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남대학교 5·18기념관은 80년 5·18항쟁을 정점으로 하는 우리나라의 민주화운동 역사에서 전남대인들이 함께 걸었던 발자취를 모아 기억하고 기념하기 위한 공간이자 또한 이를 현재적 의미로 승화시키기 위한 공간이다.
5·18기념관에는 광주의 일반 시민, 전남대학교 출신 민주화운동가 및 교수들이 소장하고 있던 성명서, 전단지, 회의록, 메모, 서적, 사진, 비디오, 희생자들의 유품, 항쟁 당시 용품 등 귀중한 자료 1,000여점이 각 주제별로 전시되어 있다. 또한 1960년대부터 2000년대까지의 전남대학교 민주화운동의 역사를 한눈에 살펴볼 수 있도록 했다.
민주화운동 과정에서 산화한 김남주, 윤상원, 박관현, 박승희 등 전남대학교 출신 열사들의 활동과 수고한 정신도 보고 느낄 수 있다. 5·18기념관은 비록 넓지 않은 공간이지만 세대 및 지역간에 ‘단절된 5·18’을 서로 공감하여 연대할 수 있는 기억과 학습의 장이다.
- 제1관 민주역사관 : 제1관 민주역사관은 1960년대 이후 현재까지 전남대 학생과 교수가 참여했던 주요 투쟁과 운동의 기록을 소개하고 있다.
- 제2관 오월관 : 제2관 오월관은 5·18항쟁의 전개과정을 사진과 현장 자료들을 중심으로 재현하여 5·18항쟁이 갖는 역사적 의미를 되새기는 공간이다.
- 제3관 민주열사관 : 제3관 민주열사관은 민주화 운동에 헌신하였던 전남대 열사들의 삶을 이해하고 추모하는 곳이다.
- 제4관 민주영상관 : 제4관 민주영상관은 민주화운동의 영상기록과 영화, 비디오 등 영상자료를 관람할 수 있는 곳이다.
- 제5관 민주감성관 : 제5관 민주감성관은 5·18 및 민주화운동 관련 자료와 예술작품을 기획 전시하는 공간이다.
- 제6관 아카이브실 : 제6관 아카이브실은 전남대가 축척해 온 민주화운동 연구와 성과와 기념물들을 보관·열람·공유하는 공간이다.
'겨울공화국' 유신체제를 지나 움트는 민주 의지
1960년 4·19혁명은 이승만정권의 315부정선거 및 장기 집권 음모에 맞서 민주주의를 회복시킨 우리 나라의 최초의 시민혁명이다. 혁명에 참여한 전남대생들 중에서는 15명이 중경상을 입었고 37명이 군경에 연행되었다. 혁명 후 전남대생들은 민주화 결의안을 채택하였고, 교수들도 각 단과대학별로 학원 민주화를 지지하는 성명서를 발표했다.
1961년 쿠데타를 통해 집권한 박정희 정권은 1965년 12월 대한민국에 불리한 내용의 한일협정 비준서를 교환하여 한일국교를 정상화했다. 그러나 대학생과 야당은 1964년부터 1965년 협정이 체결된 후까지 굴욕적인 한일협정체결 반대 및 무효화를 주장하는 대규모 시위를 전개했다. 이에 정부는 계엄령과 휴교 등 물리적 조치로 대응하였고, 전남대에서는 1964년과 1965년 두 해에 걸쳐 이홍길(사학61)외 30여명의 학생들이 징계를 받았다.
박정희 정권은 1969년 국회에서 장기집권 음모의 일환으로 3선 개헌안을 변칙 통과시켰다. 1971년에는 대학통제정책으로 교련교육을 강화하였고 제7대 대통령 선거에서 부정을 저질렀다. 대학가는 박정희 정권에 맞서 3선 개헌 반대, 교련 반대, 부정선거 규탄 등 다양한 反독재 투쟁을 전개했다. 박정희 정권은 학생들의 저항에 1971년 전남대학교를 비롯하여 8개 대학에 휴교령을 내렸다. 이 일련의 사태로 33명의 전남대 학생들이 학사징계를 받았다.
박정희 정권은 1972년 1월 17일 유신체제를 선포하였다. 유신체제는 대통령 1인에게 권력을 집중시켜 영구 집권을 가능하게 한 민주주의의 완전한 부정이었다. 언론의 자유는 억압받았으며, 대학은 반복되는 위수령과 긴급조치, 휴교령 등으로 황폐해졌다.
1971년 10월 13일 전남대에서는 대학을 병영화하려는 박정희 정권 타도를 주장하는 최초의 지하신문 ‘녹두’지가 발행되었다.
유신체제 선포 직후인 1972년 12월에 유신헌법을 비판하는 지하신문인 ‘함성’이 전남대와 광주 시내 일원에 뿌려졌다. 유신체제에 저항한 최초의 유인물인 ‘함성’은 이듬해 제호를 ‘고발’로 바꾸고 전국에 배포하려다 적발되어 이강(법학69)외 10명이 구속되었다.
1974년 서울대, 전남대, 경북대 학생 등이 주도하여 전국민주청년학생총연맹(민청학련)을 조직하여 유신체제에 반대하고 경제·사회적 모순을 극복하려 했다. 정부는 긴급조치 4호를 선포하여 이 단체와 관련된 학생들을 내란음모죄로 몰아 구속하고 사형 등 중형을 언도했다. 윤한봉(축산 71, 전남북 총책), 김상윤(국문 68, 전남대 연락책) 등 18명의 전남대생들이 중형을 선고받았다.
1978년 6월 27일 송기숙 교수를 비롯한 11명의 전남대 교수들은 "학원의 민주화와 민주교육 그리고 외부의 간섭 배제"를 주장하며 '우리의 교육지표'를 발표했다. 성명서 발표 직후 서명 교수들은 전원 연행되어 해직되었지만 타대학 및 단체들의 지지 성명이 이어졌다.
1979년 10월, 학원 감시 사찰기관으로 비판 받아 온 '전남대학교학생상담지도관실'에 불을 질러 학원사찰에 항의한 사건이 발생했다. 이 사건으로 20여 명이 연행·구속되고, 제적 및 정학 처분을 받았다.
전남대 학생들은 사회모순을 연구하고 시정하려는 다양한 운동을 전개하였다. 민청학련의 사람들이 중심이 된 '민주 구속자 협의회'를 비롯하여 가톨릭농민회, 민족사회연구회, 들불야학, 고전독서회(RUSA), 흥사단아카데미 등 여러 이념, 종교, 문예 운동 단체들이 생겨났다. 이런 사회부문 및 서클 운동은 1980년대 초에 전개된 민주화운동의 주요한 동력으로 작용했다.
1980년 봄, 5·18민주화운동의 발발
1979년 10월 26일, 박정희 대통령이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의 저격으로 사망하면서 유신체제가 붕괴되었다. 1980년 봄, 국민들은 새로운 헌법에 기초한 민주주의를 갈망했다. 반면에 전두환을 중심으로 한 신군부세력은 민주주의를 부정하고 군사독재체제의 연장을 획책했다. 이에 전국의 대학생들과 야당, 그리고 민주인사들은 신군부의 반민주적 음모를 규탄하고 민주화를 촉진하기 위한 대규모 집회와 시위를 연달아 개최했다.
1980년 3월, 서클 대표들이 모여 학자추를 구성했다. 4월에 80년 5월 민주화의 봄을 이끄는 중요한 역할을 한 총학생회가 출범하고 박관현(법학78)이 총학생회장으로 선출되었다. 학생회는 출범 후 계엄령의 즉각 해제, 어용교수와 학내 구 잔재세력 청산, 병영 집체훈련 거부, 민주 인사들의 복권 및 석방을 촉구했다.
전남대 총학생회는 1980년 5월 6일 비상학생총회를 개최하고 5월 8일부터 14일까지를 “민족·민주화 성회” 기간으로 정하여 학원 자율화, 비상계엄 해제, 양심 있는 교수·시민 등의 동참을 요구하였다. 5월 14일 전남대생 7천여 명은 도청 앞 광장에 집결, 집회를 개최하였고 16일은 전남대 교수·학생·시민 등 5만여 명이 참여하여 횃불 시위를 벌였다. 전남대 교수들도 비상계엄의 즉시 해제, 민의를 반영한 헌법제정 및 민주 정부로의 정권 이양, 학원 민주화의 달성, 학생들의 슬기롭고 평화로운 행동 등을 촉구하는 성명서를 발표하면서 성회에 동참했다.
1980년 5월 17일 밤 신군부는 비상계엄을 전국에 확대하여 모든 정치 활동이 중지되고, 정치 목적의 옥·내외 집회 및 시위가 금지되었으며, 언론에 대한 사전검열 조치가 강화되고, 대학에 휴교령이 발동되었다. 김대중, 문익환, 김영삼 등 야당 및 재야운동 지도자들이 체포·구금 혹은 연금되었다. 김대중에게는 재판에서 '김대중 내란 음모 사건' 혐의로 사형선고가 내려졌다.
5월 18일 오전 10시, 학교에 등교한 200여명의 전남대생들과 정문을 막아선 계엄군·경찰들이 정문 앞 용봉천 다리를 사이에 두고 대치·충돌하였다.
계엄군은 18일 오후부터 강력한 시위 진압을 시작했다. 시위 참가자는 물론 도로 주변에 있는 일반 시민들까지 곤봉을 구타하고 짓밟았으며 대검으로 찌르기도 했다.
계엄군의 만행에 분노한 시민들은 19일부터 시내로 나와 계엄령 해제, 전두환 퇴진, 김대중 석방을 외치며 대규모 시위를 전개했다. 20일 오후, 공수부대의 만행에 격분한 200여 대의 택시들이 버스와 함께 무등경기장에서 금남로로 경적을 울리며 차량시위를 전개했다.
계엄군은 옛 전남도청과 금남로에서 시민들과 대치 중, 애국가가 울려 퍼지는 순간 시민들을 향하여 집단 발포하였다. 비무장상태의 시민들을 향해 조준사격을 하여 무고한 이들의 목숨을 앗아갔다.
518항쟁, 해방광주와 대동세상으로
계엄군의 발포에 맞서 21일 오후부터 시민들이 무장을 하기 시작하면서 자연스럽게 '시민군'으로 불렸다. 도청, 전남대 의대, 노동청, 광주공원 일대와 금남로 등지에서 시민군과 계엄군 사이의 시가전이 벌어지면서 항쟁은 나주, 화순, 완도, 무안, 목포 등 전남 일원으로 확산되었다.
21일 오후, 시민 및 시민군은 계엄군과 경찰을 시외로 퇴각시키고 도청을 비롯한 전 시내를 접수했다. 시민 및 학생수습 위원회가 각각 구성되어 광주 문제의 해결방안을 논의했다. 시내에서 퇴각한 계엄군은 광주 외곽을 봉쇄했다. 계엄군의 발포로 광주 시내의 병원들은 총상환자로 가득하였고 의사와 간호사들이 헌신적으로 환자들을 치료하고 시민들이 헌혈에 자발적으로 동참하여 부상자들의 피해를 줄었다. 시민군의 치안 아래 범죄율은 오히려 평상시보다 더 줄어들어 광주시민들의 성숙함과 항쟁의 성격을 잘 드러내 주고 있다.
27일 새벽, 시민군이 지키던 도청, YMCA, YWCA, 전일빌딩, 광주공원 등에 계엄군이 진입하여 양측 사이에 총격전이 벌어졌다. 이 총격전으로 많은 시민군이 사망하고 광주는 다시 계엄군의 수중에 들어갔다. : 사망자 207명 , 부상자 2,392명 , 기타희생자 987명(5·18민주유공자 보훈대상자 현황)
1980년 5월 17일 밤 신군부는 비상계엄을 전국에 확대하여 모든 정치 활동이 중지되고, 정치 목적의 옥·내외 집회 및 시위가 금지되었으며, 언론에 대한 사전검열 조치가 강화되고, 대학에 휴교령이 발동되었다. 김대중, 문익환, 김영삼 등 야당 및 재야운동 지도자들이 체포·구금 혹은 연금되었다. 김대중에게는 재판에서 '김대중 내란 음모 사건' 혐의로 사형선고가 내려졌다.
한눈에 보는 518항쟁의 전개과정
계엄군의 집단 발포와 무장항쟁 (1980. 5. 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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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 5. 21.
오전 실탄 지급 받은 공수부대원 맨 앞으로 배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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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 5. 21.
도청 스피커에서 애국가 울리자 공수부대 사격 시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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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 5. 21.
시민들이 아시아 자동차 공장에서 군용트럭, 장갑차 수십 대 끌고 나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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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 5. 21.
화순, 나주지역에서 무기 획득한 시위대가 도청 앞에서 시가전 전개 / 오후 공수부대원 시 외곽으로 철수
해방광주, 시민자치 공동체 (1980. 5. 22. ~ 5. 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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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 5. 22.
시민수습대책위원회 결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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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 5. 22.
시체 18구를 도청광장에 안치한 채 시민대회 개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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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 5. 23.
학생수습위원회 대변인 외신기자들에게 광주 상황 브리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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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 5. 26.
시민군, "계엄군이 오늘 밤 침공할 가능성이 크다"고 공식 발표
무력진압과 결사항전 (1980. 5. 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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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 5. 27.
새벽 탱크를 앞세우고 계엄군 시내로 진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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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 5. 27.
새벽 도청주변 완전 포위, 시가전 전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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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 5. 27.
새벽 계엄군, 도청을 비롯한 시내 전역 장악하고 진압 작전 종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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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 5. 27.
새벽 계엄군 무력진압으로 5·18항쟁 막을 내림
5월 운동에서 6월 항쟁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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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유를 빼앗긴 대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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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위 방지를 위한 학생지도 지침들을 통해서 알 수 있듯이 1980년대의 대학은 자유와 자율성을 완전히 상실했다. 대학의 교직원들은 학생들을 감시·통제하는 역할을 강요받았고, 학교 당국은 시위 우려가 있는 학생들을 분류하여 감시·지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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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18항쟁의 계승을 위한 민주화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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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년대 전남대 캠퍼스에서는 5·18항쟁의 진상 규명과 학살자 처벌, 대학 민주화, 구속 학생들의 석방과 복학, 광주학살을 묵인한 미국의 사과, 노동자·농민 등 사회적 약자들에 대한 배려 등을 목표로 수많은 시위가 이어졌다.
또한 전남대 총학생회장인 박관현이 1982년 구속 후 사망하자 전남대와 광주 시내 일원에는 5·18항쟁 이후 가장 치열한 대정부 투쟁이 전개되었다. 매년 10월 박관현 열사 추도 시위는 대학가를 달구는 연례행사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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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총학생회의 부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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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4년에 전남대생들은 대학 민주화를 위해 ‘학원자율화추진위원회’(얼마 후 민주회복추진위원회로 바뀜)를 구성했다. 1985년에 학도호국단체 대신 직선제에 의한 총학생회가 출범하고 학생회장에 오병윤이 당선되었다.
- ㆍ1985년 투쟁조직 및 전국적 연대조직 출범
- ㆍ민주쟁취·민중수호·민족통일 투쟁위원회(삼민투)
- ㆍ5·18진상규명투쟁위원회(오진투)
- ㆍ전국학생총연합(전학련)
- ㆍ호남지구학생연합(호학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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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월항쟁 후의 민주화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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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7년 6월항쟁 후 한국 사회는 정치뿐만 아니라 교육, 노동, 문화 등 각 분야에서 민주화운동이 더욱 거세게 일어났다. 민주화 세력은 5·18 진상 규명과 책임자처벌, 남북화해와 평화통일, 민중의 삶의 질 개선, 민주화 세력의 집권 등을 희망하며 민주화운동의 고삐를 늦추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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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월항쟁 후의 학생조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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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항쟁 후 학생운동을 이끈 전국조직으로 전국대학생대표자협의회(전대협)가 출범했다. 전대협은 발족선언문에서 자주적 민주 정부 수립, 조국의 평화통일, 민중연대, 학원 자주화, 백만학도의 통일단결 등을 활동목표로 내걸었다.
전대협의 출범과 동시에 광주·전남지역 대학생들은 전남지역대학생 대표자협의회(남대협)을 결성했다. 전대협은 1993년에 한국대학총학생회연합(한총련)으로 바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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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국 학생운동의 중심지로 떠오른 전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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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항쟁 후 전남대 학생운동의 큰 흐름은 민주화, 반미, 통일운동, 사회적 약자들을 위한 연대 운동으로 1990년대 이후 전국 학생운동의 중심에 서서 활동했다. 학생들 중 여러 명이 전국학생조직의 대표를 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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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치열한 학생운동과 박승희 분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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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1년 4월 26일, 전남대생이었던 박승희(식품영양학, 90)는 명지대생 강경대를 사망에 이르게 한 정부의 폭력성을 규탄하며 온몸에 시너를 끼얹고 분신했다. 전남대생들은 박승희를 추모하는 대규모 집회와 가두시위를 전개하였고, 이후 매년 4월에 박승희 정신 계승 집회를 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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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교수들의 민주화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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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7년 6월항쟁 후 전남대는 대학 민주화의 일환으로 전국에서 두 번째로 총장 직선제를 관철시켰다. 또 교수평의회를 결성하여 학원 민주화를 도모했다. 같은 시기에 ‘민주화를 위한 전국교수협의회(민교협)’라는 전국적 규모의 민주 교수 조직이 출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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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남대 교수들의 시국선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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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남대 교수들은 민주화운동의 중요한 길목마다 시국선언문을 발표했다.
- - 1986년 4월, ‘우리의 견해’라는 시국선언문을 발표하여 민주화와 대학의 자율을 촉구
- - 1986년 6월, 전국 23개 대학교수 265명이 ‘우리의 뜻을 다시 한번 밝힌다’ 발표(민주헌법 제정 등 촉구)
- - 1987년 5월, 60명의 교수들이 ‘현 시국에 대한 우리들의 견해’ 성명(직선제 개헌 촉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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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치적 민주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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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 민주화운동의 역사는 권위주의 정권을 몰아내고 민주적인 정부의 수립을 이끌어냈다. 5·18항쟁이 일어난 지 16년 만에 전두환, 노태우 두 전직 대통령을 부정부패 및 내란 목적 혐의로 법의 심판을 받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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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민주주의의 제도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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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8특별법’ 제정 운동은 1980년대 이후 민주화운동의 주요 목표 중의 하나였다. 1995년 ‘5·18민주화운동에 관한 특별법’이 제정되어 광주 시민들의 명예회복이 이루어졌다.
또 1997년에는 5월 18일이 ‘광주민주화운동기념일’로 제정되었으며, 국가인권위원회와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의 설치 등 인권 보호와 신장을 위한 진일보한 제도적 조치들이 속속 마련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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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통일운동의 큰걸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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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화운동세력들은 정치적 민주화 외에 통일을 또 하나의 중요한 과제로 설정했다. 통일운동은 2000년 6월 15일 남북정상회담으로 큰 진전을 이루었다.
남북의 두 정상은 대립과 반목으로 점철된 남북관계의 기본 틀을 평화공존과 화해·협력으로 전환하는 남북공동선언에 합의·서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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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민주화운동의 승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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억압되었던 시민의 삶의 개선이 민주화운동의 새로운 목표가 되면서 노동자와 농민 운동뿐만 아니라 여성, 평화, 인권, 문화예술, 소수자, 환경운동 등 새로운 운동들이 출현하여 민주주의의 지평을 넓혀가고 있다. 이제 민주화운동은 새로운 삶의 구성원리로 승화될 것이다.
인물소개
1946년 전남 해남군 삼산면 출생
1969년 전남대 영어영문학과 입학 후 3선개헌 반대 운동과 교련 반대 운동에 기여
1972년 유신체제를 비판한 지하신문인 '함성'지 제작.
반공법 위반 혐의로 구속, 전남대에서 제적
1974년 [창작과 비평]에 '진혼가', '잿더미' 등 7편의 시 발표
1977년 한국기독교농민회의 모체가 된 해남농민회 결성
1979년 남조선민족해방전선준비위원회(남민전) 조직원으로 서울에서 활동 중 구속.
징역 15년을 선고받고 광주교도소에 수감
1988년 형집행정지로 투옥생활 9년 3개월 만에 출감
1990년 5·18항쟁 시선집 [학살] 출간. 1992년까지 민족문학작가회의 민족문학연구소장 1994년 췌장암으로 사망하여 광주 망월동 5·18묘역 안장
“대학생활, 실망과 좌절의 세월이었다”
"1972년 10월 초순, 수업이 없을 때나 점심시간 때면 할 일 없이 누워서 또는 앉아서 잡담을 하여 시간을 죽였다. 대학 생활 4년, 그것은 실망과 좌절의 세월이었다. ‥‥수업 내용이란 게 미국식 생활양식과 용어를 기계적으로 외우게 하거나 문답형식의 문장을 입으로 주고받고 하는 것이었다." (『불씨 하나가 광야를 태우리라』 중에서)
1950년 전남 광산군 임곡면 출생
1971년 전남대 정치외교학과 입학, 친구 김석균, 정오현과 함께 전남대 연극반 가입
1975년 군 복무를 마치고 삶에 결정적 계기가 된 김상윤(국문 68)과 만남
1978년 ‘교육지표사건’을 듣고 근무하던 서울의 주택은행을 그만두고 광주로 귀향
1978년 광천공단에 있는 한남 플라스틱에 취업
1979년 들불야학 1기 교사로 ‘일반사회’ 과목을 16개월 간 강의
1980년 인천에서 열린 전국민주노동자연맹 결성 집회에 발기인으로 참석, 광주·전남 지역을 대표하는 중앙위원으로 선임
1980년 5월 18일 광주시민을 학살하는 공수부대에 맞서 싸우기 시작
“왜 총을 들었는가”
윤상원은 5·18항쟁이 시작되자 들불야학 식구들과 ‘투사회보’를 발행해 광주학살의 참상을 알리고 투쟁을 조직적으로 이끌었다. 26일 도청에서 시민수습대책위 대변인 자격으로 외신 기자회견을 가졌다. 윤상원은 “왜 총을 들었냐”는 물음에 다음과 같이 답했다.
“권력을 강도질하려는 전두환 쿠데타군의 음모를 만천하에 까발리고 대한민국의 민주주의를 지키기위해 광주시민은 떨쳐 일어났습니다.”
27일 새벽 4시 전남도청에서 공수부대에 맞서 싸우다가 최후를 맞았다. 1982년 윤상원을 들불야학에 인도한 박기순과 영혼결혼식을 가질 때 “님을 위한 행진곡”이 처음 불려졌다.
1953년 전남 영광군 불갑면 출생
1978년 군 복무를 마치고 전남대 법과대학 행정학과 입학
1978년 12월 광주공단노동자실태조사 작업 참여
1979년 전남대 사회조사연구회 창립에 참여
1979년 들불야학에 참여하면서 학생운동과 사회운동에 뛰어 듦
1980년 전남대 총학생회장에 선출된 후 그해 봄 학생운동을 주도
1980년 5·17 계엄확대 조치로 신군부의 1급 체포대상이 됨
1982년 서울서 노동자 생활을 하다가 체포된 후 광주교도소에 수감
1982년 7월부터 5·18항쟁 진상 규명 등을 요구하며 장기간 단식
1982년 10월 11일 건강 악화로 전남대병원에서 29세의 나이로 사망
광주의 넋으로 화하다
1980년 민족·민주화 성회를 주도했던 박관현은 5월 17일 비상계엄의 전국 확대와 함께 신군부의 1급 체포대상이 되었다. 오랜 피신 생활을 하다 1982년 4월에 체포되어 소요죄 등의 혐의로 1심에서 5년형을 선고받고 광주교도소에서 수감된 박관현은 재소자 처우개선과 5·18 진상 규명을 요구하며 40여 일간 단식하며 민주화운동을 지속하다 건강 악화로 29세의 젊은 나이로 사망했다.
1972년 전북 전주에서 출생
1990년 목포 정명여고 졸업
1990년 전남대 식품영양학과 입학. 용봉 편집위원으로 활동
1991년 4월 29일 "2만 학위 단결, 미국 반대, 노태우 정권 타도"를 외치며 분신
1991년 5월 19일 21일 간의 병상 투쟁 끝에 사망
1990년대 초의 학생운동과 박승희
1991년 4월 하순 명지대 학생 강경대가 노태우 정권 퇴진과 반미를 외치며 시위를 벌이다 경찰의 구타로 사망했다. 전남대에서 경찰의 폭력성을 규탄하는 대규모 시위를 벌였다. 이 시위 도중 박승희는 독재정권 타도 등의 구호를 외치며 학생회관 앞에서 온몸에 시너를 끼얹고 분신했다. 그는 분신 후 21일 간의 병상 투쟁 끝에 결국 사망했다.
"이 시대에 우리는 눈물을 흘린 여유가 없다. 지금 우리에게 열사는 필요없고 전사가 필요할 때다. 이 두 마디 말이 항상 마음에 남아 있었습니다. 끝까지 살아남아 열심히 싸우고 먼저 떠남을 그 어떤 말로도 사죄를 구할 수 없겠지요. 하지만 제 길이 2만 학우 한 명 한 명에게 반미의식을 심어주고 정권타도에 함께 힘썼으면 하는 마음에 과감히 떠납니다.‥‥먼저 갑니다. 죄송합니다. 하지만 후회는 없습니다."

































