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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5·18당시 발포거부 전남도경국장의 광주비망록 80년 광주의 학살은 그곳에서 끝나지 않았다. 신군부의 발포명령을 거부하다 동빙고로 끌려가 고문당하고 자진 사표를 써야했던 5·18당시 전남도경국장 안병하씨. 그는 5공의 폭압 속에 말 못할 ‘광주의 한’을 끌어안은 채 신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그런데 지난해 광주로 완전 이주한 그의 부인이 그의 광주사랑을 잇고 있어 화제다. 이재의 (광주일보 예향 기자) ‘5·18 피해자’된 전남도경국장 지난 93년 7월 중순 이색적인 한 사람이 5·18광주민주화운동 피해자로 신고서를 접수시…

  • 인터뷰 5·18 검찰수사에 대한 5共측 李亮雨변호사의 입장 5共 탄생은 국가보위 세력과 民主化세력간의 갈등의 결과 全斗煥 前대통령의 법률고문인 李亮雨변호사는 「검찰의 5·18수사결과는 법률판단을 회 피한 정치적 결정」이라고 비난했다. 또 新軍部집권과정에서 國憲문란 목적의 폭동이 존재 하지 않았기 때문에 「내란」이 아니라고 해석했다. 李변호사는 80년 봄에 新軍部라는 세력 은 존재하지 않았고, 집권 시나리오도 없었다고 주장한다. 질문 : 趙 甲 濟 月刊朝鮮부장 정리 : 金 容 三 月刊祖先기자 全斗煥 前대통령측의 …

  • 曺喆鉉 신부의 검찰 수사결과 반박 인터뷰 『우리는 용서할 상대가 없다』 曺喆鉉(세례명·備吾)신부는 5·18관련 검찰수사에 대해 일면 수긍하면서도 『학살 관련자들에게 면죄부를 주기 위한 결론』이라며 불신감을 감추지 않았다. 사망자 2천명 설, 헬기 기총소사도 사실이며, 검찰이 밝힌 사례외에도 숱한 양민학살이 저질러졌다는 것이다. 曺신부는 金永三정부는 광주의 진실을 밝힐 수 없다며 차기 정권에 그 처리문제를 기대하고 있었다. 누가 집권하든 광주문제의 부담은 계속 이어지게 된 셈이다.金容三 月刊朝鮮 기자 金永三 정부에 기대 않는…

  • 인터뷰 韓勝憲 감사원장 “김대중 내란 음모사건 재심 필요하다” 박성원 동아일보 신동아 기자 한승헌(韓勝憲)감사원장은 80년 「김대중내란음모사건」에 연루돼 구속기소된 뒤 계엄법 위반혐의로 1심에서 4년형을 선고받은 바 있다. 30여년간 군사통치 과정에서 숱한 시국사건 변호를 맡았던 한감사원장은 이 사건을 포함해 여러 차례 구속되거나 연행돼 수난을 당하기도 한 시국사건의 산 증인.한승헌 감사원장은 인터뷰에서 인권변호사 출신답게 김대중내란음모사건의 법적 문제점과 그 정치적 성격 등에 관해 조목조목 입장을 밝혔다. 그는 재심을 통…

  • 특별기획 80년 5월 光州 외국인이 證言하는 「光州」의 마지막 날, 내가 본 그 現場 헨리 스코트 스톡스 (당시 美「뉴욕 타임즈」東京特派員) ―예술은 하나의 사치이다. 그것은 침착하고도 깨끗한 손을 필요로 한다― 「귀스타프 플로베르」 얼마전 런던에서 만난 한 은행가는 자신이 얼마전 북한의 외채 10%를 사들였다는 놀랄 만한 이야기를 내게 들러주었다. 그의 말인즉 9천만달러에 가까운 북한외채를 담보로 약 8백만달러를 대출했는데, 만약 그 외채증서가 상환된다면 그의 은행은 8천2백만달러를 손쉽게 번다는 것이다.글세,…

  • 특별기획 80년 5월 光州 외국인이 證言하는 「光州」사망자, 3백명은 넘는다 필립 퐁스(프랑스 「르 몽드」記者) 「학살」몇 시간 후 光州도착 1980년 5월 21일 아침, 우리가 광주에 막 도착해서 찍은 사진들을 보면 당시 받은 첫인상이 떠오른다. 폭력이 거의 없는 민중봉기와 거리를 돌아다녀도 전혀 위험하지 않은 정도의 투쟁을 전날 밤에 겪은 도시의 모습일 뿐이었다. 당시 「뉴욕 타임즈」지의 특파원이었던 동료기자 심재훈과 자동차로 새벽에 서울을 떠날 때만 해도 우리는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전혀 알 수 없었다. 그 전날 우리는…

  • 특별기획 80년 5월 光州 외국인이 證言하는 「光州」는 全斗煥집권의 단계적 쿠데타였다 「마크 피터슨」(美브리검영大극동문제연구소) □編輯者 註 광주민주화운동 당시 주한 美대사 「글라이스틴」과 美8군사령관 「위컴」의 「광주」관련증언을 기록한 미국학자의 논문이 최근 발표돼 「광주사태」에 있어서 미국의 역할과 입장을 엿볼 수 있는 자료로 주목하고 있다. 웨스트뷰출판사의 광주사건논문집 『광주봉기』에 실린 「마크 피터슨」(Mark Peterson. 브리검영大 극동문제연구소)의 「미국과 광주사건」(Americans and the K…

  • 긴급입수·피터슨 목사의 광주 증언록 내가 겪은 광주, 80년 5월 아놀드 피터슨 미국 남침례교 목사. 80년 당시 광주에서 선교활동 이 글은 80년 5월 광주 시민에 대한 총격이 흔히 알려진 5월 21일이 아니라 5월 20일부터 시작되었음을, 그리고 광주 시민에 대해 무차별한 헬기 기총사격이 자행되었음을 주장하는 한 외국인 선교사의 기록이다. 피터슨 목사는 자신의 주장을 사진을 통해 뒷받침하고 있다. 이 피터슨 목사의 증언록이 광주 전 신문의 지면세 대서 특필되는 동안 서울의 거의 모든 언론은 피터슨 목사의 헬기기총사격 주…

  • 충격증언 미선교사 피터슨의 광주항쟁 현장기록 신군부, 광주 폭격까지 계획했다 ○ 미공군, 미국인 구출 위해 병력특파 준비 ○ 사고 직후 군당국 조사, [사망자 8백32명] ○ 헬기 난사 장면 사진 찍었다 ○ 진압군 들어올때 죽음 예감,유서 썼다 필자 아놀드 피터슨 목사(50)는 침려교 선교사로 75년부터 81년까지 광주에서 활동했다.80년 광주민주화운동 당시 내내 현장에 있으면서 중요 장면을 지켜봤다. 지금은 미국 일리노이주에서 목회활동을 하고 있다. 최근 그는 80년 당시의 메모와 기억을 토대로 광주민주화운동에 대…

  • 미국은 광주문제에 책임없다 ? 글라이스틴 전 주한대사, 책임회피 발언 월리엄 글라이스틴 전(前)주한 미국 대사는 지난5월15일 , 미국은 80년 5월 광주 사태 당시 폭동진압을 위해 한국 육군의 광주 출동은 허가했으나 한국측이 미정부의 거듭된 경고와 자제 요청을 무시하고 무력진압을 결행했다고 주장했다. 그는 이날 워싱턴에서 가진 일본 아사히신문 이와무라 특파원과의 회견에서 유엔군 지휘 하에 있는 제20사단을 광주에 파견한 것은 이 사단이 도시 군중의 취급에 익숙했기 때문에 자신이 워싱턴에 연락, 허가 했다고 말하고 , 그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