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주사태 당시 주한미국대사 윌리암 글라이스틴의 증언/미국은 사과할 일이 없다.안재훈(신동아, 1985. 7)-
제임스 릴리 주한 미국대사/광주사태 전면조사 환영한다(월간조선, 1988. 7)
「그레그」駐韓美大使 독점인터뷰 『5공시절 미국의 침묵은 실수였다』 韓國通이자 백악관通 「도털드 그레그」 通韓美大使(63)는 서울에 친구가 많다. 그래서 그는 美행정부 내에서 韓國通으로 불린 韓國通으로 불린다.「부시」美대통령의 부통령시절 그의 안보담당보좌관이었던.그는 동시에 백악관통이기도 하다. 한국통과 백악관통이기도 하다. 한반도 주변관계에 질적인 변화가 예상되는 중대한 국면에서 이 점은 그가 가진 강점이 아닐 수 없다.광주민주화운동 10주년이 되는 시점을 앞두고 미국대사관 대사실에서 그를 만났다. 단순히 광주사태와 미국…
위컴 미8군사령관 AP통신 익명 인터뷰(1980년 8월8일) 미국, 全斗煥장군지지 1980년 8월8일 AP통신 서울 특파원 테리 앤더슨氏는 위컴 美 8군사령관과 익명을 전제로 한 인터뷰를 갖고「全斗煥장군이 대통령이 되면 미국은 그를 지원할 것』이 라는 내용의 기사를 송고했다. 위컴 사령관의 익명 조건은 AP통신 보도 이후 全斗煥 장군이 발언자를 확인해줌으써 무산됐으며 美국무성은 위컴 사령관의 발언을 부인하고 나섰다.위컴 사령관은 1979년12·12 사건 때 측에서 韓美연합사의 작전통제권 안에 있던 9사단 병력을 임의로 동원한…
광주사태」당시 광주지역사령관 정웅장군 인터뷰/진상은 때가 오면 밝히겠다.윤재걸(신동아, 1987. 10)
鄭鎬溶 광주사태 책임자 밝히다 第6共和政의 견인차 제 13대 국회의원의 총선 열기가 지난해의 대통령선거에 이어 다시 고조되고 있다. 기자 大邱 西區 甲에 민정당 공천으로 출마, 민의에 수렴을 외치며 민의에 호소하고 있는 정호용씨를 만나 그와의 두 번째의 공식적인 면담을 가지게 되었다.두번의 만남은 각각 처해진 상황과 입장이 대조적이었다. 첫 번째의 만남은 그가 최고통치권자의 임명에 의해 내무장관직에 재직하고 있던 지난해 5월 초순 때였다. 당시는 4·13호헌조치 직후로 정국이 경색일변로로 치닫는 등 극히 어수선한 시기였다. …
「내가 아는 「光州사태」는 이것이 전부요』 처음에는 「光州사태」 잘 몰라 朴俊炳민정당사무총장은 경력으로 보아 왜나 「근엄한」 군출신인사로 인식된다. 소위 「경복궁팀」의 한사람으로 [12·12]에 참여했고, 光州사태 때는 20사단장으로 진압을 지휘한데다, 보통사람들에 차 괜히 겁을 먹게 하는 국군보안사령관을 지낸 4성 장군출신이기 때문이다. 많은 사람들은 군출신 인사들 중에서도 「무서운」 경력이 많은 그이기에 만나기 전에는 상당히 부정적인 이미지를 가지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6월12일 일요일 저녁, 약속장소에서 처음 보니 일단…
민정당 사무총장 박준병 "어느 경우든 군부의 정치개입 없을 겁니다" 확인인터뷰 온국민이 관심이 '광주민주화운동 조사특위'의 활동여부에 쏠려 있는 가운데 과연 80년 광주의 5.17에서부터 5.21까지의 열흘동안 '무슨일이 어떻게 일어났느냐'는 문제가 주목되고 있다. 당시 20사단장으로서 광주진압을 직접 지휘한 한사람인 박준병 민정당 사무총장이 당시의 상황과 군부의 정치개입문제에 대한 자신의 의견을 말했다. 광주에 관계된 군인사증 최초의 공식발언자 박총장 결코 평탄하지만은 않을 '여소야대'의 정치구도에서…
광주특위위원 김광일 민주당 의원/정호용 인간연구부터 했다.권영기(월간조선, 1989. 1)
내가 정웅 장군을 체포 수사했다 허장환 (편집자의 말) 「5·18광주민주화운동」당시 發砲명령과 作戰 지휘권문제가 쟁점화되고 있는 가운데, 당시 광주지구보안대 상사 許壯煥씨(41)가 지난 12월 G일 平民黨술에서 「양심선언」을 했다. 이날 허씨의 발언 가운데 주목할 사실은 다음과 같다.▲1980년 5월 21일 全보안사령관이 광주 K-57 비행장에 도착, 전투교육사령부에서 사태진행에 대한 브리핑을 받은 후 헬기로 광주일대를 살펴보고 상경했으며, 그후 전교사 기밀실에서 전투교육사령관 尹興禎 중장, 특전사령관 정호용소장, 11공수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