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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라인 자료실

작성일2007-05-30

[월간지 관련기사] 일인(日人)사진기자의 현장 목격기.風間公一(신동아, 1985. 7)

본문

日人사진기자의 現場목격기

風 間 公 一 (報道寫眞家)

1949년에 태어나 보도사진가(프리랜서)로 활동하고 있는 일본인 風間公一은 광주사태를 사진 취재하기 위해 현지에 내려갔다. 그는 광주에 도착 후, 5월 20일 오후 7시경부터 군대·경찰기동대와 시민과의 대치, 다음날의 총격을 목도하고, 일단 서울로 탈출한 후, 다시 광주로 내려와 진압군에 의해 진압되기까지의 과정을 담담한 필치로 묘사하고 있다. ―편집자주

어둠과 함께 사태 돌변해

5월 20일(화)

서울에서부터 만원이 되어 출발한 야간열차가 광주역에 도착한 시각은 새벽 5시 15분. 역두에는 찬 비가 내리고 있었고, 약 2백명을 헤아리는 공정부대 군인들이 비를 피해서 역 구내에 무리지어 있었다. 새벽의 한기와 공복 때문에 나는 어금니가 덜덜 떨려오는 것을 어쩔 수 없었다. 그러나 역전 광장에는 30대 가량의 택시가 줄지어 서 있었고, 운전사들은 목청껏 손님을 불러대고 있었다. 보기에는 생활감이 그대로 넘쳐 있는 듯이 보였다. 거의 타버린 대형 트럭의 잔해위에 절반 가량 타다가 남은 택시가 겹쳐지듯이 실려있는 모습에서 복구작업의 흔적이 엿보였다. 이틀간에 걸쳐서 치열하게 벌어졌던 군과 데모대간의 실랑이는 이제 종결의 방향으로 내딛고 있는 듯한 인상이었다. 택시를 타고 도시 주변을 둘러보았다. 거리의 요소요소에는 총을 든 군인들이 2∼3명씩 지켜서 있었고, 통행이 차단된 곳도 수없이 많았다.

광주시는 인구 80만명의 도시로서 도청앞 광장을 중심으로 해서 넓고 잘 다듬어진 도로가 방사선 모양으로 뻗어나간 아름다운 도시다. 광주 시내에 있는 두 개의 신문사를 찾아간 나는 그곳에서 이틀간의 충돌사건을 취재한 약 20개의 필름을 볼 수 있었다. 내가 광주에서 만나본 모든 사람들은 하나같이 말하기를 군인들이 무턱대고 구타를 했다고 했고, 총검으로 찔렀다고 했으며, 또 여자들을 발가벗겼다고도 했다.

그러나 『내 눈으로 직접 보았다』고 말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이런 이야기가 한나절이 지나자 『군인들이 여자의 유방을 도려냈다』고 발전되어서 전해졌다. 신문사에서 본 필름 속에서는 상반신을 벗은 남자들이 군인들에게 연행되어 가는 장면은 있었지만 여자의 옷을 벗긴 장면은 없었다. 정오가 지나자 비는 멎었다. 아무 곳에서도 군중이 모여드는 기미는 없었고, 이제 모든 것은 끝난 듯한 느낌이 들기도 했다. 그러나 현지 지방기자들만은 침통한 표정으로 『반드시 또 더 큰 충돌이 틀림없이 일어날 것이다』라고 말하고 있었다. 그들 지방기자들의 입장은 대단히 위험스러운 상태에 있었다. 말하자면, 데모 학생들로부터는 데모의 내용을 상세하게 보도하지 않는다고 맹비난을 받고 있었고, 또 군이나 경찰로부터는 그들 나름대로의 관점에서 기자들을 싫어하고 있는 상태였다. 물론 기자들이 군경으로부터 미움받는 것은 세계 어느 곳에서나 공통적인 현상이지만, 이곳도 그 예외는 아니었다.오후 한때를 여관방에서 쉬고 있는데 시외곽지대에 군중들이 집결하고 있다는 정보가 날라들어 왔다. 택시를 잡아타고 현장으로 달려갓다.

그러나 데모군중이라고 할만한 사람들이 모인 것도 아니었고, 그들은 군은 장갑차가 나타나면 제각기 골목안으로 흩어져 갔을 뿐 혼란이나 폭력의 사태는 일어나지 않았다. 그래도 나는 택시를 탄채, 시가지의 이곳 저곳을 살펴보고 다녔지만 아무 곳에서도 충돌이 일어날 조짐은 발견되지 않았다. 다만 저녁 5시경에 이르러 일단의 군중들이 도청 옆 골목에서 군과 경찰기동대에 돌을 던지는 일이 일어났었으나 재빨리 쏘아올린 경찰기동대의 가스탄과 몽둥이를 휘두르는 군인들에 쫓겨서 모두 흩어지고 만 일이 있었을 뿐이다. 군인들도 달아나는 군중들은 끝까지 쫓으려 하지 않았고, 따라서 이 때문에 잡혀간 군중은 한 사람도 없었다. 오전 10시경에는 그동안 불통되고 있던 서울과의 전화회선이 회복되고 있었다. 따라서 나는『이곳은 아무 일도 생기지 않고 있으며 고즈넉한 상태다』라고 서울지사에 연락할 수 있었다.

그런데, 저녁식사를 들려고 밖으로 나왔던 저녁 7시경부터, 사태는 돌변하고 말았다. 그때까지 중앙광장에 대기하고 있던 군대와 경찰기동대를 포위라도 하려는 듯이 군중들이 모여들기 시작했으며, 소란이 일어나기 시작한 것이다. 요구조건을 외쳐대는 군중들의 구호 소리와 가스탄을 쏘아대는 폭음이 차츰 커져갈 무렵해서 시가지의 곳곳으로부터 불길이 솟기 시작했다. 『텔레비젼방송국이 불타고 있다』『차량들을 불태우고 있다』, 이런 소문들이었지만 확인하려 쫓아가 볼 상태는 못 되었다. 당시의 광주시는 저녁 9시부터 다음날 아침 4시까지 통행금지령으로 묶여 있었기 때문에 현지 지방기자들까지도 소요는 9시경이면 진정될 것이라고 예상되고 있었다. 그러나 소요상태는 자정이 지날 때까지 계속되었으며, 밤 11시경부터는 서울과의 전화선마저 불통되고 말았다.

총격후 군대 철수

5월 21일(수)

이른 아침부터 시가지를 돌아다니면서 어젯밤에 불태워진 건물들을 촬영했다. 밤 사이에텔레비젼 방송국과 신문사 하나가 폐허로 화하고 있었다. 큰길 가에는 10대의 버스와 소방차 한 대, 그리고 트럭 한 대와 22대의 택시가 바리케이트로 화해 있었고, 골목 안쪽에는 군인들이 땅 바닥에 퍼질러 앉은 자세로 아침식사를 하고 있었다. 8시경에 30세 가량의 작은 몸집의 한 여성이 군인들의 대열 바로 옆에서 2∼3백명 가량의 군중들을 모아놓고 스피커를 통해서 무엇인가를 열심히 연설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별다른 긴장감은 감돌지 않았으며 이따금씩 군인 한사람이 그녀에게 다가가서는 어깨에 손을 얹은 채 무어라고 타이르는 듯한 광경이 벌어지고 있었다.

그러나 11시경이 되자, 이틀 전에 군인의 총검에 찔려 죽었다는 택시운전사의 시체를 담은 관 하나가 운구되어 와서 군인들의 대열 앞에서 장례식을 거행하기에 이르자, 분위기는 달라지기 시작했다. 이때는 군중들의 수도 약 5천명 정도로 불어나 있었고, 꼭 무슨 일이 터질것만 같은 긴장감이 감돌았다. 나는 군중들 틈 사이로 파고 들어가서 시체를 담은 관을 찍으려고 했으나, 여러사람들이 저지하는 바람에 찍지 못했다. 내가 백 속에서 카메라를 꺼내자마자 모두가 근처에 있는 건축중이던 4층건물로 기어 올라가서 촬영하기로 했다. 11시 45분, 데모대가 운전하는 장갑차 한 대가 운집한 군중들을 갈라 세우면서 최전열로 진출해 왔다. 그러자 군중들이 일제히 군인들을 향해서 투석을 시작했으며, 군인들은 별수 없이 후퇴할 뿐이었다. 내가 촬영하고 있던 건축현장에도 십여명의 시민들이 달려와서는 커다란 나무기둥과 콘크리트 덩어리를 집어올려서 군인들의 머리 위로 내던지고 있었다. 화염병과 쇠파이프를 휘두르는 젊은이를 대여섯명 태우고 있던 장갑차가 군이 바리케이트로 치고 있던 버스를 밀어제치면서 군인들 앞으로 다가가고 있었다. 대세는 완전히 데모군중들의 손에 장악되고 있었다.

그런데 군중속의 한 사람이 우리들이 있는 곳을 손가락질하면서 『저기에 기자들이 있다』고 외쳐대자 돌팔매가 일제히 우리들을 향해 날라왔다. 아래에서 공중 높이 날려보내는 돌팔매여서 맞아도 아플 정도는 아니었지만 무드가 너무 격렬했기 때문에 바로 옆에 있던 광주시 유일의 호화 관광호텔의 옥상으로 자리를 옮기기로 했다. 그러자 가까스로 뒷문으로 들어서자마자 그곳 종업원으로부터 『만약 이 빌딩에서 사진 촬영하는 놈이 한 놈이라도 발견되면 당장에 불을 놓고 말겠다는 통고가 있었으니 제발 다른 곳으로 가달라』고 했다. 그때 독일인으로 보이는 남자여행객 한 사람이 완전 소등되어서 깜깜해진 건물 안으로부터 커다란 백을 메고 나왔으며, 그는 호텔 종업원의 안내를 받으면서 마치 탈출의 길이라도 재촉하듯 총총히 밖으로 사라져갔다. 이때 쯤에는 골목이란 골목은 물론 길이 트인 곳이면 으레 데모대와 군인들간의 추격전이 벌어지고 있었으며, 경찰기동대는 이때 이미 자취를 감추어 보이지 않았다. 중앙 광장에서 대치하고 있던 데모대와 군인들과의 거리는 불과 20∼30m 정도였다.

AP의 서울지국에 근무하는 젊은 기자와 나는 도청뒤에 있던 東子여관으로 일단 돌아가기로 했다. 그는 오늘 아침 서울과의 전화연락 때문에 광주시 밖의 송정리까지 택시를 타고 다녀오기로 했었다. 전화가 불통되어 그랬던 것이다. 그는 다음 연락을 12시 반경에 다시 하기로 했다고 했으나 그때는 이미 택시마저도 자취를 감추고 없었기 때문에 걸어서 가는 도리밖에 없었다. 그렇게 걸어나간 그는 다시 돌아오지 않았다. 나중에야 안 일이지만 그는 송정리까지는 갔으나 광주시로는 다시 들어올 수 없게 되어 곧 바로 서울로 돌아가고 만 것이었다. 동자여관에는 나 외에도 한국 각 신문사의 사진기자 다섯사람이 함께 투숙하고 있었다. 그들 역시 여관으로 돌아와서는 『이젠 별 도리가 없다』고 하며 짙은 한숨만 몰아쉬고 있었다. 그들은 전남일보사 옥상에서 사진촬영을 하고 있었다고 했으며, 때마침 나타난 무장데모대들이 『당장 나가라』고 몰아치는 바람에 여관으로 되돌아왔다고 했다. 그러나 무장 데모대로부터 폭행은 안 당했다고 했다.

오후 1시 45분, 처음으로 총격소리를 들었다. 군대가 데모대를 향해서 발포를 시작한 모양이라고들 했다. 전혀 상상조차 못해본 일이 지금 벌어지고 만 것이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지금 죽어가고 있었는지 알 수 없었다. 나는 길바닥에 굴러 있는 2구의 시체를 직접 보았다. 총소리는 요란해질 뿐이었다. 나는 더 이상 밖을 쏘다닐 용기를 잃고 말았다. 쿵쿵하는 땅울림도 들려왔다. 어떤 건물이 지금 파괴되고 있는 것일까. 지방기자 한사람이 메모 한 장을 전해주었다. 데모대가 무기고에서 총기를 약탈해서 무장을 했다고 한다. 『M-1총 1천2백30정, 카빈총 2천2백정, 38구경 권총 12정, 45구경 권총 16정이 약탈당했다』고 적혀 있었다. 『지방 도시 무기고에 그렇게나 많은 총기가 있을 리 없다. 믿어지지 않는 이야기다. 도대체 어느쪽이 발표한 내용인가』라고 내가 물었더니 『군의 발표지만 우리들은 그것을 충분히 믿을 수 있다』고 그는 대답하는 것이었다. 이제는 더 이상 어떻게 해볼 방법이 없었다. 모두 커튼을 둘러치고는 한자리에 모여서 한숨만 쉬다가 화투치기라도 하자 해서 화투판을 벌였다.

그러나 마음은 모두 불안 그것이었다. 3시경이 되자 총성이 산발적으로 울리더니, 데모대의 함성소리만 들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곧 군대가 시가지에서 철수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그러나 지방기자의 말로는 군대는 밤 9시에 중앙광장으로 재진군해 올 것이기 때문에 데모대측은 다이나마이트로서 그들과 응전할 것이라고 한다. 그 뿐 아니다. 그는 도청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있는 이 여관은 그럴 경우에는 매우 위험하니 여관을 교외쪽으로 옮겨가야 한다고도 했다. 모두 짐을 꾸렸다. 한사람 한사람씩 골목길을 따라서 데모대의 눈을 피하면서 교외의 어느 교외당에 모였다가 다시 작은 여관을 찾아서 집결했다. 상점들은 문을 절반을 닫고 있으면서도 영업은 계속하고 있다. 신기한 것은 그들 시민들의 얼굴빛에서는 공포의 그림자라고는 추호도 찾아볼 수 없는데 비해 우리들 보도관계자들만은 공포에 사로잡혀 전전긍긍하고 있다는 느낌이었다. 이 날이 석가탄신일이어서 여관에는 하얀 쌀밥을 지어주었다.

그러나 찬은 김치와 소라통조림뿐이었다. 서울로 사진을 들고 돌아가야 하는 처지였지만 그 가능성을 전혀 찾을 길이 없었기 때문에 단념하고 잠이나 자자고 자리에 들었다. 결국 밤 9시에 일어날 것이라던 다이나마이트 공방전은 일어나지 않았다.

결사적인 탈출기도

5월 22일(목)

쾌청. 오전 9시경부터 중앙광장에서는 군중대회가 시작되고 있었고, 나는 거리를 거니는 것은 자유로왔지만, 카메라는 백 속에 둔 채 있어야 했다. 거리에 면한 여관을 찾아 들어가서 쇠방충망을 찢고 망원렌즈를 써서 무장한 트럭과 지프, 그리고 거리를 질주하고 있는 데모대들의 차량들을 촬영해 보았으나 사진으로는 별 가치가 없는 것들이었다. 라디오뉴스가 전하는 바로는 광주사태의 흑막의 인물이 김대중이라고 하며 그가 체포되었다는 것이었다. 오후 2시, 나는 걸어서라도 광주 외곽지대로 나가서 서울로 돌아가기로 마음을 굳혔다. 그러나 광주시는 지금 이중 삼중으로 군에 의해서 포위되고 있고, 모든 도로는 모조리 차단되고 있기 때문에 오늘은 도저히 광주를 못 빠져나갈 것이라고 하는 것이 친구들의 공통된 의견이었다. 그러나 사진 원고를 전해야 하는 나로서는 수수방관만 하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외곽지대로 나가는 지도 한 장을 그려 달라고 한 나는, 큰 길을 거쳐서 광주역으로 나갔다가, 광주와는 최단거리에 있는 장성으로 빠져나갈 예정으로 길을 나섰다.

큰길가로 나간 나는 길목에 서 있는 2∼3명의 집총한 젊은이에게 다가가서는 『나는 일본인 기자다』라고 명함을 내보이고는 『촬영해도 좋으냐』고 물어보았다. 그들은 그냥 삐죽삐죽 웃고만 있을뿐이었다. 그 사이에 나는 2∼3매의 사진을 찍어댔고, 그럴라치면 군중들이 우루루 몰려와서 나를 포위하는 것이었다. 나는 그런 짓을 몇번인가 되풀이하면서 광주역으로 향해갔다. 도중에 총을 든 젊은이가 탄 트럭이 멈추어섰고, 길바닥으로 뛰어내린 그 청년이 나를 향해서 무엇인가 큰소리로 외쳐댔지만 폭력을 휘두를 기색은 보이지 않았다. 그래서 나는 재빨리 샤터를 눌러서 사진 두장을 촬영할 수 있었다. 가까스로 광주역까지 오게 된 나는 이 사진만은 제대로 된 작품이 되겠다고 혼자 다짐하고 있었는데, 그때 소형 트럭을 몰고온 세사람의 젊은이들에게 포위되고 말았다. 그들은 총구를 내 가슴에 들이대고는 『차에 타라』고만 했다. 나는 아무도 없이 텅빈 여관방으로 끌려갔다. 물론 나는 필사적으로 내가 일본인 기자임을 열심히 설명했지만, 과연 그것이 인정되고 있는 것인지 어떤지는 불투명했다.

다만 내가 「담배」를 달라든가 콜라를 달라고 하면 아무 말 없이 갖다주곤 했기 때문에 죽일 것 같지는 않아 보였지만, 시간이 자꾸만 흘려가고 있는 것이 더 없이 안타까왔다. 또 다시 새로운 그룹이 방안으로 들어오더니 이번에는 밖으로 나가자고 했다. 이 새로 나타난 그룹과 그 전의 두 그룹은 무슨 이유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서로 심하게 언쟁을 벌이고 있었다. 그러더니 그중의 한 젊은이가 노기찬 몸짓으로 총을 들어 땅바닥을 내려쳤다. 총은 단번에 두 동강으로 부러졌다. 그러나 트럭의 짐칸에는 아직도 몇자루의 총이 나뒹굴고 있었다. 나는 다시 차에 태워졌고 트럭은 시가지를 누비듯이 돌아다니기만 했다. 그러다가 지프를 본 무장그룹이 다가와서 네가 태워진 차를 멈추게 했고, 『이 사람은 누구냐』고 묻고 있는 모양이었다. 그들이 차를 세운 장소는 아무도 안 보이는 한적한 개천변이었는데, 말은 알아들을 수 없었지만 그들이 하고 있는 몸짓이 내가 갖고 있는 카메라를 내놓으라는 것 같았다.

나는 『이 카메라를 입국할 때, 출국할 때에는 반드시 들고 나가겠다고 세관에 계출되어 있는 카메라이기 때문에 당신네들에게 주고 나면 나는 김포에서 출국을 못하게 된다』고 패스포드까지 내보이면서 열심히 설명을 했었으나 알아 듣지 못하는 모양이었다. 그때 나는 개천변에서 그들과 실랑이를 벌이면서 어쩌면 나도 이곳에서 총살 당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지만, 다시 차에 태워졌을 때는 안도의 한숨을 깊이 쉴 수 있었다. 내가 태워진 차는 무슨 클리닉센터라고 쓰여진 문 앞에서 멈추어 섰고, 그곳에는 흰 가운을 입은 여남은명의 사람들이 모여 서서 길거리를 구경하고 있었다. 그 사람들속에 미국인이 섞여 있었다. 나는 그를 향해서 『나는 일본인 사진기자다. 이 젊은이 세사람이 나를 붙들고 놓아주지 않아서 곤욕을 치르고 있는데 나를 위해 좋은 방도가 없겠느냐』고 물었는데, 『나로서는 도울 형편이 못된다. 나도 지금 당신과 비슷한 처지에 놓여져 있는 몸이다』라고 그 미국인은 대답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우리들이 영어로서 서로 대화하는 것을 듣고 있던 어떤 영어를 잘 하는 한국인이 나서서 나를 붙잡고 있던 세사람을 잘 납득시켜준 덕택에 나는 가까스로 그들로부터 풀려날 수 있었다. 그러나 그렇게 되기까지 나는 무려 3시간이나 시간낭비를 하며 끌려다니고 있었던 것이다. 나는 그곳에서 다시 장성을 향해 걸음을 재촉했다. 약 20명가량 되는 학생처럼 보이는 젊은이들이 트럭과 통나무를 쌓아서 만든 바리케이드너머에는 두 대의 전차가 이쪽을 향해 서 있었다. 그들은 8백m정도의 거리를 사이에 두고 서로 대치해 있었다. 나는 그들 학생같은 젊은이에게 『일본인 기자인데 광주를 빠져 나가고 싶어서 가는 길이다. 통과시켜 달라』고 했더니 그들은 웃으면서 『위험하니 길 옆으로 바싹 붙어서 가라』고 했다. 나는 『제발 뒤에서 총질은 하지 말아 달라』고 부탁하고는 전차가 있는 쪽을 향해 걸어나갔다. 총소리는 그때도 단속적으로 들려오고 있었다. 아마 주위의 어느 산 속에서 총격전이 벌어지고 있는 모양이었다. 길가에 서 있던 그곳 주민들은 내가 찬 완장을 보고는 『여어, 기자다』하고는 무사히 잘 가라는 뜻인지 박수를 쳐주기도 했다.

전차가 서 있는 약 1백m전방까지 다가선 나는 오른손에는 패스포드를, 그리고 왼손은 높이 쳐든 채 『일본인이다. 광주 밖으로 나가려고 한다. 보내달라』하며 고함을 쳤다. 그러자 전차위에 서 있던 군인이 스피커를 통해서 무엇이라고 소리질렀다. 그러나 한국말을 못 알아듣는 나로서는 무슨 뜻인지 통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그러자 영어를 할 줄 아는 다른 군인이 나타나서 『뒤로 물러가서 5분간만 기다려라』고 했다. 이제는 살았구나하는 기분이 들었던 순간 『헤이 자파니즈, 유 고 아웃』이렇게 소리치지 않겠는가. 도대체 『광주 밖으로 나가라』는 뜻인지 아니면 『광주 시내로 되돌아가라』는 뜻인지 분간할 수 없는 그 말 때문에 몇번이고 되물어 진의를 알아보려 해보았으나 군인의 대답은 한결같은 『고 아웃』, 이것뿐이었다. 시간은 벌써 저녁 6시 40분, 땅거미가 서서히 지고 있었다. 나는 하는 수 없이 약 1백m를 더 물러서 나왔으며 그곳에서 있던 주민들에게 『이 근처에 호텔이 있는가』라고 물었다. 그 사이에도 전차를 탄 군인은 계속해서 무엇인가를 소리 지르고 있었다.

그러자 주민들 속에 끼어 있던 어떤 한사람이 나를 손짓하고 있었다. 그는 영어로 말하기를 『오늘은 더 이상 나가는 것이 힘들 것 같으니 단념하고 자기 집으로 와서 쉬는 것이 좋을 것이다』라고 말해주는 것이었다. 이 친절한 주민을 따라 나는 그의 집에서 밤을 신세졌다. 그 집에는 학교 교사를 하고 있다는 그의 아버지가 있었는데, 그 분은 완전한 일본말을 구사할 줄 알았다.『어떻게 광주땅에서 이런 일이 벌어지게 된 것입니까』이렇게 묻는 나의 질문에 그는 『나쁜 놈들이 있기 때문이지요』이렇게만 대답하는 것이었다. 그날 밤에도 그곳 신 주택가에서는 상당히 격렬한 총격음이 계속 울리곤 했다.

프레스센터 같은 도청 뒤 여관

5월 23일(금)

맑음. 내가 하루밤 신세진 그 집은 상당히 유복해 보였지만 전화는 없었다. 그 집 젊은이와 나는 그의 친구 집으로 우선 옮겨가서 그곳에서 다시 광주를 빠져 나갈 수 있는 길을 찾아보기로 했다. 오전 11시가 되었을 무렵, 장성으로 가는 구 국도는 통행이 가능한 것 같다는 정보를 얻었다. 그곳에서 장성까지 거리는 약 24㎞, 그러니까 4∼5시간을 걸어가면 될 거리였다. 나는 그로부터 지도를 그려받았고, 구 국도라고 일러준 울퉁불퉁한 길로 나섰다. 『여기서부터는 외가닥 길이니까 나 혼자로서도 충분히 갈 수 있다』고 내가 몇번이고 말했지만 그들 젊은이들은 『조금만 더 바래다 주겠다』고 하며 따라 나섰다.약 2시간을 걸었을까. 뒤에서 달려오던 대형 트럭에 타고 있던 젊은이가 무엇인가 강한 어조로 말을 건네왔다. 그 젊은이는 총은 갖고 있지 않았다. 『일본인 기자』라고 했더니 갈 수 있는 곳까지 태워주겠다고 했다.

장성까지 이제 5㎞정도만 남았다는 지점에서 군인 4명이 광주로부터 나오고 있는 사람들을 검문하고 있었다. 신분증명서가 있는 사람이면 금방 통과시켜 주었다. 그러나 모든 교통수단은 마비되어 있었다. 그래서인지 그곳 검문소와 장성사이에는 몇대의 택시가 왕복운행을 하고 있었다. 나도 군인들에게 패스포트를 보여주었고, 곧 통과시켜 주기에 건너편으로 걸어나오게 되었는데 그때 택시 한 대가 내 쪽으로 달려왔다. 그 차속에는 낯익은 두 사람의 카메라 기자들이 타고 있었다. 그들은 나를 향해 손을 흔들면서 웃고 있었다.이 택시를 타고 장성역으로 나가 다시 기차로 바꿔 타고 45분을 간 곳이 정읍이었다. 그곳에서 다시 고속버스를 갈아타고 3시간20분 뒤에야 나는 가까스로 서울땅을 밟을 수 있었다. 그 시각은 밤 7시였다. 그러나 그토록 애써서 갖고 온 나의 사진원고는 너무나 때늦은 것이 되고 말았다.

5월 25일(일)

한국 방방곡곡은 내리치는 호우속에 잠겨서 푹 젖고 있었다. 저녁 6시, 미국 NBC방송차에 편승해서 1백80㎞를 남하해 갔다. NBC의 취재 본부가 있는 전주시에 도착한 시각은 밤 10시였다.

5월 26일(월)

맑음. 나는 또 다시 NBC직원들과 함께 그들 차에 편승해서 광주로 향했는데, 그 시각은 오전 8시였다. 열두곳에서 검문을 받았고, 70㎞를 달리는데 소요된 시간이 4시간이나 걸렸다. 이리하여 광주 도청에 도착했을 때는 정오가 되고 있었다. 높은 건물 옥상에는 거의 빠짐없이 침통한 젊은이들이 서 있었고, 도청내에 설치된 학생 대변인이 있는 반에는 이미 10명을 헤아리는 외국인기자들이 도착해 있었다. 내일부터는 오전 10시와 오후 5시의 두차례에 걸쳐서 정례적인 기자회견을 하겠다고 해주었으며, 「기자증」도 발행해 주었다.

그날 밤은 평온했다. 다만 올림픽의 프레스센터를 방불케 하는 도청 뒤의 동자여관만은 내외신기자들로 들끓고 있었다. 나는 오랜만에 만나게 된 카메라기자들과 어울려서 자정까지 맥주를 마시면서 떠들고 지냈다.「타임」사에서는 빠리와 홍콩에서 각 한 사람씩이 파견되어 왔고, 「뉴스위크」사에서는 빠리로부터 한사람의 카메라기자가 파견되어 왔다. 미국의 3대 네트워크사로부터는 홍콩 런던 동경으로부터 네 개 반이 편성되어 특파되어 있었다. 각 언론사들은 만약의 경우를 염려했던지 대절한 자동차의 지붕은 물론, 문짝, 앞 뒤 쪽의 공간마다 자사를 표시하는 사기를 덕지덕지 붙여놓고 있었다.

『작전대로 잘 진압되었다』

5월 27일(화)

새벽 2시인데도 누군가가 방문을 노크하고 다니면서 『불을 끈 채 옷을 챙겨입으라』고 일러주었다. 또 학생 한사람이 찾아와서는 어떤 카메라맨에게 일러주기를 『4시에 군이 직격해 올 것이며, 우리는 그들과 맞붙어서 싸울 것이다』라고 전했다고 한다.우리들은 그 진부를 확인하기 위해서 도청으로 뛰어갔다. 새벽 3시경이었다. 학생들은 대답은 『사실이 그렇다』고 했다. 깜깜한 암혹 속에서도 약 2백명쯤 되는 사람들이 대열을 지어 구보해 와서는 총기들을 받아들고는 다시 지프나 트럭에 분승되어 어디론가 어두운 거를 향해 떠나가고 있었다.「타임」「뉴스위크」ABC UPI기자들과 나는 전남일보사 옥상에서 촬영하기로 촬영장소를 정했고, 다른 기자들은 일단 여관으로 되돌아갔다. 3시반의 밤 하늘에는 은하수가 한결 더 맑게 아름다운 자태를 과시하듯이 흐르고 있었다. 이따금 격렬한 총격음이 들려오곤 했지만 우리들로서는 어디에서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확인할 길은 없었다. 우리들은 새벽 추위를 피해서 비상계단쪽으로 가서 앉아 있었다. 그리고 기다렸다. 때론 나는 옥상으로 나가 사방을 둘러보곤 했는데, 그때마다 내가 있는 근처 벽에 총탄이 박히곤 했다. 그것은 어쩌면 군대가 이미 이 근처까지 깊숙이 침투해 들어와 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으로 느껴졌다. UPI의 카메라기자가 복숭아통조림을 뜯어서 여러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새벽 4시 15분이 되자 총성이 아주 근거리에서 들리더니 쿵쿵거리는 땅울림이 우리들에게 긴박감을 느끼게 했다. 그러나 사방은 아직도 짙은 어둠속에 묻혀 있어서 우리들의 카메라가 촬영을 시작하려면 아직도 한시간은 더 기다려야 하는 시간이었다. 맨 아래쪽 계단에 앉아 있던 프랑스인 카메라기자가 갑자기 양손을 높이 쳐들면서 자리에서 벌떡 일어서더니 『쏘지마! 프레스다!』하며 소리를 쳤다. 처음 우리들은 그가 장난삼아 농지꺼리를 하는 것으로만 생각했다. 그러나 그것이 아니었다. 총을 겨눈 군인 세명이 뛰어 올라왔던 것이다. 우리들은 군인들이 시키는대로 5층까지 내려가야만 했다. 그곳에는 네명의 학생들이 손과 발이 묶인 채 엎어진 자세로 있었다.『사진은 절대로 못찍는다』고 군인들이 몇번이고 거듭해서 주의를 주고 있었지만 우리들은 틈 나는대로 그것을 카메라에 담았다. 그러나 깜깜한 어둠 속이었기 때문에 과연 제대로 찍혀지고 있는지 어떤지는 의문이었다.

이윽고 전차가 굴러가는 무거운 캐터필라소리가 들려왔고, 창으로 내다본 거리에는 수십대의 군용 트럭들이 도청 앞을 메우면서 줄지어 서 있었다. 그 사이로 군인들이 재빠른 동작으로 도청을 향해 뛰어들어가고 있었다. 나는 놓칠세라 창가로 몸을 내밀면서 카메라를 눌러댔다. 『위험해! 엎드려!』UPI기자가 소리치는 바람에 나는 엉겁결에 머리를 숙이면서 뒷머리를 만져 보았더니 피가 주루륵 손에 묻었다. 그러나 다행스럽게도 부상은 크지 않았다. 모든 고층건물에는 벌써부터 저격병들이 배치된 모양. 우리들은 그 후에 다시 1층까지 내려오게 명령을 받았지만 밖으로 나가는 것은 중지되고 있었다. 도청 지하층에 있는 이발소에는 기관총 한자루와 2백정의 카빈총이 숨겨져 있었다. 오전 6시, 겨우 풀려난 우리들은 밖으로 나올 수 있었다. 큰 길가에는 어디라고 할 것 없이 군인들이 서 있었으며, 살벌한 눈초리로 총을 겨누고 있었다. 군인들을 가득 실은 트럭들이 줄을 이루면서 전속력으로 도청광장으로 진격해 오고 있었다.

전남일보사로부터 약 20명의 학생들이 뒤로 손이 묶인채 연행되어 나왔다. 군인들은 이 광경을 찍고 있는 프랑스인 카메라기자를 향해 『사진 찍지마!』하고 소리질렸지만 기자들은 못 알아듣는다는 핑계로 계속해서 카메라를 눌러댔다. 그들 학생들을 연행하는 군인들은 총을 비스듬히 겨누면서 저격당할 것에 대비하고 있었으며, 어떤 군인은 앞을, 어떤 군인은 옆을, 또 뒤를 보면서 뒷걸음질 옆걸음질로 걸어 오고 있었다. 그들 학생들은 무슨 이유에선지 두 번이나 전남일보사 앞을 왕복한 뒤에야 도청 앞에 세워져 있던 2대의 허름한 버스에 태워졌다. 도청 안으로부터는 약 2백명으로 헤아려지는 학생들이 양손을 머리 위로 얹은 자세로 몸을 앞으로 구부린채 연행되어 나와서는 버스속으로 밀려 들어갔다.

두 대의 버스에 빈틈없이 밀려들어간 그들 젊은이들은 모두가 한결같이 머리를 푹 숙이고 있었으며, 죽은 듯이 꼼짝 않고 있었다. 그와는 대조적으로 약 1백 가량의 군인들은 지휘관앞에서 점호를 받고 있었다. 영어를 할 줄 아는 대령 한 사람이 웃는 얼굴로 우리들 보도진에게 다가 왔다.『모든 것은 작전대로 잘 진압되었다』고 그는 말하고 있었다. 『진압군은 얼마나 동원되었는가』라고 던져본 질문에 대해서는 『그런 질문에는 응답할 수 없다』고 그는 말하기도 했다.

오전 7시, 나는 AP기자와 함께 광주시내에서 전세낸 덜덜거리는 고물차에 몸을 싣고 나주로 향했다. 그곳에서 택시를 대절해서 서울로 갈 예정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역전에 모여있는 운전기사들은 20만원을 주어야만 서울로 가겠다고 했다. 원래는 5만원이면 되는 차삯이라고 듣고 있었는데 20만원은 너무했다. 그렇다면, 사진 원고를 미국의 텔레비젼 촬영반들에게 탁송시키는 편이 차라리 나을 듯도 해서 다시 부랴부랴 광주 도청으로 되돌아갔다. 그러나 그때는 이미 그들마저도 광주를 떠난 뒤였다. 나는 다시 허둥지둥 송정리역까지 되돌아 되돌아 나와서는 12만원에 서울까지 가겠다는 노운전사를 만났다. 그 길로 서울을 향해 길을 재촉했다. 길가에서 행해지는 검문 검색은 일찍이 못보던 엄격한 검문으로 바뀌고 있었고, 그 때문에 차는 언제 서울에 도착할 지 예상조차 못할 지경이었다. 겨우겨우 장성까지 왔을 때였다.

우연히도 서울에서 같이 왔던 AP카메라기자와 마주쳤다. 그는 나의 사진원고를 받아 가지고 급히 서울로 떠나 주었고, 나는 또 다시 광주시내로 되돌아왔다. 도청앞 광장에는 여섯 대의 전차가 남아 있었으며, 약 2백명의 군인들이 땅바닥에 앉아서 용맹스런 가락의 군가를 한국말로 부르고 있었다. 그러한 그들 군인들을 시민 약 2백명이 늘어서서 군인들 대열 앞까지 바싹 다가서서 물끄러미 쳐다보고 있었다.

검문검색 속에 서울로

5월 28일(수)

쾌청. 아침 일찍부터 도청앞 광장 주변의 시민들은 현관 셔터에 물을 끼얹으면서 청소하기에 바빠 보였다. 길바닥도 깨끗이 쓸어내고 있었다. 도청 앞 광장의 통행은 자유로웠고 서울에서 온 신문사 차가 23일자 신문을 시민들에게 나누어 주고 있었다. 그러나 9시경에는 다시 광장의 통행은 금지되었고, 필요한 사람은 우회해서 가는 도리밖에 없게 되었다. 대부분의 상점에는 상품이 절반 정도밖에 진열되어 있지 않았다. 나는 이런 광주를 뒤로 두고 11시 30분 서울로 향해 길을 떠났다. 그러나 검문검색은 여전히 엄격했다. 서울에 도착한 시각은 오후 6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