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주학살 관련 그레그의 서한. 서재정(말, 1990.5)
1979~80년 미 국무부 비밀 외교문서 4천 페이지 철저 분석 /전두환, 카터를 농락하다 조동준(월간조선) 박정희 사망에서 전두환 취임까지 1979년 10월26일 박정희 대통령의 사망은 1961년 군사 쿠데타이후 형성되어온 체제를 재편시키는 과정의 시작이었다. 18년 동안 한 사람의 최고 권력자를 중심으로 운영되던 체제에서 일순간 체제경영의 중추가 사라졌다. 1979년 10월26일 오후 7시35분부터 시작된 체제개편은 81년 2월 전두환씨가 제12대 대통령으로 취임하면서 공식적으로 끝났다. 이 과정은 결코 평화롭게 …
미국의 5·18 재판/안병하 전 전남도경국장 장남 미법원서 끈질긴 투쟁. 정태수 (월간중앙 WIN) "미국은 한국민의 가장 은혜로운 우방으로 인식 돼왔다.그러나 1980년 5월, 영원히 치유될 수 없는 상처가 돼버린 광주사태를 미국이 용인함으로써 ‥‥‥" 한국교회사회선교협의회가 지난 82년 4월15일 발표한 한국 최초의 공개적 반미 성명서 '부산 미문화원 방화사건에 대한 우리의 견해' 는 반미의 뿌리를 이렇게 지적하고 있다. 한동안 미국을 구세주처럼 떠받들던 한국에서 80년대부터 시작된 반미운동의…
80년대의 민중문화예술운동 윤재걸 70년대를 비극적으로 마감한 10·26이후, 우리 사회는 여러 부면에서 극심한 변화와 갈등을 경험하였다. 80년대 진입 후 중반기로 접어드는 오늘날 이러한 변화와 갈등들은 점차 하나의 [꼴]을 형성해가면서 뭔가 나름대로 정리되는 양상을 보여주고 있는 중이다. 변화와 갈등을 경험한 사회의 여러 부면중 특히 우리 문화·예술계가 겪은 몫은 여타의 어느 부면보다도 의미있는 대목으로 여겨지고 있다. 아직 평가할 단계에는 이르지는 못했다손 치더라도, [민중]을 공약수로 한 이러한 문화인식은 확…
1980년 『서울의 봄』 200일 이 수 언 박대통령 [有故]로 대통령권한 대행 {비서실장님께서 빨리 실장님 방으로 오시라고 하십시다.} 최규하 국무총리는 79년 10월 26일 밤 10시 20분경 김계원 대통령비서실장실로부터 전화연락을 받고 10시 45분 청와대에 도착했다. [부·마사태]로 부산지역에 비상계엄령 선포를 의결하고 마산지역에 위수령을 발동했던 최총리는 김계원 비서실장의 당황하는 태도로 심상치 않은 사태가 일어났음을 직감했다. 김계원은 동석했던 수석비서관들을 옆방으로 내 보낸 후 崔총리와 구자춘 내…
광주, 그 비극의 10일간 윤 재 걸 80년 5월, 10·26직후의 혼란기를 한 고비 넘긴 우리 사회는 새로운 위기 국면에 접어들고 있었다. 5월에 들어서면서 서울대를 비롯한 학생운동권은 학생들 스스로조차 놀라움을 감추지 못하는 급격한 변화에 돌입하고 있었다. 5월2일에 서울대 관악캠퍼스에서 개최된 [민주화대총회]에 1만여명에 가까운 서울시내 각 대학생들이 동원된 것이다. 이후 10여일간 계속된 이른바 [민주화성회]를 통해 학생들은 운동을 지구화한다는 전략을 수립, 이를 바탕으로 [참 민주화]의 돌파구를 마련한다는…
광주사태는 우리에게 무엇인가 장 을 병 「광주사태」에 대한 루머의 발생은 정부가 사태를 터부시하면서 되도록 언급을 피하려 한데서도 그 원인을 찾을 수 있다. 정부발표가 사실이라면 왜 진상조사 제의에 소극적인 태도를 취하느냐는 의문이 그것이다. 십수년전 필자는 프랑스 정부론을 강의한 일이 있었다. 그 강의 중에 유혈사태로 점철된 프랑스의 현대사를 살펴보지 않을 수 없었다. 1789년의 대혁명 과정에서 빚어진 유혈사태는 물론 19세기 중반에 들어와서 두 번에 걸쳐(1848년 6월과 1871년 2월) 행해졌던 유혈사태들도…
동아일보 광주주재기자의 취재수첩 「광주사태」그날의 5가지 의문점 김 영 택 광주직할시 북구 북동 누문동과 북동을 잇는 횡단보도. 북동거리이지만 금남로의 연장이어서인지 금남로 거리라고도 불리는 광주의 메인 스트리트 위에 하얀 페인트로 칠해진 횡단보도다. 지금은 페이트가 거의 벗겨져 보기조차 흉한 곳. 유서 깊은 광주제일고등학교 입구로서 학생들이 가장 많이 이용하는 길목이기도 하다. 10대의 나이 어린 학생들이 일제에 항거하여 독립운동을 일으킨지 51년. 이번에는 [광주사태]의 비극이 바로 이곳에서 시작되었다. …
광주민중항쟁과 여성의 역할 - 광주여성들 이렇게 싸웠다 - 고정희 (시인) 광주 민주여성운동 세력의 성격 5·18 광주민중항쟁의 구체적인 살림을 도맡았으며, 개인 행동이 아닌 완전한 「민주공동체」의 형성, 혹은 10일간의 「광주해방구」 실현에 집단적 代母역할을 용감하게 수행해 낸 광주 민주여성운동 세력은 5월항쟁 이전까지 남성운동권과 따로 분리되어 있지 않았다. 물론 일제치하에서부터 항일 독립투쟁에 앞장섰던 수피아여고 출신 등의 민주인사들이 아직 생존해 있고, 광주학생운동의 본거지로서 민족운동에 대한 뚜렷한 자각과…
내가 겪은 5월의 광주 -다시 정리해 본 당시 취재기자의 수첩- 위 정 철 일요일에 터진 광주의 난리 그날은 일요일이었다. 비록 오늘(18일) 0시를 기해 제주도에까지 비상계엄령이 확대되었지만 일요일이기에 돌발사건은 일어나지 않으리라고 여겼다. 마음도 울적해서 무등산으로 등산을 갔다. 산에서 점심을 먹고 오후 3시쯤에 중심사계곡 버스정류장으로 내려왔다. 집으로 가려고 택시를 탔다. 택시에 오르자 운전사가 {광주 난리 났어요}한다. 그는 {학생들이 경찰과 투석전을 벌이고, 짚차를 불태우는 등 소동이 벌어졌다}면서 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