, 나머지 사람들은 대체로 싸운다는건 개죽음밖에 안되니 계속 계엄당국과 협상을 통해 우리의 주장을 관철해 나가자는 입장이었다. 별 신통한 결론이 나지 않은 상태로 헤어질 수밖에 없었다.

25일은 또 그동안 자취를 감췄던 많은 학생들이 도청으로 다시 모이기 시작한 날이었다. 그날 저녁 우리 남동성당측 수습위와 도청측 수습대책위가 도청에 같이 모였다. 남동성당측은 『계엄당국이 7개조항 중에서 「총을 들었던 학생·시민을 처벌하지 않겠다」는 한가지만 들어주면 무기를 수거하고 수습의 길을 찾도록 하자』는 주장이었고, 도청파 수습위는 『무조건 무기를 반납하고 투항하자』는 입장이었다. 이에 반해 학생과 젊은 시민들은 『그동안 계엄당국과의 접촉으로 봐서 하나도 실현될 게 없으니 끝까지 싸우는 수밖에 없다』는 주장을 들고 나왔다. 우리 남동성당측 수습위와 학생들은 도청파 수습위를 퇴장시키고 회의를 계속했지만 결론을 내지 못했다.

그동안 간간이 있어왔던 계엄군 진주소식이 본격적으로 나돌기 시작했기 때문인지 분위기는 무척 싸늘했다. 회의가 끝나고 나는 학생 시민들에게 『이제 각자 자기가 알아서 행동할 수밖에 없다. 누구도 딴 사람의 행동을 책임질 수 없다』는 말을 했다. 각 성당에 모여 있는 청년들을 모아와서 도청을 지켜야 한다는 이야기도 있었다.저녁 9시경 명노근 교수와 함께 도청을 나온 나는 동구청뒤의 음식점에서 저녁을 먹고 집으로 향했다. 아이들에게 줄 과자꾸러미를 옆에 낀 채였다. 한 학생이 뛰어오더니 YWCA강당에 학생들이 모여 있으니 같이 가담하자는 것이었다. 나는 YWCA에 모여 있던 학생들에게도 도청에서와 같이 『계엄당국이 우리 조건을 들어주지 않을 것 같으니 각자 알아서 행동하라』고 말한 후 귀가했다.도저히 수습의 길이 없다고 판단한 나는 26일 아침 명노근·김동원 교수와 같이 광주를 빠져나와 서울로 몸을 피했다.

박효선(당시 수습대책위 홍보부장)

피신하던 「포로시민」, 무자비한 구타

18∼22일까지는 전단과 간이신문 제작에 참여했다.19일 아니면 20일의 일이었다. 공용터미널 부근까지 사람들이 밀려갔다. 밀리고 쫓기는 혼란속에서 미처 도망 못간 사람들이 트럭에 실리고 있었다. 트럭에 실린 사람들은 팔다리가 바깥에 늘어졌고 몽뚱이만 포개진 상태로 대단히 충격적이었다.MBC에 화재가 나기 전 승용차 한 대가 불탔는데 그옆에 대검이 꽂힌 채 한 청년이 쓰러져 있었다.

21일 낮 노동청 지방사무소 부근에는 자동차의 불탄 잔해가 버려져 있었다. 이때 데모대가 소방차를 몰려 가다가 사람은 뛰어내리고 차는 계속 돌진을 시켰다. 그럴 즈음 도청앞 분수대 쪽에서 총소리가 나고 데모대를 따라 가던 중학생 하나가 『억』하고 쓰러졌다.몇몇이 눈치를 보며 그 중학생 쪽으로 기어가 들쳐올려 리어카에 실었다. 그 소년은 허리 뒷편에 총을 맞았다. 김화중 정형외과로 옮기니 가망이 없다며 데려가라고 해서 조선대 부속병원으로 향하는 환자수송 차량에 실어줬다.18일경 보수공사가 벌어지고 있던 금남로로 공수부대원들이 진입하는 장면이 처음 목격했다. 길 양편으로 한 줄씩 두줄로 갈라선 이들은 행진을 계속하며 군중들을 제압했다.19일쯤 장동로터리 윗길에 있던 파출소를 부르고 도망가던 학생들은 추격하는 버스를 도리어 포위, 시골에서 차출돼 올라온 나이먹은 경찰관들을 포로로 삼았다.경찰관들과 협상을 벌이던 중 느닷없이 트럭이 1대 달려 오더니 20명쯤의 공수부대원들에게 달려 들었다.

땅바닥에 주저 앉아 있던 학생들은 붙잡히고 수많은 학생들도 공수부대원 앞에서는 맥을 못췄다.방망이로 머리, 어깨를 내리치자 맞은 사람들은 그 자리에서 쓰러졌고 트럭에 실린 학생들을 개머리판으로 짓이겼다. 몰려 들었던 사람들은 뿔뿔이 흩어져 도망을 갔으며 미처 피하지 못한 사람들은 몽둥이로 두드리고 포로로 잡힌 사람들을 꿇어 앉게 해 무릎을 군화발로 밟거나 박달나무 방망이로 무자비하게 팼다.

위인백씨(이기홍변호사 사무장)

「부처님 오신 날」의 처참한 주검들

16일 저녁, 시민들은 횃불 데모대에 일부 참여했다. 경찰은 교통정리를 했고 교수들은 학생들을 보호하기 위한 것인 듯 학생들 옆과 뒤를 따랐다. 고향인 장흥 출신의 어르신네들이 모임을 가졌다. 경찰이 고생하는데 경찰에게만 콜라박스를 보내야 하느냐고 이야기했다.17일 밤 TV자막으로 전국 계엄확대 발표가 됐다. 나는 무슨 큰일이 일어나는 것 아닌가 걱정됐다. 18일 아침, 전남대 쪽에서 나오는 풍양동 시내버스 안에서 학생들이 『군인들이 학교에 못들어가게 한다』고 자기들끼리 수근대는 소리를 들었다. 심상치 않다고 생각했다. 금남로 사무실에 출근했다가 볼일이 있어 어디를 갔다가 저녁 때 와보니 군인들이 가혹한 행위를 했다는 말을 들었다. 무서운 생각이 들어 동구청 직원들이 퇴근할 때 어울려 귀가했다.19일. 18일의 상황이 곳곳에서 반복됐다. 일일이 입으로 말할 수 없을 만큼 무서운 장면을 보았다. 시방에서 군인들을 욕하는 소리가 들렸다. 오후에 퇴근하다가 어렵다고 생각, 어제처럼 공무원행세를 하며 시내를 빠져나갔다.

20일 동구청 후문에 학생의 시체가 있었다. 전일빌딩 옥상에서 조준사격한 총에 맞아 즉사한 것이다. 시체를 본 시민들이 흥분했다. 오후 6시에서 7시 사이 비가 왔다. 광주은행 옆 지하상가는 당시 공사중이었다. 집에 못들어간 시민들이 우산을 들고 공사장 부근 구석 구석에 몇십명씩 운집해 있었다. 거리는 최루가스로 가득차 눈을 뜨고 걸어다닐 수 없을 지경이었다. 밤, 택시기사들이 차를 몰고 금남로 5가 쪽에서 도청 쪽으로 밀고 왔다. 나중에 들었더니 공설운동장에 집결하여 전남대-신역-공용터미널을 거쳐 금남로로 오고 있다는 얘기였다. 군중들은 그 모습을 보고 천만의 원군을 만난 것처럼 좋아했다. 헤드라이트를 밝히고 클랙션을 울리며 금남로에 진입한 택시옆에는 어둠을 도와 시민들이 몰려들었고 나도 시간 가는 줄 모르고 그 대열에 휩쓸렸다. 누군가 애국가를 선창했다. 시민들이 따라 불렀다. 「전우의 시체를 넘고 넘어…」라는 노래도 불렀다.나는 대열에서 벗어나 다른 거리는 어떤지 가 보았다. 소방서 네거리, MBC쪽도 마찬가지로 사람들이 가득 차 있었다. 소방서 앞에서는 젊은이들이 소방차를 끌어내고 있었다. 나는 마음속으로 「저래서는 안될 텐데…」라는 생각이 들었다. 30분쯤 후 금남로에 다시 왔다.

그때가 밤 11시쯤이나 됐을까. MBC에서 불길이 충전했다. 갑자기 배가 고팠다. 집생각이 났다. 식구들도 걱정됐다. 걸어서 집에 돌아와 저녁을 먹었다. 말이 저녁이지, 새벽참이었다. 함숨 자고 사무실로 전화해 봤더니 아직도 시민들이 흩어지지 않고 있다고 했다.21일 한숨 자고 시내에 나왔다. 세무서가 불탄 것이 눈에 띄었다. 시민들이 리어카에 시체 3구를 싣고 계엄군과 대치중이었다. 전씨 성을 가진 여인이 마이크를 잡고 시민들을 선동하고 있었다. 말이 너무나 유창하여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 KBS쪽을 가봤다. 그때까지 화광이 충전했다. 시청 앞에 사람들이 몰려있고 투석전의 흔적이 남아 있었다. 이날은 부처님오신 날이어선지 부인들이 떡바구니를 들도 다니며 시민들에게 나누어 주는 모습도 보였다. 저녁, 집에 들어가보니 작은방에 세들어 사는 경찰관이 민간복을 얻어 입고 뒷담 넘어 도망왔다며 집에 와 있었다.

23일 사무실에서 집으로 전화가 왔다. 사무실에 8시까지 나오라는 내용이었다. 사무실에 8시까지 나오라는 내용이었다. 사무실에 나왔더니 이기홍변호사 방에 이성학 제헌의원, 송기숙 교수, 명노근 교수, 앰네스티 광주지부장 등이 모여 있었다. 그들은 『사태 수습을 위해 우리가 나서야 되지 않겠느냐』는 내용의 이야기를 주고 받았다. 그들은 YWCA를 거쳐 남동성당으로 갔다. 나도 그들을 수행해서 따라갔다. 결국은 도청 수습위원회와 합치게 돼 도청으로 옮겼다. 거기서도 대책위원들이 대책을 계속 논의했다. 그런데 누가 그들의 발언을 기록하는 사람이 없었다. 나는 누가 시킨 것도 아니지만 지금의 발언들이 곧 역사라는 사명감에서 기록을 맡아하게 됐다. 대책위원들이 짜낸 수습대책 8개항도 내가 기록하고 인쇄했다. 그것 때문에 나는 훗날 서기담당이라는 이유로 재판에 회부돼 중형을 선고받았다.

윤석루씨(시민군 기동타격대장)

「계엄군 진주」第 1報에 非常

나는 25일부터 이재호씨와 기동타격대를 조직했다. 기동타격대라니 이름은 거창하지만, 사실은 외곽 치안책임대였다. 행정이 공백상태였기 때문에 이 상태를 메꾸지 않을 수 없다고 생각했다. 나는 우선 급한대로 포스터를 제작, 외곽지대를 돌며 붙이고 다녔다. 「긴급상황이 발생하면 다음 번호로 전화하라」는 내용이었다. 25일 저녁부터 강도 도범 포격범 등을 신고받아 몇 명 잡아내기도 했다. 우리는 조사 능력도 없고 범인들을 데리고 있는데 문제가 있어 이들을 계엄사에 넘겨줬다. 특히 주월동 신우아파트 난동자들을 잡아오기도 했다.

그러나 25일이 월급날이었지만 돈을 뺏기 위한 강도를 했다는 얘기는 못 들었다.26일부터 나는 군인들이 들어올 것에 대비, 타격대를 16개조로 나누어 외각지역을 순찰시켰다. 각조(16명)마다 무전기 1대와 지프차를 배정했다. 새벽 1시30분인지 2시인지 화정동을 지키고 있는 박인수로부터 『계엄군이 들어온다』는 제 1보를 받았다. 『군인의 전차를 발견하고 교전중』이라는 보고와 함께 박인수가 다쳤다는 얘기도 전해들었다.

나는 바삐 대변인(윤상원씨)에게 알리고 수습대책위원회에도 알렸다. 나는 또 우리 조원들에게 비상을 걸어 도청주변을 강화시켰다. 대변인은 다시 목포초급대학에 다니던 이경희양을 시켜 시민들의 협조를 구하는 차량 순회방송에 나서도록 했다. 또 예비군을 동원, 총기를 배급하고 배치됐다. 그러나 준비를 한 것은 결코 아니다, 다만 도망치면 더 큰 죄인이 된다고 생각했다. 의당 잡힐 줄 알았지만, 우리 반은 아무도 도망갈 생각을 품고 있는 것 같지 않았다.새벽 4시반인가 군인들이 사전경고없이 총격을 가하고 화염방사기로 방사하며 뛰어들어왔다. 나는 부지사실에서 군인들에게 붙잡혔다. 부지사실 앞에서 화염방사기에 그을려 죽은 시체를 봤다. 군부대에 끌려간 우리 앞에서 가면을 쓴 사람이 우리 얼굴 하나하나를 찍어가며 주모자인지 아닌지 가려 주고 있었다.

김종배(당시 조선대 3년)

여학생 죽는 것 보고 총 들어

나는 도청을 점거한 학생 시민들로 구성된 학생 수습위원회의 부위원장 겸 장례위원장을 맡고(나중에는 위원장을 맡았다)계엄군이 27일 새벽 진입할 때까지 도청에 남아 항거하다 체포되어 실형을 살았다.당시 군에서 제대, 복학(조선대 농대)한 지 얼마 되지 않았고 학생운동에 큰 관심도 없었다. 그런 내가 도청 점거팀에 합류하게 된 것은 21일의 충격적인 사건때문이었다. 21일 오후 도청앞에서 계엄군이 일제히 발포를 시작했을 때 나는 가톨릭센터 부근에 있었다. 처음엔 공포탄인 줄 알았는데 여기저기서 사람들이 쓰러졌다. 『이럴 수가 있는가. 군인이 시민들을 향해 조준사격을 하다니』나는 경악했다. 그러나 그런 생각만 하고 있을 수는 없었다. 우선 부상자들을 병원으로 옮겨야만 했다. 학생 시민들이 중상자는 전남대병원 등 종합병원으로 실어 나르고, 경상자는 인근 병원으로 옮기기 시작했다. 나도 같이 있던 친구들과 경상자 세명을 업고 동구청 뒤의 홍안과로 달렸다. 부상자를 홍안과에 내려 놓은 뒤 현관에서 밖의 상황을 살폈다.

여고생 한 명이 위에는 교복을, 밑에는 흰 체육복을 입고 지나갔다. 그런데 갑자기 어디선가 날아온 총알을 맞고 여학생이 쓰러지는 게 아닌가.어디서 총알이 날아올 줄 몰라 한참 지난 뒤에 쓰러진 여학생을 홍안과로 데려와 살펴보니 이미 숨진 후였다. 나는 속으로 울었다. 이제는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다. 나는 그날 저녁 드디어 총을 들었다. 그리고 계엄군과의 교전에 참여했다.22일 오후 2시쯤으로 기억된다. 도청 앞 광장에서 학생 시민들이 참석한 가운데 정시채 전남부지사가 주최한 시민수습대책위가 있었다. 최한영·장휴동·이종기씨 등이 시민 수습대책위원이라고 소개됐다.정시채 부지사가 장휴동씨와 같이 분수대 위에 올라와 『무기를 무조건 반납하고 투항하지 않으면 모두 죽는다』고 학생 시민들을 설득했다.나는 분수대 위로 뛰어 올라 마이크를 빼앗아들고 울부짖었다. 『사람들이 이렇게 많이 죽었는데, 무조건 무기를 버리고 투항하면 어쩌란 말이냐. 시민들이 흘린 피는 생각지 않느냐. 우리가 뮐 잘못했단 말인가』또 정시체 부지사와 수습대책위원이란 사람들을 향해 소리쳤다. 『야, 이 광주시민들의 피를 팔아 출세하려는 놈들아, 너희들은 필요없다. 다 꺼져라』그들은 모두 쫓겨 내려가고 도청앞 광장은 성토장으로 변했다.

여기저기서 공포를 쏘며 환호하는 시민들도 있었다. 우리는 그날 오후 각 병원에 분산되어 있던 시체를 전부 도청앞으로 모았다. 모두 50구 정도가 됐다. 오후 4시에 시체를 늘어놓고 시민 궐기대회를 가졌다. 시민들은 사후 수습을 관변수습대책위에 맡길 게 아니라 학생 시민들이 중심이 되어 처리하기로 의견을 모았다.그날 저녁 남도예술회관 앞에 전남대·조선대 학생들이 모여 학생 수습위를 구성했다. 학생수습위는 전남대 송기숙 명노근 두 교수를 지도교수로 모시고 전남대 조선대 학생들로 구성됐다. 위원장 김창길(전남대), 부위원장 겸 장례위원장 김종배(조선대), 총무 정해민(전남대), 대변인 양원식(조선대), 무기수거반장 허규정(조선대), 보급부장 구성주 등이었다. 처음 구성됐던 이 수습위 간부들은 그후 여러번 바뀌었다.위원장인 김창길은 주로 어른들과 계엄사를 오가며 수습책을 논의했고 나머지 학생들이도청에서 자체 수습에 나섰다. 장례위원장을 맡은 나는 도청 안마당에 시체를 입관시켜 놓고 가족의 생사를 확인하려는 시민들을 한 사람씩 들여보내 신원을 확인시켰다. 시체는 신원이 확인되는 대로 상무관에 안치시켰다. 무엇보다 어려웠던 일은 관 구입이 용이하지 않은 것이었다. 죽은 사람이 너무 많아 관이 부족했던 것이다.

23일 정시체 부지사가 도청직원을 출근시켰으면 좋겠다고 말해, 우리는 국장급 이상의 직원만 출근하도록 조치했다. 그날 오후 4시 도청에서 구용상 광주시장 주재로 도청 국장연석회의가 있었다. 구시장이 학생 대표의 참석을 요구해 와 나와 허규정이 회의에 참석했다. 구시장은 『우리가 행정적으로 지원할 사항이 있느냐』고 물어봤다. 우리는 『시체를 옮길 앰뷸런스가 없고, 식량이 부족하니 하루 쌀 세 가마니를 공급해 달라』고 요청했다. 또 『관 구입에 애를 먹고 있으니 관을 좀 구해줬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구시장은 모든 것을 되는 방향으로 처리하겠다고 약속했다. 나는 또 사망자들의 장례식은 광주 시민장으로 치를 수 있도록 행정적 지원을 요청해 시장의 응락을 받아냈다.24일 오후 6시에 김창길이 계엄사를 다녀온 결과를 놓고 학생수습위 회의가 열렸다. 김창길은 『계엄사에서 총기를 반납 않으면 군을 진주시키겠다고 한다.

그러면 우리 모두 죽게 되니 무조건 총기를 반납하자』는 의견을 내놓았다. 나는 무조건 총기를 반납한다는 것은 말이 안 된다면서 4가지 요구사항을 제시하자고 말했다.즉 ①광주시민이 폭도가 아니라는 사실을 매스컴을 통해 공개적으로 인정하고 ②구속된 학생 시민을 전원 석방할 것이며 ③사망자뿐 아니라 부상자에 대해서도 충분한 피해보상과 치료를 약속하라 ④장례식은 시민장으로 할 수 있도록 조치해 달라는 것이었다. 나는 이러한 요구가 관철되지 않는 한 결코 총을 놓을 수 없다고 주장했다.처음 도청을 점거할 때부터 도청내의 학생 시민들간에는 의견이 상당히 엇갈렸다. 대별해서 무조건 총을 놓고 투항하자는 측과, 학생 시민들이 내건 요구조건의 관철이 선행되어야 한다는 측이었다. 전자를 「온건파」, 후자를 「강경파」라고 불렀다. 내 의견으로는 후자를 주장한 측이 결코 「강경파」라고 생각지 않는다. 우리가 내건 주장이 정당한 것이었다고 믿기 때문이다. 여하간 그날 저녁 양측의 안을 놓고 격론을 벌이던 우리는 책상을 뒤엎고 싸우기까지 했다. 그 후에도 「온건파」와 「강경파」는 수시로 대립, 총으로 서로 위협하는 사태가 자주 있었다. 두 파간에 대립이 너무 심해 「강경파」를 지지하던 박남선 상황실장은 내게 경호 두 명을 붙여주기도 했다. 그만큼 양측의 대립이 심했고 총을 휴대하고 있었기 때문에 생명의 위협까지 느껴야 했다.

24일 저녁 「온건파」와 「강경파」의 대립 속에 회의는 결론을 내리지 못하고 끝났다. 그날 저녁 늦게 도청에 와 있던 전남대 사대학장 오병문 교수가 나를 부렀다. 오교수는 장형태 전남지사의 친구로 며칠 전부터 사태를 원만히 수습하기 위해 도청에 자주 드나들며 학생들을 설득하고 있었다. 나는 오교수에게 『현재 구성돼 있는 시민수습대책위는 계엄사 입장만 대변하고 있어 대화가 되지 않습니다. 양식있는 시민들로 수습위가 재구성됐으면 좋겠습니다』하고 말했다. 오교수는 『그렇다면 내가 가톨릭신부를 한 명 소개해 줄테니 같이 얘기해 보라』며 조철현 신부를 모시고 왔다. 조신부는 『그동안 남동성당에서 따로 모여 수습책을 강구해 온 사람들이 있으니 같이 이야기하자』며 다음날 홍남순, 김성용, 조아라, 이애신씨 등을 모시고 왔다.

「시민수습위」와 「남동성당파」인사들, 학생들이 같이 모여 논의한 결과 얘기가 통하지 않는 「시민수습위」측을 모두 내보내고 「남동성당파」와 학생 시민들만 남아 수습위가 재구성됐다. 홍남순 변호사가 위원장, 김성용 신부가 대변인으로 선출됐다.25일에 소위 「독침사건」이란 게 있었다. 도청에 들어와 있던 장계범이란 사람이 간첩의 독침을 맞고 쓰러졌다고 알려진 사건이었다.내가 아는 사건의 전모는 이렇다. 시간은 정확히 기억나지 않지만, 도청 1층 지방과에서 누가 독침을 맞았다는 얘기가 들렸다. 내가 현장으로 달려갔을 때 장계범은 이미 병원으로 실려간 후 였다. 그 자리에 있던 사람에게 물어봤더니 전향규란 사람이 독침으로 장계범을 찔러 둘 다 전남대 병원으로 실어 보냈다는 것이었다. 독침이란게 현장에 남아 있었는데 보통 우리가 쓰는 볼펜이었다. 이상한 생각이 들어 병원에 사람을 보내 자세한 내용을 알아오라고 시켰다.

그러나 장계범과 전향규 두 사람은 이미 병원에 없었다. 담당 의사는 독침을 맞은 흔적이 없다고 말하더라고 했다. 장계범의 집을 안다는 사람이 있어 나는 윤석루를 시켜 장계범을 잡아 오라고 시켰다. 윤석루는 황금동의 장계범의 집에는 아무도 없어 대문짝을 부숴버리고 그냥 돌아왔는데 항상 군용무전기를 들고 다니며 계엄군의 교신내용을 잡는다고 설치고 돌아다녔던 사람이다. 실지로 가끔 계엄군의 동태가 어떻다는 등 떠들고 다녔다. 언젠가 3층 빈방에서 무전기에 대고 무어라고 말하는 걸 본 적이 있는데, 장계범이 지나치게 놀라 조금은 이상하게 느꼈었다.독침사건이 완전히 조작되었다는 증거는 그후 내가 계엄사에 붙들려 갔을 때 확인됐다. 27일 도청에서 연행돼 계엄사 헌병대 연병장에 엎드려 있는데 모두들 얼굴을 들게 하고 주모자급을 가려냈다.

그런데 장계범이 누가 주모자라고 손짓을 하며 잡아내는 게 아닌가. 그 자리에서 장계범이 지적한 10여명이 주모자로 따로 분류됐음은 물론이다. 여하튼 25일 오후에 시민 수습대책위원회의 한 사람이던 장세균 목사가 외신기자들을 불러 놓고 간첩의 독침에 두 명이 죽었다고 발표했고, 어처구니없게도 그날 저녁 TV에 이 사건은 「독침사건」으로 보도됐다. 이 사건으로 도청내에는 불신감이 만연되고 「강경파」는 빨갱이로 몰렸다. 나는 신변의 위협을 느끼기도 하고 이대로 그냥 있다가는 「온건파」에 밀려 그대로 무너질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그날 저녁 YWCA에 있던 윤상원과 의논해 YWCA에 있던 학생 1백명을 밤 10시에 도청으로 진입시켰다. 우리는 도청 상황실에서 이들을 무장시켜 김창길을 비롯한 「온건파」10여명을 쫓아냈다. 이들을 쫓아내는 데는 상황실장 박남선이 앞장섰다. 「온건파」들은 도청에서 쫓겨나가며 식당에서 취사를 담당하던 여학생과 외곽 경계를 서고 있던 사람들에게 『계엄군이 곧 진주한다』고 설득, 이때 상당수의 사람이 빠져나갔다. 「온건파」들을 쫓아낸 후 나는 정상용, 윤상원 등과 의논, 수습위를 투쟁위로 개편했다. 계엄사가 우리의 요구를 하나도 들어주지 않을뿐더러 계엄군 진입설이 본격화된 판국에 수습은 불가능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공식명칭을 시민학생투쟁위원회로 정하고 내가 총위원장에 선출됐다. 그밖의 간부들은 다음과 같다.외무부위원장 정상용, 내무부위원장 허규정, 대변인 윤상원, 기획실장 김영철(위원 이양현 윤강복), 민원실장 정해직, 상황실장 박남선, 기동타격대장 윤석루(부대장 이재화)등.26일엔 그동안 보이지 않던 장형태 도지사가 도청에 출근했다. 오병문 교수가 와서 도지사가 만나고 싶어한다는 말을 전했다. 정상용과 나는 도지사실을 찾아가 도지사를 만났다. 우리는 『전혀 성의를 보이지 않는 계엄사와 더 이상 대화를 못하겠으며, 이대로 총을 놓을 수는 없다. 우리의 최소한의 요구가 관철되도록 주선해 달라』고 강력히 요구했다. 또 사망자들을 도민장으로 장례를 치를 수 있도록 해 달라고 건의했다.

장형태 지사는 『방금 상무관에 안치된 시체를 보고 왔다. 특히 일가족 3명이 몰살된 것을 보니 가슴이 아프다. 사망자에 대해서는 28일 도민장을 치를 수 있도록 주선하겠다』고 말했다.우리는 또 그날 시장과 도청 국장들이 모인 자리에서 『시민들이 불편을 느끼고 있으니 버스를 운행하도록 하고 시장을 개방하도록 조처해 달라』고 요구했다. 그리고 학생들로 홍보반을 편성, 시내를 돌아다니며 이러한 사실을 알리고 시가지 청소에 힘썼다. 그래서 26일은 시장도 어느 정도 개방되고 평온과 질서가 상당히 회복됐다.26일 오후, 계엄사는 수습위를 통해 5시까지 무장을 해제하지 않으면 계엄군을 투입하겠다고 알려왔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의 최소한 요구가 관철되지 않는 한 끝까지 버티겠다고 나섰다. 수습위는 계엄사에 가서 군병력 투입만은 막아보겠다고 나섰다. 그러나 예정된 5시가 돼도 계엄군은 진주하지 않고 계엄사에 갔던 수습위원들도 돌아오지 않았다. 그날 저녁 5시가 휠씬 지난 뒤에 수습위원들 중 조철현 이애신 조아라씨가 돌아왔다. 그러나 그들도 대책이 없었다. 계엄사는 곧 군을 투입시키겠다는 입장을 강경히 내세우던란 얘기였다. 그날 낮에 정시채 부지사가 허규정과 나를 불러 『계엄군이 곧 진주할 텐데, 내가 미리 귀띔해 줄 테니까 학생들은 모두 빠져나가라』고 말했었고, 우리는 『만약 계엄군이 진주하면 도청 지하실에 있는 폭약을 폭발시키겠다』고 말했었다. 나중에 알고 보니 도청 지하실의 폭약은 계엄군 프락치에 의해 이미 뇌관이 제거된 상태였다. 우리는 장형태 지사가 28일 도민장 거행 약속도 있고 해서 설마 계엄군이 그때까지는 투입되지 않을 줄로 생각했다. 참으로 순진한 생각이었다고 느낀 것은 정작 계엄군이 진주한 후였다.

어쨋든 계엄군이 투입된다는 불안감속에 26일의 밤이 찾아 들었다. 수습위원들도 모두 돌아가고 학생과 시민들만이 도청을 지키고 있었다. 단지 처음에 구성됐던 시민수습대책위의 이종기 변호사만이 도청으로 다시 돌아왔다. 이변호사는 『수습위원을 맡았는데 수습을 못 했으니 학생들과 같이 죽겠다』며 2층에 자리잡았다. 이 변호사는 학생들과 같이 죽을 작정으로 목욕을 하고 왔다는 것이었다.밤 12시가 넘어 시민들에게서 계엄군이 움직이고 있다는 제보 전화가 도청으로 걸려왔다. 우리는 차마 계엄군이 들어올까 반신반의하며 기동타격대에게 순찰을 내보냈다. 시내로 나갔던 기동타격대에게서 정말 계엄군이 진입하고 있다는 소식이 날아들었다. 27일 새벽 2시가 가까운 시간이었다.

도청 안에 비상을 걸고 박영순(여·송원전문대학)과 이경희(여·목포전문대), 두 여학생들 데모진압용 개스차에 태워 시민들에게 방송하도록 시켰다. 계엄군 진입을 알리는 두 여학생의 가두 방송이 나가자마자 총성이 울리기 시작했다. 이때가 2시 15분이었다고 기억된다. 우리는 수류탄과 실탄을 새로 지급하고 학생, 시민들을 도청 곳곳에 배치시켰다. 3시 30분쯤 도청 후문쪽에 군인의 모습이 보였다. 30분 이상 교전이 계속됐다. 2층 부지사실에 있던 우리일행 5명은 1층이 점거됐다는 얘기를 듣고 4층으로 올라갔다. 한참 지난 후에 아래층이 조용해졌다. 아마 우리 5명이 마지막 남은 모양이었다. 문을 열고 내다보니 4층 복도까지 올라와 있던 계엄군이 총을 쏘았다. 계엄군은 핸드마이크로 『상황이 끝났으니 총을 버리고 나오라』고 소리쳤다. 일순간 우리는 싸우다 죽을 것인가, 나갈 것인가 망설였다. 한 명이 『어차피 모두 끝난 모양인데, 나갑시다』하고 말했다. 한참동안 망설이던 우리는 그말에 총을 버리고 밖으로 나갔다. 우리는 결국 포승에 묶여 연행되어 모든 상황을 끝나고 말았다.

전용호(당시 전남대학생)

유인물 제작 살포에 주력

나는 80년 당시 전남대 학생으로 전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