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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5월 22일 04:55 - 20사단 60연대 병력 전교사에 도착(87/1,562). (전교사 작전일지) 06:00 - 보병 20사단, 송정리역 도착. 이 병력은 전투교육사령부로 지원되는 차량으로 보병학교에 집결. - 22일 김재명 소장이 박준병 소장에게 지시, "광주 전교사 사령관은 육군 박소장이 지휘하는 20사단의 1개 연대와 즉각 출동하라." (말, 1988. 5) 06:30 - 31사단 병력, 비아 송신소, 광주변전소 경계병력 투입. (전교사 교훈집) 08:30 - 7…

  • 5월 21일 00:30 - 02:00 3여단 전투내용 . 11대대 소요군중 돌파, 광주시청의 13대대와 합류, 광주역전의 12, 15대대와 연결작전 시도. . 12, 15대대 광주역전에서 폭도와 대치. . 11, 13대대와의 연결작전 지원. (특전사 전투상보) 01:00 31사 화염방사기 소대 출동 . 인원 : 2/31명 . 발연기 4대 . 화염방사기 10대 . 차량 6대 (전교사 작전일지) 01:00 - 20사단 및 62연대 이동(107/1540)(육작명 23-80) 1. 배속전환 …

  • 5월 20일 20일 01:10 - 제7여단 계엄군은 서로의 지역대를 편성하여 제11, 12, 17지역대로 구분 제11지역대는 충장로에 배치 제12지역대는 광주공원에 배치 제17지역대는 광주대교에 배치하여 작전을 수행케 함. (말, 1988.5) - 31사단 광주 시내무기 탄약 회수 : 6,508정, 42만 발 최루탄 신청 건의 : 1천 발 표시 미회수 총기, 탄약 긴급조치, 총기는 공이 및 노리쇠 제거 진압작전 병력운용. (전교사 작전일지) 05:00 - 전교사, 5백 MD 3대의 헬기 요청. …

  • 5월 19일 00:05 - 05:00 11특전여단의 광주 도착과 진압군의 재편성 19일 0:05 - 제11공수여단(여단장 최웅 준장, 병력규모 102/696) 제31사단에 도착. - 작지 80-3호에 의거, 11공수여단 도착과 동시에 31사단의 작전통제 받음. (전 교사 작전일지) 02:10 - 제31사단에 도착한 제11공수 조선대로 이동 완료.(전교사 작전일지) 04:00 - 35대대는 11특전여단의 작전통제하. (전교사 교훈집) - 11여단 61대대에게 33대대 및 35대대의 거점 인계. (특전…

  • 5월 18일 - 전북 금마에 주둔하던 특전사 제7여단(여단장 준장 신우식, 2군 배속) 제 33, 35대대 82/604(장교/사병 이하 생략), 전남대 도착. 도서관, 총학생회실 등에서 철야를 하던 학생들을 급습, 곤봉과 군화발로 구타 후 체포. 02:00 - 제33대대(대대장 권승만 중령) 45/321, 전남대와 광주교대 점령 완료. 교내에 있던 학생 69명 체포. - 제35대대(대대장 김일옥 중령)39/283, 조선대와 전남대 점령 완료. 학생 43명 체포. 02:26 - 제33,35대대, 31사단 96연…

  • 제 2 절 상무대로 연행(27일 07:30 - 22:50) 07:30 - 09:30 - 기갑학교 인원 1/48, 전차 14대, APC 1/4톤 1대 무력시위, 금남로-도청-학동- 시민회관-광주구역-부대. (계엄사 상황일지) - 공무원 근무 개시 - 시내전화 개통. 07:45 - 작전 성공요인 1. 기습 달성 2. 광주시내 주동 폭도들의 활동에 대한 정확한 정보 입수 3. 작전계획의 보안유지를 위해 계획으로만 발전시키고 실제 작전투입을 위한 명령을 작전개시 2시간 전에 하달 4. 계획시행 전 유…

  • 제 5 장 도청 함락 제 1 절 최후의 항쟁(27일 00:00 - 06:00) 외곽지역의 시민들로부터 계엄군이 쳐들어온다는 제보가 속속 들어오고 도청 행정전화가 끊기자 도청 상황실은 술렁거리기 시작했다. 홍보부에서는 시민들에게 이 사실을 알려야 한다고 결정하고 광주시내 전지역을 돌면서 마지막 가두방송을 했다. "시민 여러분, 지금 계엄군이 쳐들어오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우리 형제자매들이 계엄군의 총칼에 숨져가고 있습니다. 우리 모두 일어나서 계엄군과 끝까지 싸웁시다." 애절한 여자의 목소리가 정적을 가르…

  • 제 3 절 항쟁지도부의 탄생과 활동 (25일 22:00 - 26일 밤) 새로 구성된 항쟁지도부는 그 명칭을 수습대책위원회에서 민주시민투쟁위원회로 바꾸고 무장투쟁을 준비해 가는 한편, 시민들의 민원사항 등을 처리하기 위해 행정체계를 정립해 갔다. 아침 일찍부터 각 부서별로 업무를 분담하여 시민생활 정상화에 노력했으며, 기동타격대로 재조직된 무장병력은 시내순찰과 계엄군의 동태 파악, 치안유지 등의 임무를 부여받았다. 26일 새벽 계엄군이 탱크를 앞세우고 농성동 한전 앞까지 진입했다는 소식이 도청 상황실에 보고되자 전시민군에…

  • 제 2 절 민주수호 범시민궐기대회 (23일 - 25일 오후) 도청 앞 광장에 모인 시민들은 23일 오후부터 매일 오후 2시 '민주수호 범시민 궐기대회'를 열었다. 노동자, 시민, 학생, 가정주부 등 각계각층 사람들이 분수대 위로 올라가 계엄군의 만행을 성토하고 앞으로의 수습대책을 토론했다. 또한 그때 파악된 피해상황이 보고되었으며 장례준비를 위한 모금운동을 벌이기도 했다. 그러나 도청의 '수습대책위원회'는 시민들의 의사를 수렴하지 못하고 미온적인 태도로 계엄사와 협상을 벌이고 있었다. 일방적인 무기반납만을 주장함에 따라…

  • 제 4 장 해 방 기 간 제 1 절 수습위원회의 구성(21일 20:00 - 22일) 계엄군이 물러가고 도청이 시민군의 손에 들어왔다는 소식은 밤사이 광주시 전역에 전해졌다. 흥분과 감격에 젖어 이른 아침부터 도청으로 몰려든 시민들은 속속 발표되는 사망자 숫자와 처참하게 일그러진 시체들을 보며 계엄군의 잔학상에 치를 떨었고 앞으로의 상황변화를 예의주시하며 도청 앞에서 궐기대회를 가졌다. 시민들은 자체치안 확보와 질서확립을 위해 스스로 거리를 청소하고 경계근무를 섰다. 해방기간 광주에서는 큰 안전사고 없이 생활물자를 나누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