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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5.18 진상은 가려져 있다. (전원영,본지기자) 이양우변호사의 변 -재판다운 재판으로 진상은 규명돼야 한다- "12 · 12관련 재판에서 우리는 세가지 새로운 쟁점을 발견했습니다 " 까칠한 얼굴에 몸살감기까지 겹쳤다는 이양우변호사는 고군분투속에서도 전두환전대통령의 변호인으로서의 의욕과 패기가 넘쳐 흐르는 듯 했다. 그는 "첫째 정승화 전 참모총장이 유죄나 무죄냐 하는 문제 즉 여론에 의해 절대선(무죄)인 것처럼 부각됐던 정씨가 유죄의 가능성이 있다는 쟁점의 중심인물로 새삼 부각되었다"고 말…

  • 12.12, 5.18 재수사 검찰 수사 기록 신혁확 찾아가 중앙정보부장직 요구했다. 전두환 예하 공수특전단과 20사, 광주파병 허락했다. 노태우 전두환은 최규하의 약점 잡고 협박했을 것 신현확 나는 신군부주식회사의 심부름꾼이었다. 권정달 안필준 보안사령관 친위쿠데타 지시했다. 한용원 「안개정국」80년 짧았던 「서을의 봄」을 사람들은 달리 이렇게 부른다. 온 국민의 민주화 열망에도불구하고 정국은 한치 앞을 내다볼수 없는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결국 전두환보안사령관의 집권으로 국민들은 12 12 이후 군부를 장악한 신군…

  • 역사적인 피고인들의 법정 최후진술,전·노등 16명.최보식(월간조선, 1996.9)

  • 특별시론 전두환 노태우 1심 재판 입체분석 '5.18 실상'진실규명은 이제부터 한인섭(서울대 교수.법학) 세기의 재판, 역사적 재판이라 일컬어지던 12 · 12, 5 · 17, 5. 18 1심재판이 종결되었다. 1979년과 1980년, 그 시대의 주역들에 대한 유죄선고는 우리 역사상 가장 참담하고 어두운 시대에 대한단죄이다 한때 「구국의 결단」으로 자화자찬되었던 사건들은 「성공한 쿠데타」로, 끝내는 내란 및 내란목적살인의 범죄행위로 규정되었다 그런 의미에서 이 재판은 한 시대를 심판대에 세운 것이다. 건국 이래 사법부에 부과된…

  • 12.12 5.18재판 애당초 시작하지 말았어야 했다. 김광휘(방송작가) 1996년 2월 26일에 시작되었던 전두환 전 대통령에 대한 비자금 공판으로 막을 올린 5 · 6공에 대한 재판은 같은해 11월 I4일에 항소심이 일단 마무리가 됨으로써 현재 이 사건은 1996년 12월 16일의 선고만 남겨 놓고 있다.이 글이 나올 때쯤이면 이미 2심 판결이 끝나고 아마도 이 사건은 대법원으로 옮겨질 것이다 1 · 2심 끝났지만 명쾌한 규명안돼 아무튼 이 재판은 첫째, 규모면에서 엄청난 면모를 보여 주었다. 생존해 있는 전직 대통령 세…

  • 5.17은 군부 독재 수립 위한 쿠데타 미국과 사전 협의 '제 2의 유신'획책 현 군부 독재 정권이 왜 폭력과 기만의 집단으로 규정되어야 했는가? 6월 민주 항쟁은 왜 그토록 엄청난 폭발력을 지녔었는가? 이 같은 질문에 정확한 해답이 자유롭게 모색될 수 있기 위해서도 이만에 민주화가 달성되어야 한다. 노태우씨는 최근 관훈클럽 대담에서 12.12는 구국 일념에서 한 행동이며 5 ·17은 혼란을 진정시키고 질서를 잡기 위한 행위였다고 주장했다. 12·12가 군부 반란이라는 것은 당사자들의 증언을 통해 명확해졌다. 그렇다면 이제…

  • 육사11기의 6인 실력자, 천금성(신동아, 1998, 1) 「12· 12사태」의 정리를 위해 「5· 16」과 「5·17」을 일으킨 군부세력들이 한국 현대사의 흐름을 주도한 장본인이었다는 사실을 부정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 두 가지가 다 공통점을 갖고 있는데, 그것은 첫째로 『누란의 위기에 처한 나라를 구해 내기 위해 구국이염의 차원에서 부득이 군인이 나서지 않을 수 없었다』는 그들 나름의 주장이 일치한다는 점과, 둘째로는 거사→군부 장악이 결국에는 정권 장악으로 연결되었다는 결과론이라 할 수 있다. 이러한 공통점이 있…

  • 5.18계엄군의 「작전 상황 보고서」 이 보고서는 계엄군 입장에서 정부 최고권 자에게 보고한 서면의 일부이다. 정부는 19080년 5월 17일 밤 7시 30분 임시 국무회의를 소집, 5월 18일 0시부터 비상계엄을 전국 일원으로 확대할 것을 결의하였다. 공고 비상계엄 지역을 1980년 5월 17일 24시를 기해 전국 일원으로 변경한다. 제안 이유 1979년 10월 27일 04시를 기해 제주도를 제외한 전국 일원에 비상계엄을 선포 했는 바 현재 북괴의 동태와 전국적으로 광대한 소요 사태 등을 감안할 때 전국 일원이 비상…

  • 5.17당시의 군부 인맥 5월 16일의 비상 회의 5월16일 국방부 회의실에서는 비상 전군 주요 지휘관 회의가 열리고 있었다. 이 날의 회의를 위하여 정호용 특전 사령관, 최성택 합참본부 제 2국장(정보국)은 전날 밤을 세웠다. 안건도 밝히지 않고 급히 소집된 이 회의가 전두환 정권과 노태우 정권을 태동시키는 서곡이라는 것을 누가 예측하였겠는가. 이날 회의는 주영복 국방 장관의 주재 하에 개최되었다. 참석자들은 합참의장, 육. 해. 공군 참모 총장, 노태우 수도 경비 사령관, 정호용 특전 사령관, 윤성민 제 1군사령관, 차…

  • 80년 5월 군의 정치 개입 결정한 전군 주요 지휘관 회의 회의록 전문(신동아, 1988. 10) 합동참모본부 정보 국장(최성택) : (정세 분석 현황 설명) 국방 장관(周永福) ; 이제 정보 국장이 국내 정세를 소상히 얘기했습니다. 국기조차 위협되고 있는 현실계서 북괴의 도발을 대비해야 될 이 시점에서 어떤 단안을 내리지 않으면 안될 시기입니다. 오래 기다려 걷잡을 수 없는 상황이 되면 그때는 때가 늦게 됩니다. 제가 생각하기에는 이러한 혼란요인을 배세하기 전에는 어떤 정부가 들어서도 불가능한 실정입니다. 어떤 조치를 취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