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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2007-05-30

[월간지 관련기사] 민화위에서 털어놓은 증언록.김성수,소준열,전계량,전옥주,김영철,이광영(월간경향, 1988. 3)

본문

입체특집

光州사태를 再審한다.



民和委에서 털어놓는 증언록

‘진상조사후 명예 회복을’ 金成洙

‘사태수습에 최선 다했지만’ 蘇俊烈

‘民和委에 무엇 기대하랴’ 田桂良

‘간첩누명에 拷問까지’ 全玉珠

5·18 光州사태 계엄군 手記

‘다같은 피해자, 참회의 마음을’ 金永哲

5·18 光州사태 시민군 手記

錦南路 10일, 스님이 겪은 煉獄 李光榮



입체특집/光州사태를 再審한다.

지난 1월 11일 구성된 民主和合推進委員會는 당초 ‘들러리’가 될지도 모른다는 우려을상당부분 불식시키면서 그동안 왕성한 활동을 보여왔다. 또한 지금까지 ‘禁忌’나 ‘聖域’으로 여겨져 왔던 사안들을 거침없이 언급하는가 하면 과거의 숨겨진 恥部마저도 서슴없이 끄집어 내는 과감성을 보였다.특히 民和委의 핵심이라 할 수 있는 光州사태를 다룬 국민화합분과는 당시 현장을 찍은 총 5개의 비디오를 관람한 후 2월 3일부터 총 14명의 참고인들로부터 진술을 들었다. 신중하게 인선된 참고인들 중 피해자측은‘명예회복’을 선결과제로 요구했고 당시 정부측 및 군관련측은‘과잉진압’을 대체로 시인했다. 2월 8일까지 진술한 참고인은 피해자측에서 李光榮씨(5·18부상자회 부회장)·金成洙씨(5·18부상자회 부회장)·田桂良씨(5·18光州의거유족회 회장)·金玉珠씨(주부·당시 가두방송요원)등이 나왔고 軍에서는 蘇俊烈씨(당시 계엄사光州분소장)가, 官에서는 具龍相씨(당시 光州시장)등인데 이중 金成洙씨와 蘇俊烈씨, 田桂良씨와 金玉珠씨의 증언을 녹음, 그대로 공개한다.



民和委에서 털어놓는 증언록

‘진상조사후 명예회복을’

金成洙 5·18부상자회 부회장

일가족 3명이 총상

민주화합추진위원장님을 비롯 여러 위원님께 광주문제에 대해 증언대에 오르게 해준 데 대해 대단히 감사합니다. 저는 지난 80년 5월 길을 가다 일가족 3명이 총에 맞아 어려움 속에 현재 진도에서 살고 있는 김성수입니다. 8년이라는 긴세월 동안 제가 당한 심신의 고통은 무엇으로도 다 표현하기 어렵습니다.늦게나마 새로운 민주정부가 들어서게 된 이 마당에 이 나라에 민주화합을 이룩하여 광주문제를 해결하시기 위해서 각계에서 모이신 여러 저명하신 선생님들께 감사 말씀 드립니다. 생각하면 광주문제는 어느 누구도 전모를 알 수 없는 큰문제이며, 따라서 어느 부분밖에 알 수 없는 문제입니다. 그래서 저는 제가 겪은 일부분만 말씀드리겠습니다. 저는 일찍이 6·25 동란시 학도병에 자원 입대하여 공산군과 싸우다가 4년만에 만기제대를 한 후 조그만한 화물차를 가지고 생계를 꾸려가고 있었습니다. 5·18 사건이 났을 때도 저는 서울로 채소를 운반하고 있어 저의 처와 당시 다섯 살 먹은 딸 김래향이가 광주에 올라와 있었습니다.그 날 1980년 5월 22일도 광주는 교통이 차단되고 선량한 시민학생들은 계속 총에 맞아 죽어가고 있었습니다. 그 날도 저의 세 식구는 광주에 있기가 심히 무섭고 또 고향 진도에 남겨놓은 식구들이 걱정되어 광주를 빠져나가 진도로 갈려고 했습니다.

시내로 가려는 순간 총을 난사

그래서 22일 오전 10시경 고향 진도방면인 남쪽으로 갈려고 했으나 모두 군인들이 가로막고 못 나가게 했습니다. 그래서 어느쪽이든 광주를 벗어나야 된다는 생각에 북쪽 방면이 담양방면으로 방향을 돌려 갈려고 했습니다.그러나 그 곳에서도 울면서까지 저의 세식구가 사정을 했으나 끝내 거절당했습니다.그 군인들은 울면서 매달리는 저의 처 김춘화에게 발길질을 하고 권총을 빼서 겨누면서 시내로 돌아가지 않으면 죽이겠다고 마구 폭언을 해댔습니다. 저희는 별수없이 화물차에 다시 타고 막 시내로 출발하려는 순간 군인들은 M16총으로 무차별 난사를 가했습니다. 그래서 저희 세식구는 총에 맞고 쓰러졌습니다.옆구리에 총을 맞았으나 비교적 경상인 저는, 척추에서 피가 샘솟듯이 흐르고 있는 저의 어린 딸과 머리통과 어깨, 허리 등에 무수히 총에 맞아 쓰러져 있는 저의 처를 살려야겠다는 일념에 한 3백m쯤 차를 몰고 도망하다가 저도 쓰러져 버렸습니다.얼마쯤 있다가 정신을 차려보니 전남 대학병원 응급실에 제가 누워 있었고 저의 처와 어린 딸 래향이는 혼수상태에서 피범벅이 된 채 누워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저희를 시민들이 병원에 옮겨놓은 것이지요.그후 저는 몸에 박힌 실탄과 파편을 제거하고 기어다니면서 내 딸과 처를 살려달라고 지나 다니는 의사들게 울면서 통사정을 했습니다. 그러나 워낙 많은 사람이 순간 순간 죽어나가 시체실로 옮겨지고 피가 부족하여 수혈도 제대로 받지 못했습니다.

술집의 접대부, 심지어는 간호원들까지 현혈을 하는 등 시민들의 도움으로 피를 얻어맞고 저의 처와 자식이 혼수상태에서 깨어난 것은 몇시간 뒤의 일이었습니다.이튿날인 23일 신경외과로 옮겨진 저의 처자식은 목숨을 건졌으나 저의 처 김춘화는 끝내 정신이상증세와 통증에 계속 신음했고, 그리고 저의 어린 딸 래향이는 하반신 불구가 되어 휠체어신세가 되었습니다.그후 처는 뇌수술을 세 번 받고 5년이 흐른 85년 12월 7일 통증에 시달리면서도 정신이 조금씩 돌아서면 딸의 병상을 지키다가 딸의 휠체어를 밀고 병원 옆을 거닐다가 지나가는 오토바이에 슬쩍 받쳐 결국 숨지고 말았습니다.

완치되기도 전에 강제퇴원

저희 불쌍한 딸 래향이는 그후 계속 병상에 있었읍니다만 계속 후유증에 시달리고 휠체어에 앉아만 있어야 하기 때문에 궁둥이가 썩는 소위 욕창에 시달리고 있으며 죽어버린 제 엄마를 계속 부르면서 울부짖을 때는 제 눈에서도 피눈물이 흐르는 때가 많습니다. 그 당시 처는 병이 완치도 되지 못한 상태에서 7개월만에 강제퇴원이 되었고 딸도 치료비가 없다는 이유로 1년 2개월만에 퇴원하고 말았습니다.저는 지금 딸을 6명이나 거느리고 또 건강이 나빠 일을 못하기 때문에 생활력이 없어 의식주생활마저 해결하기 어려운 실정입니다.그래서 수차에 걸쳐 청와대와 내무부, 안기부, 전남도청 등 관계요로에 탄원을 했습니다. 우선 생활이라도 할 수 있도록 해달라고 애원해 보았으나 거의 모두가 냉담했습니다. 겨우 추석과 음력 설에 연탄과 쌀 몇 말을 보내 주는 것이 고작이었습니다.훌륭하신 여러 위원님. 지금 광주에서는 많은 사람들이 새로 출범할 6공화국마저 인정 않으려 하는 사람이 있고, 고매하신 여러 위원님들이 논의하시는 민주화합추진마저 부정적인 눈으로 보는 사람이 적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때 불구가 된 어쩌면 최대 희생자요, 5·18의 주역인 우리들 5·18의거 부상자회 1천여명의 회원들은 여러 위원님께 기대를 걸고 우리들의 대표인 박옥재회장을 이 자리에 보냈습니다.바라옵건대 광주문제의 참다운 진상을 밝히시고 그에 따른 피해자는 물론, 폭도가 아닌 우리들 광주시민의 명예를 회복시켜 주십시오. 그리고 우리들 부상자, 유가족, 구속자, 또 그로 인해 직장을 잃은 면직자들에게 합당한 보상을 하도록 강력히 추진시켜 주시기 바랍니다. 끝으로 여러 위원님들의 건승과 민주화합추진위원회의 발전을 기원합니다. 감사합니다.

‘사태수습에 최선 다했지만’

蘇俊烈 당시 계엄사광주분소장

과잉진압 인정한다

지금 이 자리에 나와 光州사태에 대한 참고인 진술을 한다는 사실에 심경이 착잡합니다. 光州사태는 발생과 확산, 수습과 사후처리로 구분할 수 있는데 본인은 수습과 사후처리를 맡았던 사람으로서 발생과 확산부분에 대해 진술을 할 수 없어 유감스럽습니다.光州사태는 5월 18일부터 22일까지가 시위의 발생과 확산과정이었는데 본인은 5월 22일 10시부터 지휘권을 행사했습니다.당시 상황은 光州시내에서 모든 군인이 철수했고 경찰의 치안기능마저 마비된 상태였으며 全南도지자와 光州시장·도경국장 등이 자리를 이탈했기 때문에 치안행정기능이 마비된 상태였습니다. 시위진압에 관여한 부대는 3개 공수여단과 1개 보병사단이었는데 당시 3공수여단은 潭陽방면의 교도소 인근에 배치됐고 7, 11공수여단은 和順방면의 소태동 근처에, 20사단은 光州비행장에 주둔하고 있었습니다.

光州사태수습명령을 받고 부임한 본인은 대화와 설득으로 탈취된 무기 5천8정을 회수하는 방법과 이것이 불가능하면 무력작전을 감행한다는 방법을 고려했습니다. 특히 본인은 대화와 설득을 통한 해결을 위해 22일 상오 10시 李홍기변호사 등 7명의 민간수습위원들과 최초로 대화를 가졌는데 이들은“시위진압방법이 과격했음을 시인”하고“군작전을 하지말라”는 등 7개 사항을 제의해 왔습니다.7개 사항 중 특히 그들은 시위진압 방법이 과격했다고 말했는데 본인도 현지에서 친지와 동료들로부터 상황을 들은 바 있어 그 부분에 대해서는 시인하곤 병력의 시내진입을 하지 않기로 찬성했습니다. 또 본인은 당시 탈취된 총기 M1·카빈·50구경중기관총·수류탄·폭약 등을 반환해 달라고 제의, 사태수습위원들은 긍정적인 반응을 보였습니다.

그러나 당시 도청의 시민시위대본부에는 강·온 양파가 갈려져 있어 이틀 동안 기다렸으나 별무소득었고 대화를 통해서는 사태를 수습하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판단했습니다. 이때 본인은 상부로부터 질책을 받기도 했는데 연고지가 光州인 부사령관으로 하여금 주변친지를 만나 총기회수문제를 설득하라고 지시했습니다.한편 시내에서는 소년원을 탈출한 수 감자들의 횡포가 심해지고 光州외곽의 소태동에 대기해 있던 공수부대를 향해 과격시위대가 돌격을 감행하는 상황이 계속됐습니다. 당시 공수부대사령관이던 鄭鎬溶 현 국방장관과 상의, 공수부대를 비행장으로 빼내고 그 자리에 20사단을 배치했습니다.이후 光州시민들의 감정이 다소 누그러졌으나 일부 과격시민들의 횡포는 가라앉지 않는 것 같았습니다. 본인은 林憲杓계엄사교육부장을 시켜 작전수행에 필요한 첩보를 수집했는데 50여명의 光州출신 예비역 장교들을 모아 시내요소에 보냈습니다. 특히 도청·사직공원·전일빌딩 등의 시위대 숫자와 활동사항, 보초교대시간 등을 약 3일간 파악했습니다.25일 崔圭夏대통령이 李禧性당시 계엄사령관 등을 대동하고 光州에 내려왔습니다. 본인은 崔대통령에게 결과를 보고한 후 무기회수 등 사태수습을 위해서는 작전이 불가피하다는 점을 설명했습니다. 崔대통령은 군작전은 상당한 피해가 예상되므로 신중을 기해야 한다며 걱정했습니다. 崔대통령은 光州시민들에게 보내는 담화를 녹음한 뒤 光州를 떠났습니다.

尹恭熙대주교의 항의

당시 시민군은 군대 못지 않아, 순찰을 돌고 보초를 서는 등 계엄군 진입에 대비하고 있어 걱정을 많이 했습니다. 그런데 시민여론을 다방과 음식점 등을 통해 수집한 결과 시민들이 계엄군이 빨리 들어 왔으면 좋겠다는 반응이어서 작전이 성공하리라고 판단할 수 있었습니다.첩보에 의하면 당시 도청에는 1백 15∼30명의 무장시민이 상주하고 있었으나 시민군은 조직적인 훈련을 안받아 대단한 저항세력이 못된다고 생각했습니다.26일 하오2시 작전회의를 소집했습니다. 공수부대원 30명의 특공조를 편성, 모두 3개 특공조로 하여금 도청·사직공원·전일빌딩을 기습하도록 작전을 세웠습니다. 또한 민원실지하 작전 전에 전투경찰출신 폭약전문가를 보내 도청민원실 지하에 있던 폭약의 뇌관을 미리 뽑았습니다.

그는 시민군 중의 일부학생과 내통, 보초를 서는 등 시민군과 함께 행동하면서 수류탄뇌관까지 뽑았습니다. 시민군의 저항강도를 측정하기 위해 양동작전을 실시하면서 공단입구 사거리를 확보했습니다.양동작전 중 전차를 활용했는데 이때 尹恭熙대주교가 전화를 걸어“왜 병력을 진입시키지 않겠다는 약속을 어기느냐”고 항의해왔습니다. 본인은“군작전이 아니고 생필품 이동을 위한 것이며 전차도 시내진입용이 아니다”라고 설득했습니다. 당시 시가진입에는 시민들의 저항이 거의 없었던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市외곽에도 군으로 봉쇄선을 형성했습니다.

‘시민들은 적이 아니니…’

당시 작전회의는 光州비행장 격납고에서 열렸는데 20사단장 朴俊炳장군도 함께 있었습니다. 1시간 만에 회의를 마치고 비밀유지를 위해“일단 작전을 무기 연기한다”고 연막을 피웠습니다. 또 특공조 조장들에게“도청에 丁時采부지사 등이 있고 시민들은 적이 아니니 단1명이라도 죽여서는 안된다. 도청 내엔 적색 분자도 있으니 반드시 생포하라”라고 말했습니다.지금도 기억나는 것은 부하장교 중 모 대위는 원래 인상이 험악해 아무래도 마음이 쓰였습니다. 몇번 타일렀으나 표정 변화가 없었습니다.‘너무 과격하면 안된다’는 생각에 그를 불러 다시 타일렀더니 빙그레 웃었습니다. 나는 그때서야 마음이 놓였습니다. 당시 지휘관으로서는 참으로 어려운 순간순간이었습니다.작전은 27일 새벽 5시에 개시했습니다. 원래 우리측 첩보와는 달리 도청에 집결된 시위군중은 3백60여명이나 되어 당황했습니다. 다행히 전일빌딩쪽의 작전이 순조롭게 끝나 그곳을 맡았던 11공수부대도 함께 투입, 5시 10분에 도청을 점거했습니다.

이 과정에서 3공수여단 특공사가 朝鮮大쪽에서 시민들에게 발각됐으나 별다른 상황은 없었습니다. 또 7공수여단소속 군인 3명이 사태수습 중 희생당했습니다. 민간인은 여자 1명이 앞정강이에 찰과상을 입었으며 도청에서 저항하던 시민군 17명이 사망했습니다.사망숫자만은 본인의 명예를 걸고 발표된 이상이 아닐 거라고 확신합니다. 또 현역군인은 M16을 갖고 있었고 시민은 M1과 카빈 등을 갖고 있었는데 사체의 탄혼을 조사한 결과 45명만이 M16총에 의해 사망한 것으로 나타났습니다.일부에서는 도청탈환 작전에 앞서 선무·설득노력을 충분히 했느냐는 의문을 제기하지만 작전개서 전에 헬기를 통해 전단 등으로 설득노력을 펼쳤습니다. 작전개시 즈음해서는 도청 옥상에 캐리버 50이 설치돼 있어 헬기조차 접근이 어려웠습니다.군인들이 영남인으로만 구성된 것은 전혀 아닙니다. 처음 광주에 들어간 공수여단은 40%가 호남사람이었습니다. 또 월간지를 보니 천차를 앞세웠다’고 기록했던데 기습이란 기도은닉이 최우선인데 어떻게 전차를 동원할 수 있느냐고 묻고 싶습니다. 많은 사람들은 왜 光州사태가 그렇게 확산됐을까 알고 싶어합니다. 그러나 본인은 수습과 사후처리만을 맡았기 때문에 그 이전의 과정은 알 수 없습니다.

‘民和委에 무엇 기대하랴’

田桂良 5·18유족회회장

시민들의 자발적인 투쟁

5·18광주의거유족회는 80년 이후 8년 동안 사랑하던 가족을 총칼로 살해당하고, 그 원한과 슬픔과 분노를 처절한 반독재 투쟁으로 발전시켜 왔다. 노태우씨가 차기정권을 획득했다고 해서 우리의 반제, 반독재 투쟁은 절대로 멈출 수 없는 것이다.오히려, 민주화무드에 편승하여 학살 원흉의 이름과 그가 저질렀던 만행을 희석시키려는 음모에 대항하여 더욱 가열찬 투쟁을 전개해 나갈 것임을 천명하는바이다. 여고생의 젖가슴을 도려내고 일가족을 학살하는 등의 천인공노할 학살 만행을 자행한 5월학살의 원흉과는 그 어떤 형태의 타협도 철저히 배제한다.5·18광주 민중항쟁이야말로 민중 스스로의 생존권과 자주권 쟁취를 위한 민중들의 자발적인 투쟁이었으며, 민주화와 민족통일로 가는 민족발전의 대전환점이었다는 점에서 지역감정이나 과거의 우발사태, 혹은 폭도들이 일으킨 폭력사태 등으로 매도될 수 없는 민족사의 한 획이었다.

그러므로 이 나라의 민주화와 민족통일은 80년 5·18광주민중항쟁정신의 실천적인 계승으로 이루어질 수 있으며, 그날 이후 살아남은 우리가 비타협적 투쟁을 통하여 반드시 쟁취해야 할 절대적 과제이다.미국의 사주에 의한 부정선거로 정권을 강탈한 후 자신의 얼굴에 묻은 핏자욱을 강탈한 후 자신의 얼굴에 묻은 핏자욱을 지우기 위해 갖은 술수를 꾀하고 있다. 민주화합 추진위원회(이하 민화위)는 이러한 차원에서 새정권의 정통성과 기반을 구축하기 위한 대표적 협작기구이다.그간 정권의 정통성 확보를 위해 기만적으로‘광주사태해결’운운해 왔으나, 우리 5·18광주의거유족회는 다음 몇가지 측면에서 볼 때,‘민화위’는 명백하게 광주학살에 대한 원천적 치유방안을 모색 할 수 없다고 보는 것이다.

첫째, 민화위는 노태우씨가 대통령이 되기 위해 구성한 기구로서 민정당의 한위원회에 불과하다는 점이다. 이러한 민화위는 결과적으로 노태우차기 정권의 정통성 구축을 위해 구성된 기구이기 때문에, 자신에게 손상이 가는 진상규명이나 해결방안은 제시할 수 없다는 한계점이 명백해지는 것이다.

둘째, 국가적 차원에서 법적 해결방안을 모색하기 보다는 선심에서 비롯된 양 선전되고 있으며, 민화위라는 기구 자체가 법적 지위나 성격을 전혀 갖지 못한 임시 자문기구에 불과하므로 설령 민화위에서 해결 방안이 모색된다 하더라도 차기정부에 모두 반영된다는 보장이 없는 것이다.

셋째, 문제의 원천적 해결은, 군에 의해서 빚어진 것이므로 국가적 차원에서 그 해결점이 모색되어야 하고, 민족자주화와 민중이 주체가 되는 민주주의를 쟁취하기 위한 5·18의 올바른 성격규정의 측면에서 볼 때 법적·제도적 보장을 받을 수 없는 민화위는 그 기능을 충분히 해낼 수 없다는 것이다.

넷째, 민화위는 관련피해 당사자들이 제외된 구성체로서 진상의 철저한 규명을 통한 원천적 문제해결의 모색이 아니라 만행을 은폐하고 항쟁정신을 희석화하려는 데 그 목적이 있다는 점이다. 자칭 유족회장이 구성원으로 끼어 있다고 하나 이 사람은 80년 이후 지금껏 관제로서 금권에 매수되어 오히려 꼭두각시 노릇을 해왔던 사람이다. 피해당사자들의 이해와 주장이 배제된 민화위의 해결방안은 오히려 더 깊은 반목을 초래할 것이다.

다섯째, 문제발생의 근원에 대한 객관적 검토과정이 너무 미흡할뿐더러 학살 만행에 대한 배경의 진상은 완전히 은폐되고 있다는 점이다.

여섯째, 미국의 개입에 대한 문제점은 아예 설정조차 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가해당사자 처벌이 전제

이러한 민화위의 계속된 협잡은 역사의 주체적인 전민중의 철퇴를 받게 될 중대한 역사적 죄악을 범하고 있다는 사실을 인식해야 할 것이다. 그날 이후 가족을 잃은 슬픔은 화목했던 가정을 파탄지경으로 몰아넣었고 그러한 원한과 고통은 곧 반독재 민주화투쟁의 선도에 서게 하는 끊임없는 힘이 되는 것이다.가해당사자들은 지난 7년 동안 자신들이 저지른 죄악상을 은폐하기 위해 학살만행을 모두 유언비어로 파묻었다. 그리고 이제는 권좌에 앉기 위해 가시적으로 돈을 가지고 해결하려는 작태를 보이고 있다.명명백백한 학살주범에게 그 잔인한 만행의 책임을 물어 퇴진하지 않는 상태의 광주 문제의 해결은 있을 수 없다. 우리는 학살만행에 대한 원천적이고 숨김없는 치유를 요구한다.

진상조사 특별위원회 구성

1. 민주화합추진위원회는 어용집단이므로 이제 더 이상 기만적인 국민우롱의 작태를 청산하고 즉각 해체되어야 한다.

2. 새 국회에서 진상조사특별법을 제정하고국회의원과 피해당사자(유족·부상자·구속자) ·재야단체대표·언론인·법조인 ·정부추천인사 및 당시 군관련 지휘관 등으로 객관적이고 공정한 진상조사특별위원회를 구성하여 그에 의해 진상규명이 선행되어야 하며, 그 결과에 따라 가해자처벌을 위한 특별재판소를 설치하여 가해자를 의법처단해야 한다.

3. 5·18광주민중항쟁 당시 폭도로 규정된 광주시민의 명예회복이 전제되어야 한다.

4. 미국의 책임은 면할 수 없다. 군작전권을 미국이 쥐고 있는 치욕적인 민족현실에 울분을 금하지 못하며, 미국의 묵인, 방조, 개입에 대한 외교적 조처를 단행해야 한다.

5. 사망자 및 부상자와 당시 무고하게 구속된 갖가지 5·18관련 피해자들에 대한 정신적, 물질적 보상과 민족차원의 보훈대상자로 예우해야 한다.이러한 우리의 정당한 요구가 관철될때까지 우리는 그 어떠한 술수에도 호응하지 않을 것이며 진상규명과 학살자 처단이 선행되지 않는 그 어떠한 해결방안에도 타협하지 않을 것임을 천명하는 바이다.

‘간첩누명에 拷問까지’

全玉珠 주부 5·18당시 가두방송원

간첩협의는 어불성설

우선 첫 번째는 제가 맨처음 연행 당시에 간첩혐으로 연행됐기 때문에 제 출생부터 얘기하는 것이 도리일 것 같습니다. 저는 전라남도 보성의 경찰서 사택에서 1949년 12월10일 태어났습니다. 결혼은 광주사태 이후 1981년 5월10일 동거를 하다가 3년 전에 결혼을 했습니다.시간이 없을 것 같아 간단하게 저희 집안에 대해 얘기하겠습니다. 왜냐하면, 아직도 일부에서는 저나 제 집안이 불순하다고 생각하지 않을까 해서입니다. 저희 아버지로 말씀드릴 것 같으면, 보성 유로면의 지서장으로 계셨습니다.아무도 가지 않으려는 곳에 저희 아버님이 자원하셔서 지서장으로 부임, 많은 공을 세우셨습니다. 면민들은 공을 인정하고 노고를 치하하기 위해 저희집까지 지어 주었습니다. 아버님은 사표를 낸 뒷 면의원에 출마하셔서 당선됐다가 3일만에 그만두셨습니다.

그런데 당시 尹致暎씨가 아버지를 다시 지서장으로 복귀시켰습니다.그래서 아버지는 다시 유로지서장으로 오셨다가 6·25 때 부산으로 후퇴, 거기에서 심한 치명상을 입었습니다. 총을 두군데나 맞으셨습니다. 그랬었지만 퇴직금까지도 가족에게 주지 않고 그것을 국가에 반납하셨습니다.그리고 80년도에 제가 광주사태로 연행됐을 때 유로면민들이 아버지 유적비를 세우기 위해 한창 일을 추진중이었습니다. 추진중에 제가 간첩이라는 누명을 쓰고 잡혀감으로써 사업이 중단된 걸로 알고 있습니다.저희 외가로 말씀드리자면, 원래 저희 할아버지 때부터 상당한 봉사운동을 해왔습니다. 지금도 대한무궁화여성중앙회 명승희씨가 제 막내이모입니다. 왜 이러한 사실을 밝히느냐 하면, 저희 외가나 저희 집은 남달리 국가관념이 뚜렷하다고 말씀을 드리고 싶었기 때문입니다.그리고, 세 번째로 제가 광주 사태에 가담했던 동기를 말씀드리겠습니다. 그 당시 저는 무궁화보국운동관계로 이모님 심부름차 서울에 왔었습니다. 5월19일 목포행 야간 새마을열차를 타고 내려가 송정리역에 도착했었습니다.송정리에 내려서 광주로 가려고 하니까 통행금지가 돼 차가 못들어 간다고 해요. 저는 현장을 목격하지 못한 상태라 억지로 가겠다고 했습니다. 집이 바로 육군통합병원 밑이라 가도 됩니다라고 얘기, 저는 자가용을 5천원에 대절해 검문소까지 왔습니다.

시민자격으로 마이크 잡은 것뿐

저는 당시 이런 말을 군경으로부터 직접 들었습니다.“아가씨가 지금 광주로 들어가게 되면 무참하게 칼로 찌르고 죽이고 하니까 들어가지 말고 이 부근 여관에서 자라”고 했습니다.솔직한 심정으로 당시 그 말이 상당히 궁금했습니다. 가장 믿고 신임해야 할 군이 왜 민간인을 찌르고 죽여야 하는가. 그래서 저는 호기심도 없지 않았고 집에도 가야 할 입장이어서 검문소에서 차를 잡아달라고 해 다시 5천원을 주고 집으로 들어갔습니다.집에 들어가니까 역시 집에서도 상당히 걱정을 하더군요. 이 난리에 어떻게 왔느냐고 해서 과정얘기를 쭉 했습니다. 그날 저는 친구와 약속이 돼 있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옷입은 그대로 시내로 들어 갔습니다. 들어가면서 보니까 광주도청 앞은 복개공사중이었습니다.거기에서는 저는 정말 눈뜨고 볼 수 없는 광경을 제 눈으로 보고 귀로 들었습니다. 군인들이 손가락 하나로 그 수많은 학생을 움직여 어디론가 싣고 갔습니다.

그러자 계엄군에 학생이 돌과 최루탄으로 맞섰습니다.저는 학생들에게 물을 떠다 주었습니다. 그 광경을 전부 다 보고 학생들로부터 얘기를 들으면서 마침내 마이크를 잡게 된 것입니다. 저는 한 사람의 시민으로서 분노를 참지 못해 광주시민의 자격으로 참가했을 뿐이지 사상적으로나 청탁에 의해 가담한 것은 절대 아닙니다.학생들은 마이크를 준비하기 위해 모금운동을 했습니다. 학생들은 5분만에 45만원을 모금했습니다. 그래서 그 돈으로 앰프를 구해왔으나 잠깐만에 최루탄에 맞아 절단나고 말았습니다.그 와중에 저는 洞에 가면 앰프가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해냈습니다. 저는 계엄군과 대치하는 학생들에게 물을 따라준 후 학생들을 데리고 학운동으로 갔습니다. 거기에서 돈 7만원을 내놓으면서 내일 아침 6시에 가게문을 열면 앰프값을 완불하겠다고 했으나 그분은 공무원이라 그런지 앰프를 선뜻 내놓지 않았습니다.그래서 7만원을 던져주고 학생들에게 앰프를 떼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저에게는 특수공갈이라는 죄명이 붙었습니다. 앰프를 가지고 그때부터 가두시위를 했습니다. 가두시위를 하는 현장으로 돌아왔을 때, 처참한 꼴은 이루 말할 수 없었습니다. 그것을 다 표현하자면 가슴이 찢어질 것 같아서 말로 다할 수가 없습니다. 위원님들도 충분히 들어 아시리라 생각하고요.

광주신역에서 처음 시체 발견

그날 저녁 11시경 버스를 타고 시내와 외곽지를 돌면서 있는 그대로 방송했습니다. 제가 맨처음 시신을 발견했던 곳은 신역이었습니다. 그때가 새벽 6시였습니다. 새벽 6시에 신역을 가니까 정말 비참했습니다. 여기에 계신 某위원님도 당시 그 시신을 보셨습니다. 제가 보여드렸으니까요.그 시신들은 전부 눈이 파헤쳐져 있었습니다. 그것을 보고 어떻게 물러설 수 있었겠어요. 아무리 여자지만…. 두려움은 없어져 버리고 어떻게 해서라도 한 사람의 목숨이라도 살려야 되겠다는 오직 한 가지 마음으로 그 시신 곁으로 다가가 남자들에게 시신을 거두라고 지시했습니다.그 시신을 리어카에 싣고 태극기를 덮어 남자들은 리어카를 끌고 저는 가두방송을 하면서 도청 앞으로 왔습니다. 그때가 오전 7시였습니다. 당시 40분 가까이 계엄군과 대치하면서 좋은 어조로 대화가 됐습니다.“우리는 당신들에게 아무런 원한이 없다. 우리 위대한 시민들을 왜 당신들은 무참하게 죽이느냐. 이 점을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물으니까 당시 육군중령이 자신도 표현을 못하겠다. 우리가 어떻게 해줬으면 좋겠느냐고 물었습니다. 우리쪽에서 우왕좌왕하는 모습을 보이던 중에 저는 계엄군 앞의 차위에 올라 서서 지시했습니다.“일단 저분들도 명령을 따랐을 뿐이니 저들에게 돌을 던질 필요가 없다. 협상을 하자”고 했습니다. 그래서 다섯명씩 어깨동무를 하고 금남로에 쭉 앉았습니다. 그리고는 계엄군 앞에 시신들을 모셔놓고 협상에들어갔습니다.

중령이 요구사항을 물었습니다. 그래서 저는“지금 시민들이 불안해 하고 있고 시신들의 눈이 다 파헤쳐져 있으며 심지어는 학생을 태워준 택시기사가 그 자리에서 죽음을 당했다. 그러니 계엄사령관을 만나게 해달라”고 했습니다. 그랬더니 그 중령은“총사령관을 만나려면 우선 도지사를 뵈어야 하니까 도청으로 가자”고 했습니다.그래서 김범태학생과 남자 한 분, 그리고 제가 시민대표로 중령과 대위 한 사람과 함께 도청으로 들어갔습니다. 도청으로 들어가 당시 張형태도지사의 모친상 관계로 약 30분을 기다렸다가 張지사를 만났습니다.

도지사와의 면담

주소와 이름을 대고 찾아온 이유를 얘기했습니다. 지금 시민들이 불안해 하고 있으니까 계엄군들이 시민들의 눈에 띄지 않는 곳으로 후퇴하고 현재 잡혀간 학생과 시민들의 소재와 사상자 수를 정식으로 보도해 달라고 했습니다.그랬더니 張지사는 계엄사령관의 소재파악이 안되니 좀 기다려 달라, 자신도(계엄군 투입시는 사전에 도지사에게 보고하게 돼 있는데 보고 한마디 없이 계엄군을 투입했기 때문에)분노를 느끼고 있다고 했습니다.그러면, 우리가 사령관을 만나 전체적인 얘기를 할테니 몇시까지 해 주겠느냐고 물었더니 12시까지 만나게 해주겠다고 하더군요. 저는 마지막으로“제가 그냥 나가게 되면 시민들이 다시 분산돼 소란해질테니 張지사께서 직접 나가 시민들을 자중시켜 주고 사과의 말씀을 해 주십시오”라고 건의했습니다.먼저 시민들에게 나가 자중을 하게 하면 5분후에 나오겠다고 했습니다. 저는 다시 시민들 앞에 나와 묵념을 하고 노래를 서너번 했으나 그 분은 나오지 않았습니다. 그 분은 끝내 우리를 배신한 것입니다. 30분 정도 지나니까 시민들이 저에게“당신이 들어가서 아까운 시간만 낭비했다”고 질책을 했습니다.

이런 와중에 어깨동무를 한 사이로 어떤 분이 오셔서 만세를 부르시고“광주시민 여러분 내 말좀 들어보십시오. 나는 광주시장입니다”라고 몇말씀 하셨습니다. 그분 참 고생 많이 하셨습니다. 도지사가 해야 할 일을 시장님이 하셨습니다.그러고 있는데 앞에서 갑자기 장갑차가 밀고 들어왔습니다. 저는 피할 길이 없었습니다. 시장님과 어깨동무를 하고 있었는데 시장님은 어디로 피했는지 기억을 못합니다. 저는 최루탄에 맞아 쓰러졌습니다. 호흡을 못하고 물을 달라고 하니까 계엄군들은 모두 저를 포위하고 총으로 저를 조준한 채 묵묵부답이었습니다. 저는 겁에 질린 상태에서도 맵고 숨을 쉴 수가 없어 계속 물만 요구했습니다.저는 계엄군들에게“내가 무엇을 잘못했기 때문에 총을 들이대는가. 돌멩이 하나도 못던지는 것이 죄가 돼서 이러느냐. 유언비어를 살포했는가”하고 퍼부어댔습니다.

계란 두 개로 이틀만에 요기

그때 중령이 나타나 마이크를 주워다주면서“지금 광주 전시민이 당신말은 들어도 우리말은 듣지 않는다”며 수습을 해 달라고 부탁했습니다. 저는 마이크를 잡고 중앙우체국 앞을 지나 인동쪽으로 갔습니다.인동쪽에서 시민들은 전부 합세했습니다. 누군가가 차를 가지고 와서 저를 태우고 생계란 두 개를 깨 저에게 주었습니다. 저는 이틀만에 처음으로 요기를 했습니다. 그후 저는 다시 가두방송을 시작했습니다. 그때그때 상황에 따라 메모가 들어오는 대로 방송을 했습니다.이 앞에 질문에 보면, 왜 광주사태 때 교도소를 탈취하려 했느냐는 말이 있는데 당시 광주시민들은 절대로 교도소를 탈취하려 하지 않았습니다. 이것은 하늘을 두고 맹세합니다. 최근에 와서 느낀 바로는 그것이 계엄군의 작전이었던 것같습니다.보고가 들어오는 것을 보면 처음에는 담양쪽에 연·고대생이 서울에서 내려와 계엄군의 제지를 받고 있다고 해 그쪽으로 가보면 없고 다음에는 송정리, 목포쪽에서 온다는 소문이 계속 나돌았습니다.

우리를 흩어지게 하기 위한 계엄군의 술책이었던 것같습니다. 우리 중에 광주교도소를 탈취하려 했던 사람은 하나도 없었고, 강간·절도 등도 절대로 없었습니다.일부에서 여학생들의 유방을 도려냈다고 하는 말은 약간의 과장은 있으나 진짜 있었던 일입니다. 당시 광주시민들은 협조를 잘해 주었습니다. 어떤 식으로 사람을 때렸는지 얼굴을 알아볼 수 없는 시신들은 거둬서 그때그때 병원으로 운반했습니다. 당시 시신들에 대한 얘기는 이 자리에서 하지 않겠습니다. 그 얘기를 하면 제 가슴이 떨리고 눈물이 쏟아질 것 같기 때문입니다.

말 잘하니까 간첩

5월20일 오전 도청 앞에서 시민들과 계엄군의 대치상황에서, 21일 12시를 기해 발포명령이 내려진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총소리가 났지만 그 당시 시민들과 계엄군이 부딪쳐 총으로 싸운 적은 없었습니다. 시신을 발견하기 위해 계속 서서 방송했습니다.21일은 석가모니탄신일이었습니다. 그 의미깊은 날에 발포했다는 사실은 감히 상상할 수 없는 일이라 생각합니다 .5월21일 오후 제가 가두방송을 하고 돌아오니까 일반시민들이 총을 갖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상당히 불안을 느꼈습니다. 그러나 금방 이해가 됐습니다. 가장 믿고 신임하는 군인이 무참히 총칼을 휘두르는데 우리는 계속 각목만 갖고 대치할 수 없지 않겠습니다. 자신의 생명과 가족을 보호하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는 상황이었다고 봅니다.5월 22, 23일 계속 가두방송을 하면서 기물을 파괴하지 말고 주위에 불순분자가 있거나 방화하는 자가 있으면 언제든지 방송차량으로 연락해 달라고 했습니다. 이것을 광주시민들은 모두 기억하고 있을 겁니다.5월26일 새벽 5시 계엄군이 들어오고 있을 때도 저는 광주시민들에게“우리는 민주적으로 그들과 싸워 그들을 후퇴시킵시다. 잠에서 일어나 가족과 시민들을 보호합시다”하고 방송했습니다. 시신을 싣고 적십자병원에 옮기고 오던 도중 도청 앞 군중 속에서 어떤 사람이 갑자기“저 여자는 간첩”이라고 소리쳤습니다.

간첩이 아니면 저렇게 말을 잘 할 수가 있느냐는 것이었습니다. 광주시민들은 순식간에 저를 잡으려고 혈안이 됐습니다.저는 너무 어처구니가 없었습니다. 먹지도 자지도 못하고 광주시민을 위해 최선을 다했는데 왜 나를 간첩이라고 하는가, 사상적인 얘기나 유언비어방송을 한적도 없는데….순간 저는 이것이 계엄군의 함정이라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저를 간첩으로 몰아세운 사람은 계엄수사당국의 수사관이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간첩이라는 누명을 쓰고 잡혔습니다. 도청으로 잡혀 가니까 군인들이 양쪽에서 총을 들이대고 있었습니다.그런 상태에서 강수사관이라는 사람이 군화발로 제 무릎을 짓이기면서 자술서를 쓰라고 하였습니다. 당시에는 겁에 질려서 아픈 것도 몰랐습니다. 어떤 식으로도 간첩이라는 누명을 벗어야겠다는 일념으로 고문을 견뎌냈습니다.

새벽 2시까지 곤봉으로 때리고 총으로 위협했습니다. 2시에 육군통합병원 정신병자수용소로 갔습니다. 가니까 올케언니가 태어난지 백일도 안 된 핏덩어리를 안고 거기에 갇혀 있었습니다. 올케는“고모가 진짜 간첩으로 오인됐다면 자수 해서 용서를 빕시다”고 했습니다. 할 말이 없었습니다. 저는 거기서부터 묵비권을 행사했습니다.9시에 나오라고 해서 나가니까 다시 저술서를 쓰라고 했습니다. 똑같은 자술서를 쓰고 나니까 외신기자들이 와서 사진을 찍었습니다.“저는 간첩이 아닙니다. 제 아버지는 보성군에 가면 모르시는 분이 없습니다.”그렇게 외쳐댔지만 들어주는 사람은 없었고 오히려 조용히 하라고 개머리판으로 제 머리를 때렸습니다.

배 판 돈이 공작금으로 오인돼

그후 어떤 버스가 와서 저를 싣고 고개도 못들게 한 상태에서 총을 들이대고 상무대로 인계했습니다. 그날부터 장장 10일간 고문을 당했습니다.잠도 재워주지 않고 백열등 밑에 두고는 고문을 했습니다. 제 얼굴이 지금도 푸르면서 윤곽이 고문 전과는 판이하게 바뀌어버렸습니다. 당시 저를 봤던 분들이 지금 보신다면 몰라볼 것입니다.잠을 5분 이상 재워주지 않았습니다. 옆방에서 들리는 학생들의 고문소리를 들려주면서 저것이 네 오빠라고 할 때 피가 마르는 기분이었습니다. 송곳으로 찌르면서“네 아버지는 충신인데 너는 역적이 돼서야 되는가”“모란봉에서 교육을 얼마나 받았느나”등으로사람을 괴롭혔습니다.그리고 저희집에서 공작금이라고 돈을 압수해 와서는 이 공작금은 이북에서 얼마를 가져다가 쓰고 남은 돈이냐고 윽박 지르기도 했습니다. 나는 무슨 돈인지 몰라 답변을 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후에 안 일인데 그 돈은 저희 집에서 당시 배를 판 것이었습니다.제가 알기로는 金大中씨도 광주사태와는 무관한 분이라고 생각합니다. 공작금이라고 몰아붙이다가 계속 아니라고 하니까 3일후에는 金大中씨집으로 가져가 이돈은 광주사태를 일으키고 남은 돈이 아니냐고 했답니다.

또한, 핸드백에 들어 있던 열쇠고리를 가져와 화약냄새가 난다고 하고 독침이라고 얘기하기도 했습니다. 하도 어처구니가 없어서 가까운 백화점에 가 확인해보라고 했더니 “요년 쏴 죽여 버리겠다”“요년 면도 칼로 발기발기 찢어죽여 버려야 된다”는 등 욕설도 거침없이 했습니다. 고문은 이루 말할 수가 없었습니다. 4일 후부터는 간첩누명을 벗기고 金大中.씨한테로 몰아붙였습니다. 金大中씨 석방운동을 벌였느냐고 묻길래“내가 보기엔 金大中씨가 죄없이 투옥된 것 같아서 그랬다”고 하니까“요년이 아직도 입이 살아있다고”고 하면서 야구방망이로 제 허리를 때려 저는 의자에서 떨어지면서 팔이 부러져 버렸습니다. 순식간에 팔이 부어올라 일어날 수가 없었습니다.

구타와 욕설

자기들도 인간이었는지 그 팔을 보고는 자술서를 쓰란 얘기를 안해 팔이 부러진 게 오히려 다행이라는 생각도 했습니다. 10일간 잠재우지 않고 송곳으로 찌르고 군화발로 짓누르고 개머리판으로 쑤시고 야구방망이로 때릴 때는 살고 싶다는 생각보다 차라리 고통을 잊도록 죽여줬으면 하는 바램뿐이었습니다.조서를 쓴지 6일째 되는 날 저는 배가 아파 화장실을 가겠다고 했습니다. 제가 빨갱이나 살인마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남자들이 총을 들이댄 채 풀밭으로 데리고 가 그들이 보는 아래서 대변을 보게 했습니다. 대변도 나오지 않대요. 다시 고문실로 들어가서는 곤봉으로 얼굴을 때리면서 고문을 시작했습니다.나는 이를 벗어나기 위해 언제 어디서 어떤 남자친구를 만나 커피를 먹고 몇월 몇일에는 친구를 만나 놀러갔다고 얘기를 하니까 나보고 X갈보라고 했습니다.너는 도대체 서방이 몇이나 되느냐고 하면서 유방검사까지 했습니다. 저는 그런 것은 조금도 귀담아 듣지 않았습니다. 갈보라고 해도 남이 알고 아니라고 해도 남이 알기 때문에 간첩의 누명만은 벗어야 되겠다는 일념으로 10일간의 고문을 견딘 것 같습니다.

그후 光山暑로 넘어갔습니다. 光山暑에서는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못하도록 옷을 싹 벗겼습니다. 혹시 안에 독침이 감춰져 있을지도 모르니까 옷을 다 벗으라고 하대요. 다 벗고 나니까 담요에다 둘둘 말아 유치장에 가두었습니다.그 안에서 저는 3일 동안 잠을 잤습니다. 그후 1년반 동안 하혈을 계속했습니다만 그 사람들은 병원으로 후송시켜 주지 않았습니다. 한달이 조금 지난 어느날, 강수사관이 느닷없이 찾아와 MBC와 기독교방송국 방화범이 저라고 했습니다. 당시 꼬마들을 꼬여 허위진술을 받아낸 모양입니다.

사면조치로 석방

또, 당시 가두방송 때 나를 도와줬던 ■■■과 이간질을 시키기 위해 그쪽에 가서는“네가 불질렀다고 하더라”제게 와서는“네가 불질렀다고 하더라”고 했습니다.두달이 넘도록 병원엘 가지 못하다가 어떤 경찰관의 호의로 양민의원에 갈 수 있었습니다. 저희 어머니는 당시의 충격으로 돌아가셨습니다. 치료비는 당연히 그 사람들이 주어야 도리일텐데 저희집에 연락해서 치료비를 가져오라고 했습니다. 딸의 얼굴도 보지 못한 채 저희 어머니는 15일간 병원비를 계산했습니다. 15일을 치료해도 하혈이 그치질 않으니까 육군통합병원으로 후송을 시키더군요. 그러나, 하혈은 낫지 않고 이미 팔은 굳어 버렸습니다.

그러던 중 저는 육군통합병원에서 검사의 조사를 받았습니다. 검사는 첫날 책으로 머리를 때리더군요. 저는 더 이상 못맞겠다고 검사를 밀었습니다.당시 옆에서 타이프를 치던 육군하사가 저를 살렸습니다. 그 하사가“저도 이분 방송을 들었는데 나쁜 말은 안했습니다”고 얘기해 줬습니다. 그래서 내란음모죄와 방화죄 등 두가지의 누명은 벗었습니다.그래서, 포고령위반·소요사태 등등의 죄목으로 9월15일 15년刑을 받고 김성룡 신부와 일부 교수들과 함께 광주교도소로 넘어갔습니다. 광주교도소에 넘어가서도 하혈을 계속했습니다. 당시 저는 독방에 있었는데 앉기조차 불편했는데도 교도관들은 높은 사람이 방문하면 괜찮다고 대답해 약치료밖에 못받았습니다.81년 4월3일 저는 사면조치로 풀려난 58명 중 여자로서는 유일하게 석방됐습니다. 석방이 된 후 지금까지의 생활은 이루 말할 수가 없습니다. 당시의 비참했던 상황을 이야기하려면 몇시간이 걸립니다.제가 마지막으로 위원님들께 드리고 싶은 말은 우리는 절대로 광주교도소를 탈취하려 하지 않았으며 시민과 계엄군이 맞대결을 벌인 적도 없다는 것입니다. 제가 앞장서서 옮긴 시신만도 30구가 넘습니다.

지난 대통령선거 때도 폭행당해

81년 4월3일 석방된 후 지금까지도 저는 제재를 당하는 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이번 선거 때도 저는 집앞에서 3인에게 폭행을 당했습니다. 지금도 자국이 남아 있어요.“입으로 망한 년이 입으로 또 망하고 싶어서 까부느냐”고 하면서 저를 폭행했습니다.저는 누구의 선거운동도 하지 않았습니다. 저는 당시 한사람의 시민으로서 내 눈으로 보고 내 귀로 들으면서 울분을 참지 못해 광주사태에 가담했을 뿐이지 어떤 정치세력이나 개인적인 욕망을 위해 뛰어든 게 아닙니다. 그런데 어떤 의미에서 저를 계속 폭행하는지 모르겠습니다.그날은 金大中.선생이 보라매공원에서 연설한 날입니다. 12시 30분 집 앞에서 무참히 짓밟혔습니다. 그래서 아직도 허리를 쓰지 못하고 있습니다.그리고 현재 사면조치로 모든 것이 복권된 것으로 알고 있는데 지금도 왜 경찰이 나를 괴롭히는지… 나는 주위사람들에게 광주사태에 대해서는 이야기를 안하고 삽니다.

그런데도 집단폭행을 당하고 있으니 여러 위원님들께서는 저의 신변을 보호해 주셨으면 합니다.제가 마지막으로 위원님들께 건의사항을 말씀드리겠습니다.첫째, 민정당의원 및 광주의 기관장들이 이 뼈아픈 광경을 보고도 정책적으로 저지해 왔음을 시민과 나는 참으로 슬프게 생각합니다. 우리의 항거의식을 폭도라 매도하지 마시고 명예를 회복시켜 줄 것과 제6공화국 대통령께서도 우리의 증언만 들을 게 아니라 제5공화국 주도 세력과 협의해 민주발전을 기해 주시기 바랍니다.그리고 5월21일 석가모니 탄생의 날에 발포명령을 내린 데 대해 분명히 광주시민에게 사죄를 하는 것이 인간의 도리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같은 동족끼리 이는 있을 수 없는 일로 유감스럽게 생각합니다.저는 여성으로서 영원한 불구가 되었습니다. 제 두 사내아이의 장래를 위해 제 아이에 관한 이야기는 못하겠습니다. 광주시민은 민화위위원들을 하늘처럼 믿고 있습니다. 이 분들이 이 자리에서 진정 어떤 것을 밝혀 주리라 믿습니다.또한 입원해 있을 때 전부일장군께서 눈물을 흘리며 위로를 해 주었습니다. 그분께서는 상당히 고생을 하셨고 지금 밝힐 수는 없습니다만 모여교수님께서 광주에 오셔서 일을 해결해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위원님들께서는 부디 진실을 밝혀주십시오. 우리들의 의거에 대한 진상을 알게되면 땅도 울고 하늘도 울 것이라 생각됩니다.

다음을 노태우 차기 대통령께 꼭 보고해 주시기 바랍니다.먼저 민주의거의 날로 정해주시고 시민의 명예회복과 우리의 협의회에서 건의서가 제출되면 검토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저는 이 모두가 진실로 보고되어 그 분이 진심으로 받아들여 양심에 따라 해결해 주시리라 믿습니다.민화위 위원들께서는 조금의 가감도 없이 보고하셔서 명예회복이 되도록 해주십시오. 우리는 우리를 지키기 위해 총을 들었을 뿐입니다.끝으로 朴炳權장군께 건의드리고 싶은 것은 지역발전을 위해 기여해주셨으면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위원님들께서 자료가 필요하시다면 서면으로 제출하겠습니다. 그동안의 증언과 자료를 통해 진실을 밝혀주시기 바랍니다.

입체특집/光州사태를 再審한다·5·18 光州사태 계엄군 手記

‘다같은 피해자, 참회의 마음을’

광주사태에 투입된 어느 계엄군의 고백

金永哲(가명 5·18당시 광주투입 계엄군)

민족사의 불행한 사건

나는 그 동안 여러 사람들로부터 光州사태에 관한 이야기를 하라는 요구를 받곤했다. 그러나 이 문제에 대해 나는 침묵만 지켜왔다. 그 이유는 지나간 하나의 불행한 사건을 다시 이야기한다는 자체가 마음에 들지 않았고, 지금 생각해도 악몽과 같았던 10여일 간을 다시는 기억하고 싶지 않다는 생각에서였다. 뿐만 아니라 이런 부끄러운 과거를 나의 기억에 지워버리겠다는 것도 내가 입을 열지 않는 이유였다.그리고 내가 광주사태 당시 계엄군 ―그것도 공수부대 요원으로 현장에 투입되었던 사실을 아는 사람들의 나에 대한 눈초리 또한 몹시 따가왔다. 그들은 당시의 상황이 어떠했으며, 이런 유언비어들이 나돌고 있는데 그 진실은 어떤 것인가 하는 등 많은 질문을 던졌다. 그때마다“나는 잘 모르겠다”혹은“나는 내가 실지로 본 장면밖에는 이야기할 수 없다”는 식으로 그들의 대화에 응하지 않고 지금까지 살아왔다.

그러던 중 지난 대통령 선거 과정에서 광주사태에 관한 여러 이야기들이 공개적으로 거론되기 시작했고, 그 이후 정부·여당에서도 이 문제의 해결에 적극적인 자세를 나타내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내가 보기에는 지금까지 이야기된 내용들 전부가 거짓은 아니나 몇몇 부분 나로서는 긍정할 수 없는 점이 있는 것 또한 사실이다. 그래서『月刊京鄕』의 요청도 있고 해서 그동안 이야기하지 않았던 광주사태에 대한 나의 체험을 솔직하게 기록, 당시 光州에 투입된 계엄군 병사의 심경을 밝히려 하는 것이다.여기서 내가 광주사태에 대해 증언 하는 데에는 몇가지 한계가 있음도 미리 밝혀두고자 한다.

첫째는 내가 지휘관이 아닌 관계로 전체의 상황을 볼 수 없는 한계성을 지녔다는 것이다. 따라서 단지 내 눈으로 본 상황을 중심으로 이야기를 전개해 나갈 수밖에 없다. 때문에 지금 논란이 빚어지고 있는 핵심문제의 하나인 사망자 숫자가 얼마나 되는가 하는 문제 등에는 나도 확실한 것을 모르는 입장이라는 것을 이해해 주길 바란다.

둘째는 광주사태를 이야기하면서 광주시민들의 과격한 행동은 전혀 문제 삼지 않고, 계엄군만 잘못되었다는 주장에 대해서는 아직도 나는 완전하게 동의하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가 잘 했다는 것은 결코 아니지만, 시위대의 행동이 계엄군을 자극한 것도 사실이다. 더구나 당시 하사관의 신분으로서 사실 광주의 유혈사태 현장에서 비극을 경험한 뒤 그것을 잊지 못하고 죄책감으로 괴로워 해 온 나도 역사의 피해자 중 하나라고 생각한다. 삶과 죽음이 격렬하게 교차하는 상황에 처해진 우리는 상부의 지시와 스스로가 살기 위해―그 과정에 이른 원인행위가 어디에 있다 하더라도―취할 수 있는 최소의 자위권을 발동하지 않을 수 없었다. 물론 지휘관 또는 그 이상 책임 있는 직책에 있었던 관계자의 책임문제는 별도로하고 그들의 명령에 따라 움직였던 계엄군 병사들에게까지도 같이 매도하는 태도는 잘못된 것이라 생각한다. 지금도 이야기되고 있는 것이지만, 광주시민들에게 인간으로서는 할 수 없는 짐승과 같은 행동을 한 계엄군 또는 광주사태 진압을 위한 계엄군은 경상도군인이어서 무자비하게 학살했다는 이야기, 그리고 여기에서 한걸음 더 나아가 광주사태 진압 공수부대원을 <살인마>라고 하는 등의 이야기는 나를 몹시 우울하게 한다. 물론 그 과정에서 우리가 취한 행동에 과격하고 잘못된 점이 있었던 것은 뒤에 상세하게 밝히겠지만 어쩔 수 없는 행동이었음도 분명히 밝히고 싶다.

곤봉 지급받아 훈련

나는 지난 1973년 군에 입대한 이후 1980년 7월 전역할 때까지 줄곧 공수부대에서 고된 훈련을 받아 온 전형적인 공수부대원이었다. 사회에서는 우리 공수부대원에 대해 인식이 좋지 않다는 것을 나는 잘 알고 있다. 휴가를 나간 우리 부대원들 중의 일부가 사회에서 사고를 내는 일이 종종 있어 공수부대요원은 사고뭉치라는 이야기도 자주 듣는다.그러나 나는 여기에 대해서 할 말이 있다. 문제는 우리 대원들의 특이한 복장이 남의 눈에 잘 띄기 때문에 그런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가져본다.물론 고된 훈련 후의 해방감에서 사고를 내는 경우도 있고, 젊은 혈기 때문에 거친 행동을 하는 경우도 간혹 있기는 하지만, 그러한 이미지를 전체부대원에게 덮어씌우는 것은 좀 문제가 있다고 본다. 우리에 대한 일반사회의 나쁜 인식은 광주사태를 진압하고부터 더욱 악화되어 이제는 잔인한 부대의 대명사로 낙인 찍혀버린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

10·26과 12·12를 겪는 동안 군내부도 어김없이 동요의 빛이 역력했다. 나의 기억으로는 당시 전국의 대학에 휴고령이 내리고 통금시간이 단축되어 사회 구석구석에 긴장감이 나도는 것 같았다. 나도 계엄군으로 서울시내 모大學에 진주, 학교 경비를 맡고 있었다.물론 우리의 일상생활은 훈련의 연속이었고, 직업군인인 나는 이를 업으로 받아들이면서 다소 불만이 있더라도 강도 높은 훈련을 묵묵히 받아 왔다. 이 당시 우리는 다른 때보다도 엄청난 양의 정훈교육을 받아왔으며, 학생들과 일부 정치인들의 무분별한 발언 등에 대해 나쁜 감정을 가지고 있었다.우리는 가족이 있으면서도 집에 가지도 못하고 고생하고 있는 반면에 학생들은 아무 실정도 모르고 자기네들 하고 싶은 대로 하고 있었다. 우리들은 대학을 나오지도 못했고, 사회의 그늘에서 어렵게 생활하고 있는데, 그들은 편하니까 우리를 이렇게 괴롭힌다는 것이 당시 우리들의 일반적인 생각이었다. 여기에다 계엄하 군인들의 행동 규범은 엄격해야만 했다. 여기에서 사병들 간에는 많은 불평들이 터져나왔다.이런 상태에 또 과외 훈련이라는 강도 높은 데모진압훈련을 받아 모든 장병들의 불만이 고조되고 있었다. 이런 상황하에서 우리는 광주 학생들의 데모가 심각하다는 이야기를 듣게 되었고, 우리의 과외 훈련은 이들의 데모 진압을 위한 것임을 알게 되었다. 이때 우리에게는 단단한 곤봉이 주어졌고 완전무장한 가운데 훈련을 받게 되었다.

장갑차를 따라 데모현장으로…

상부로부터 광주에서 발생한 데모가 경찰의 능력으로는 진압하기가 어렵게 되어 우리가 광주로 이동하게 될 것이라는 이야기를 들은 것은 1980년 5월17일 오후인 것으로 기억된다. 이날 오후 늦게 선발대는 서울 근교의○○공군 기지에서 헬기로 광주로 공수되고 내가 소속된 부대는 청량리역에서 대기중인 열차편으로 광주로 출발 밤중에 도착, 역 광장에 대기중이던 군용 트럭에 올라 조선대학교 운동장에서 이미 준비된 텐트를 배정받고 잠시나마 새우잠을 자게 되었다. 이때부터 우리는 광주에서 전쟁 아닌 전쟁을 치루게 된다. 어떤 측면에서 본다면 인간이 인간 아닌 행동을 한 대표적 케이스가 될 <전쟁>을 치루게 된 것이다.우리에게는 일반사회에서와 같은 정신적인 해이감이란 있을 수 없다. 오랜 훈련과 기차여행에서 오는 피로감도 느낄 겨를 없이 평상시와 같이 6시에 기상하여 아침 식사를 한 후 시위진압 용구와 자위 용구를 받아 단독군장을 하고 평상시와 같은 일과를 시작했다. 이때까지만 해도 우리는 그것이 평상시 일과의 연속으로 생각했다.

그렇지만 곧 우리는 광주에 벌써 다른 공수여단도 투입되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고, 이들로부터 지금까지의 상황을 들을 수가 있었다. 시위 규모와 특성, 그들의 주장 등에 대해 조금은 알 수가 있었다. 이때 나는 지금까지 말로만 들어오던 시위의 현장을 직접 볼 수 있게 되리라고 짐작하면서 시위대의 행동이 과격하니 조심하라는 이야기도 들었다.5월18일, 우리는 조선대학교 운동장에 대기중인 트럭에 분승하였고, 앞장선 장갑차를 따라 출발 하였다. 출발한 후 20여분 지났을 때 지휘관으로부터 전투태세에 돌입하게 될테니 지급된 자위용구로 몸을 보호하라는 지시가 하달되었다. 나는 이 지시가 이제 실전배치를 의미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우리가 탑승한 차량은 속력을 내어 다시 어디론가 달렸다. 거기에는 이미 최루탄 가스로 눈물이 날 지경이었고, 길거리에는 돌멩이가 어지럽게 널려 있었다.도착 즉시 우리는 지휘관의 명령으로 도망가는 젊은이들을 추격하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나는 일면 허탈감을 느꼈다. 데모를 진압하러 광주까지 왔는데 실지현장에 오니 데모 군중들이 던진 돌과 진압군이 쏜 최루탄 냄새만 맡게 되었으니 싱겁다는 생각도 들었다. 어디선가 돌이 날아와 나의 머리에 떨어질까봐 이리저리 돌아보았다. 오랜 군생활을 통하여 담력이 세다고 자부하고 있었는데, 비오듯 하는 돌세례에는 놀란 토끼처럼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인근에 포진한 부하들이 여러쪽에서 날아오는 돌에 팔다리를 맞아 아파하는 몸짓이 나의 눈에 들어왔다.

전투아닌 전투가 시작되다

이때“젊은 놈은 잡아서 죽도록 패 주라”는 지휘관의 말이 우리들의 귀에 들려 왔다.‘와!’하는 소리와 함께 우리들은 골목길로, 인근의 다방으로, 구멍가게로, 이발소로 가정집으로 이를 잡듯이 수색을 시작했다. 이제 전투 아닌 전투가 시작된 것이다. 눈에는 눈물이 고이고 코가 간질간질 하면서 재채기도 나오는데 돌멩이 세례를 받았으니까 우리의 행동은 잔인해지기 시작했다. 도망가는 학생을 잡아 군화발로 차고, 넘어지면 진압봉으로 구타했으니 어지간히 건장한 체구라도 견딜 재간이 없었을 것이다.동료들에게 잡힌 남녀 대학생들은 군화발로 밟힌 상태에서 진압봉으로 두들겨 맞아 선혈이 흐르고 있었으며,“살려달라”고 아우성치고 있었다.“데모는 왜 해!”하는 다른 동료의 말과“살려달라”는 외침만 하는 상황의 연속에서 나는 그에게“일단 연행하라”고 지시하고 인근의 다른 곳을 수색하기 시작하였다. 도망가다 잡힌 학생차림의 젊은 사람, 인근의 다방에서 연행된 사람, 나이 지긋한 중년 등등 순식간에 40∼50여명이 집단으로 연행되었고 그들은 그들의 갖가지 사정이나 시위와는 무관함을 호소하고 있었다.

그러나 우리들에게는 그런 호소가 통하지 않았다. 전부 구타당하고 상처를 입은 사람들이었지만, 우리는 개의치 않았다. 이때 동료 중의 한 사람이 부상당해 다른 동료의 부축을 받으면서 수송용 트럭쪽으로 왔다. 나는“왜 부상을 당하게 되었느냐”고 물었다. 부상당한 동료가 개인 행동을 하다 시위 학생들에게 구타당한 것이라 했다. 이때 나나 나의 동료들은 우리의 행동에 대해서는 생각하지도 않고 연행되어 온 그들에게 분풀이를 하는 등 우리의 행동은 거칠게 확대되어 갔다. 여기서 일부는 실신하는 사람도 생기기 시작했다. 온몸이 피두성인 채로 넘어진 청년을 꾀병이라고 하면서 군화발로 밟은 것이 실책이었던 것이다. 붙들린 사람들을 밧줄로 손목을 묶어서 조선대학교로 보내고, 우리는 다시 인근 지역에서 수색작업을 계속했다. 일부 동료들은 건물을 훼손하고 연행할만한 사람을 발견하지 못하면 다른 곳에서 분풀이를 하기도 했다. 이때 우리의 행동은 정상이 아니었다고 생각한다. 지휘관의 명령에 따라 차량으로 다시 조선대학교 운동장으로 철수, 점심 식사를 끝내고 다시 광주의 번화가로 나섰다. 현장에 우리가 도착했을 때는 시위 군중들이 벌써 철수를 하고 있는 중이었다.우리는 대오를 정리하고 경계근무로 들어갔다. 조금 뒤 철수하던 시위 군중들이 돌과 화염병 등을 던지면서 우리쪽으로 접근하다가 다시 흩어지는 등 우리를 괴롭혔다. 그래도 우리들은 움직이지 않고 그 자리에서 그대로 버텨 서 있었다. 동료들 중에는 부상자가 생기기도 했다. 상당히 오랜 시간이라고 기억이 되는데 군중들이 슬금슬금 우리에게로 가까이 접근해 오는 것 같았다. 이때 지휘관이“잡아라”면서 진격을 명령하였다.

격렬해 지는 시위

우리는 시위대를 향하여 달릴 수 있는 최대의 속도로 뒤쫓아갔다. 그리고는 우리의 손에 쥐어진 진압봉으로 뒤통수를 갈기고 쓰러진 군중을 발로 밟고, 그들이 도망갈 수 없게 혁대나 묶을 수 있는 도구를 가지고 손목을 묶은 뒤 옷을 벗겨 연행하였다. 연행자가 20∼30여명이 되면 차량에 태워서 부대로 연행하였다. 이 과정에서 우리는 이들 때문에 고생을 하고 있다는 생각도 들고 해서 심하게 다루었다.

그러나 우리의 이러한 데모 진압에도 불구하고 시위군중은 더 많아지는 등 확대에 확대를 거듭해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